황대현: 서양 기독교 세계는 왜 분열되었을까?



머리말 서양 기독교 세계는 왜 분열되었을까?

1 기독교 세계가 처음 분열된 것은 언제일까?

2 동방 정교회는 왜 서방 교회와 갈라섰을까?

3 16세기 종교 개혁은 왜 독일에서 처음 일어났을까?

4 개신교는 왜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을까?

5 가톨릭교회는 종교 개혁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6 16~17세기 종교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맺음말 기독교 세계의 분열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머리말 서양 기독교 세계는 왜 분열되었을까?

9 이 책은 2000년 전에 처음 출현한 기독교가 이후 역사에서 하나의 단일한 종교 공동체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여러 차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분열 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하면 보통 천주교와 개신교만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서유럽 기독교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자면 흔히 기독교의 분열을 이야기하면서 동방 정교회를 빠트리는 경우가 많은 데, 이는 현재 동유럽을 중심으로 동방 정교회에 소속된 신자들의 수가 대략 3억 명을 헤아린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1 기독교 세계가 처음 분열된 것은 언제일까?

17 아리우스(Arius, 250?-336)는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분이긴 하지만 여전히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17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 니케아에서 첫 번째 공의회를 개최하고 로마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간인 동시에 온전히 영원 불변한 하느님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교회 지도자들은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하느님(성부)과 예수 그리스도(성자)가 동일한 본질을 지녔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아리우스 파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아리우스주의는 상당 기간 살아남았고 더 나아가 제국 바깥에 살고 있는 게르만 족들에 대한 전도를 통해 그 생명력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


18 381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Theodosius I, 347~395)가 개최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의 결정 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여기에 성령에 관한 부분을 첨가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것과 동시에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알려진 신앙 고백을 확립하게 되었다.


19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을 주장한 정통 견해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엄격히 구분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적인 본질은 예수의 인간적 행동이나 고통과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제국에서 탄압을 받게 되자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와 인도로 건너가 자신들의 교회를 세웠으며 심지어는 멀리 중국에까지 가서 전도 활동을 벌여 경교로 알려진 분파가 성립하게 되었다.


20 451년 칼케돈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는 단성론을 배척하면서 그리스도는 서로 분리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동 될 수도 없는 두 본성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이후 단성론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주류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교회를 형성했는데 시리아의 야코부스 교회,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콥트 교회 그리고 아르메니아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까지 이 오리엔트 정교회들(Oriental Orthodox Churches)은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각 지역의 토착화된 민족 종교로서 그 전통을 계속 이어 가고 있다.


2 동방 정교회는 왜 서방 교회와 갈라섰을까?

25 오리엔트 정교회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토착화된 기독교를 뜻하는 것이라면 동방 정교회는 주로 동유럽 지역에 퍼져 있으면서 비잔티움 제국 즉,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여러 교회들을 부르는 말이다.


25 동방 정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마찬가지로 교리면에서 7성사와 화체설을 인정하고 있고 교회 조직의 측면에서도 주교 제도와 수도원 제도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으며 성인 공경과 성호 긋기의 전통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7 동방 정교회는 교황이 '동등한 자들 가운데 첫째'로서 영예적인 우선권을 가진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기독교 교회 전체의 수장으로서 갖는 수위권은 거부한다. 게다가 동방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바티칸의 교황을 정점으로 한 통일적인 교회 조직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32 로마의 주교는 서방의 유일한 총대주교일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후 교황이라고 불리게 될 로마 주교들은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둘러싼 복잡한 논쟁에서 다른 총대주교들과는 달리 일관되게 확고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33 각각 서방과 동방의 기독교 중심지로 떠오른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결정적으로 불화가 생기게 된 계기는 8세기 비잔티움 제국에서 발생한 성화상 금지 문제였다. 당시 교회와 수도원에서 널리 행해지던 성화상 숭배를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우상 숭배로 간주한 비잔티움 제국 황제 레오 3세(Leo III, 680?-741)는 726년 제국에있는 모든 성화상을 철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35 신학적인 문제에서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며 불화를 빚었는데 성령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필리오케(flioque) 논쟁이고 대표적인 경우였다. 필리오케는 '그리고 아들(성자)로부터'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단어로 서방 교회는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온다고 주장했지만 동방 교회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대로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42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이후 동·서방 교회의 교류는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고 이제 이슬람의 세력권 안에 편입된 콘스탄티노플(이스 탄불)을 대신하여 동방 정교회의 새로운 중심이자 '제3의 로마'로 러시아의 모스크바가 서서히 부상하게 되었다.


