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05 파스칼의 팡세 5


팡세 (양장) - 10점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80217_16 파스칼의 팡세 5

《팡세》는 이사야서를 보면서 쓴 것 같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그러나 나타나지 않고 숨어계신 하나님.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의 주제인 것 같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자신의 유한함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유한함이 신이 있는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선 제1속성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짧은 생애에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고난을 겪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3년 밖에 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생애를 살면서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지극히 유한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고난을 다 당했다는 점에서는 비참하고 유한한 인간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께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무한한 신, 이 우주의 섭리를 주제하는 신, 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가지고 있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신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변증법적 모순을 가진 존재이다. 


너무나도 미미한 갈대 같은 인간의 존재와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계신데 모습을 감추고 있는 숨어있는 신, 그러면 둘 사이를 이어주는 누군가의 존재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오로지 인간이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없고, 신은 오로지 신이기 때문에 인간일 수 없는데 그 모순을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인,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논리적인 모순인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동시에 있는 존재가 중간자로서 있어야만 신과 인간을 서로 매개할 수 있고 그 존재가 예수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희망인 것. 인간이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을 갈망하면서 살면 신에 가까이 가서 죽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서 대속자로 내려왔지만 인간이 겪을 수 없는 처절한 고난을 통과하면서 구세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든 성서적 사건들이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는 신과 인간의 동시 공존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공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개념적 원리로서 성령이다. 성령은 살아 움직인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귀신이나 이런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적인 원리로서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만을 강조해서 읽다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삼위일체보다는 기득권을 전복시키는 전복자로서의 예수의 측면을 굉장히 흠모할 수도 있다. 요즘에 한국에서도 많이 읽고 있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책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이다. 호모가 인간이고 데우스가 신인데 '신이 된 인간'이라는 뜻. 이 책을 보면 저자는 오늘날 인간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스로 신이 되려한다는 말이다. 전공이 중세전쟁사이다. 요즘 베스트셀러이다. 그러면 서양사람도 그렇고 한국 사람도 그렇고 《팡세》 같은 신을 찾는 책을 읽어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한, 눈에 보이는 어떤 경험 데이터로 제시할 수 없는 한 이런 것은 혹세무민의 논변 아니겠는가.  한가지 방법은 우리가 신과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은 비참하다 할 때 '신'이라고 하는 것을 굳이 존재하지 않아보이는 또는 증명할 수 없는 또는 숨어있는 초월적 존재로 이해하지 말고 삶의 의미로 이해하면 어떨까,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인간의 비참함 또는 의미없이 그저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 신에 대한 논변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물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핵심은 인격신이지만, 개념적 원리로 먼저 이해하고 삶의 의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 아닌가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자연의 원리들》이라는 얇은 책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현실태, 가능태, 형상, 질료 같은 것에 주석을 달아놓은 책이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뭔가 사건이 일어날 때 작동하게 되는 것들을 이 책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레온 페스팅거라는 《인지부조화 이론》책을 쓴 사람은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말을 한다. 여기서 합리화라는 말은 변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쁜 의미로 말하면 변명인데 달리 말하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데 애초에 의미부여를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레온 페스팅거의 말은 틀린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 합리화 자체를 하지 않는 존재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를 접해보면 개신교와 결이 다른 것을 느낄 때가 있다. 하나님을 알고 잘 믿는 것과 진짜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과 뭔가 질적 차이가 느껴질 때가 있다.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역사 속에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놓고 따라가는 것과 정말 사랑해서 쫓아가는 것의 차이점이 있다.

민족을 놓고 볼 때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초월적인 정당화 기재로 작동하는 것이고, 일상화된 실정종교로 보면 삶의 모든 절차 속에 넣어놓고 그것을 신앙으로 보는 것, 우리가 보기에는 더 다르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열렬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 신자를 보면 그렇게 느끼는 경우도 있다. 


파스칼이 살아가던 시대가 과학혁명의 시대인데, 그 시대에 파스칼도 수학자니까 어찌보면 과학자이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과학자들이면서 신을 믿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것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우주는 신이 다스리는 것이니까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신의 법칙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라고 생각한 것. 그러나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는 신앙과 과학을 분리한다. 파스칼의 후예는 아니다.


계몽주의라는 것이 여러 변종들이 있다. 일단 계몽주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인 이성을 존중하는데 프랑스 계몽주의는 신앙과 과학을 철저히 분리한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제1속성이 반종교주의이다.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니 이것을 잘 발전시키면 신은 필요없다는 것. 프랑스 계몽주의가 사실 말하자면 뉴턴이 들어오면서 시작했는데 뉴턴의 독실한 신앙은 들어오지 않고, 뉴턴의 과학만 들어왔다. 미국은 독실한 개신교도였다. 프랑스에서 발전한 급진적인 무신론을 삭제한 상태에서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 그래서 영국의 계몽주의는 신앙과 과학이 공존하는 형태이고, 프랑스는 분리가 일어나고, 그런데 미국으로 간 퓨리탄은 영국에서 간 사람들이니 마찬가지로 신앙과 과학이 공존하는 상태의 미국식 계몽주의가 되는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모비딕》을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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