3 16세기 종교 개혁은 왜 독일에서 처음 일어났을까?

51 면벌부는 중세 교회가 죄를 지은 신자들이 참회하면서 일정한 조건(기도 자선, 순례 등)을 충족시키면 그 죄에 따르는 벌을 용서해 줄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교인들에 대항한 성전에 참여한 사람들이나 직접 전쟁터에 나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성전 수행을 위해 금전을 기부한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이와 같은 혜택을 주곤했다.


65 전쟁에 의한 제국의 종교적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가톨릭과 루터파 진영은 1555년 남부 독일의 도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 화의를 통해 마침내 타협에 이르렀다. 즉,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의 계 푸들은 가톨릭이나 루터 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통치자가 선택한 종교에 불만이 있는 백성들은 재산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로 루터파는 이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이단 분파가 아니라 가톨릭과는 구별된 합법적인 종교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종교화의의 결정이 모든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고 제국의 종교적 분쟁이 이로써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종교적 관용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4 개신교는 왜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을까?

71 마르틴 루터로부터 비롯된 루터 교회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미국 등을 제외하면 그리 많이 찾아볼 수 없고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로부터 비롯되었고 개신교에서 루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가 루터 교회로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교파로 나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루터 외에도 16세기 유럽에 다수의 종교 개혁가들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76 루터와 츠빙글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가 미사를 거행할 때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에 대해서는 똑같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루터가 성찬식을 거행할 때 그리스도가 실제로 빵과 포도주에 임한다고 믿었던 것에 반해 츠빙글리에게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의식일 뿐이었다.


77 마르부르크 종교회담의 실패는 개신교 진영이 하나의 교리와 조직으로 통일된 교회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79 우리나라의 개신교 교파 중에서 가장 큰 교단이 장로교이고 장로교의 신학적 기초를 쌓은 인물이 칼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칼뱅이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86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와 잉글랜드(나중에는 미국)의 청교도주의, 위그노로 불리던 프랑스의 개신교인들 모두 칼뱅의 신학 사상에 영향을 받았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칼뱅이 1564년 죽을 때쯤에는 그는 종교 개혁가들 가운데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제적인 개혁자가 되어 있었다.


86 간단히 말해서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교과이다. 따라서 오늘날 침례교와 같이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의 교파들은 모두 재세례파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물론 루터, 칼뱅 같은 지도적인 종교 개혁가들도 유아 세례를 인정했지만 재세례 파에 속한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이는 아직 자발적인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유아 세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고 성인이 되어서 자기 의지에 따라받는 세례만이 진정한 세례라고 보았다.


88 세속 당국이 볼 때 군복무와 충성 서약을 겨 부하는 재세례파는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위험한 집단으로 비춰졌다. 루터와 츠빙글리 같은 종교 개혁가들도 재세례파를 불온하게 여긴 것은 마찬가지였다. 루터는 재세례파의 도덕적 생활에 대한 강조가 믿음에 의한 구원이 아닌 행위에의 한 구원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을 배척했다.


95 1534년에는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임을 선언한 수장법을 통과시켰다.


97 십 대에 요절한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그의 이복 누나이자 혠리 8세의 첫 번째 왕비 캐서린의 딸인 메리 1세(Mary I, 1516-1558)였다. 그녀는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여왕이 된 인물이었다. 그녀가 왕위에 오르면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곧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메리는 어렸을 때부터 가톨릭 신자로 양육되었고 어머니를 왕비 자리에서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온 종교개혁에 치를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98 그녀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크랜머를 포함하여 300여 명에 가까운 개신교인들을 이단자로 몰아 화형시킴로써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섬뜩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98 메리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1533-1603)이다. 그녀는 비운의 왕비 앤불린의 딸로 여러가지 면에서 이복 언니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개신교 신자로 자라났고 메리와 달리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국민들로부터도 사랑받는 군주였다. 이제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 국교회는 확고하게 그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5 가톨릭교회는 종교 개혁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109 교황 파울루스 3세(Paulus III, 1468~1549)는 1545년 북부 이탈리아의 주교 도시 트렌드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가톨릭 교회의 갱신을 꾀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몇 번이나 중단 되면서 20년 가까이 지속된 트렌토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이후 400여 년 동안 가톨릭 신앙의 핵심을 이루게 될 중요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공의회를 지배했던 것은 한마디로 반개신교 정신이었다. 공의회는 성직자의 독신 제도와 화체설, 7성사 제도를 재확인했고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루터의 교리를 배척하면서 구원에는 사랑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구원의 진리가 성경에만 있다고 말한 루터와는 달리 공의회는 성경과 더불어 사도들의 계승자인 가톨릭 교회의 전통 또한 하느님의 진리의 원천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0 종교개혁 이후 수세에 몰렸던 가톨릭 교회가 예수회의 활동과 트렌토 공의회의 교리 재확립으로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가톨릭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개신교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종교 개혁가들이 비판했던 여러 관행들이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6 16~17세기 종교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120 8월 23일 밤 가톨릭 측에 의해 자행된 이 학살로 인해 콜리니를 포함하여 파리에서만 최소 3,000명에 이르는 위그노들이 희생되었고 지방에서도 이와 유사한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역사는 참혹했던 이 사건을 '성 바르텔르미 축일의 학살'로 기록하고 있다.


122 1589년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로 프랑스의 새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지만 신성동맹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파리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스페인 군대는 신성동맹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로 침입해 들어왔다. 여전히 가톨릭 신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프랑스에서 개신교 국왕이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고 왕국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자신의 개종 밖에는 없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 앙리 4세는 1593년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이듬해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123 앙리 4세는 비록 자신은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예전 신앙의 동료들인 위그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반포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낭트 칙령이다. 낭트 칙령을 통해 위그노들에게는 완전한 시민권과 공식적인 예배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200여 개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1598년 위그노 전쟁의 종식과 낭트 칙령으로 프랑스에서 종교적 관용이 완전히 정착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위그노의 세력은 17세기에 들어 와서 부르봉 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과 가톨릭 진영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해 많이 약화되었고 태양 왕 루이 14세가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그나마 누리던 종교적 자유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수많은 위그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잉글랜드, 네덜란드, 독일 등지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고 위그노들이 떠난 프랑스는 이웃 독일과는 달리 가톨릭으로 통일된 국가로 남게 되었다.


126 아우크스부르크와 같이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똑같이 공존하고 있던 도시에서는 시의회가 그레고리력의 도입을 결정하자 개신교 시민들이 계속 율리우스력을 고집함으로써 시민들이 교파에 따라 서로 각기 다른 날을 공휴일로 지키는 등 혼란스런 상황이 연출되었고 그레고리력의 도입 반대를 선동한 목사들이 도시에서 추방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독일의 개신교인들은 1700년에 가서야 냉정함을 되찾고 그레고리력을 수용하게 된다. 독일의 달력 분쟁은 당시의 종교적 분열상이 단순히 종교적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131 1648년 10월 24일 두 도시에서 동시에 조인된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으로 마침내 살육과 파괴로 점철되었던 30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강화 조약은 각 지역의 제후들이 종교를 결정한다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의 기본 원칙을 다시 한 번 재확인했고 칼뱅파에게도 가톨릭, 루터파와 똑같은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종교적 통일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제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맺음말 기독교 세계의 분열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136 기독교는 탄생 초기부터 끊임없이 자체적인 분열과정을 거쳐 왔고 그 과정 속에서 비록 오늘날에는 소수파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여러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오리엔트 정교회의 성립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 세계의 분열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을 약화시켰던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기독교 공동체를 여러 문화권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137 기독교의 분열은 특정 종파를 수용한 국민들의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수 세기 동안 영국의 지배에 맞서 싸운 아일랜드인들에게 가톨릭 신앙이 정신적 지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면, 스페인의 억압에 맞선 네덜란드인들의 독립 투쟁에서 개신교(칼뱅주의)는 핵심적인 추진력을 제공했다. 마찬가지로 반가톨릭 정신은 영국과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의식 세계 저변에 깔려 있는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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