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05 파스칼의 팡세 2


팡세 (양장) - 10점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80127_13 파스칼의 팡세 2

지난 시간에 파스칼의 《팡세》에 입문했다. 전체적인 것을 훑어보다 보니 팡세라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스칼이 잘 정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정리하였으면 좋으나 그때그때의 생각들을 마구 적은 것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을 편집자들이 편집해서 얼개를 짜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으로 얘기가 되었다.

파스칼의 생몰연대가 1623~1662년으로 17세기를 온전히 살아간 사람이다. 서구에서 17세기라고 하면 '17세기 일반위기의 시대'라고 말한다. 영어로는 General Crisis인데 GC를 대문자로 해서 일반위기가 17세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마디로 힘든 세상이다. 17세기의 일반위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를 들면 파스칼과 데카르트를 들 수 있는데, 파스칼은 수학자이기도 했으며 굉장한 업적을 남겼지만, 파스칼이 팡세를 완결하지 못했지만 그렇다 해도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노력을 했다 해도 그렇게 고대 희랍의 완결된 서사시나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처럼 완결성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스칼과 데카르트가 17세기의 일반위기를 반영하고 있는데, 그래도 데카르트의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은 내용이 유사하다. 그러다가 《성찰》을 보면 계속 의심이 되다가 신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안 다음에는 괜찮구나 하고 가는 것. 진리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고민하는 나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신과 연결되어 한 바퀴 삥 돌아서 제자리로 가는 것. 


데카르트의 《성찰》이 6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1,2 성찰이 의심이고, 3 성찰에서 신존재가 확정되고, 4,5,6이 세상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 《팡세》와 똑같은 구조이다. 내용은 똑같은데 데카르트의 《성찰》은 자기 완결성은 가진 서사를 가지고 있다. 파스칼은 그냥 우는 소리만 있다. 데카르트는 회의론자인척 하면서 강력한 확신을 내세운 사람이다. 회의론도 두 가지가 있는데 데카르트와 같은 사람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하며, 확신을 위해서 회의를 사용하는 것. 그 다음에 정말 철저하게 초지일관 의심을 하는 근원적인 회의가 있다.


회의라는 것도 대단한 용기이다. 그 당시로서는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모든 사유의 근거를 하나씩 꺼내서 다시 확인하고, 회의하고 지워버리는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데카르트에 대해서 철학자니까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30년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무엇을 봤는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데카르트가 내놓은 것이 없고, 갑자기 어느 날 난로에 앉아있다가 이성의 빛을 봤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이런 텍스트가 나오는 것. 유럽에 아직 나라가 없고, 각각의 지역에서 할거하는 영주들의 폭력으로 굴러다니던 17세기에서 고요함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때를 보면 이 사람이 분명히 대단한 결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제 데카르트가 파스칼보다는 30-40년 먼저 태어났다. 그 다음에 파스칼은 《팡세》가 시작된다.

《팡세》를 읽어보면 단편단편 얘기와 고민은 나오지만 하나의 이어지는 서사는 없는 것 같다. 자기의 체험과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서 뭔가를 이루어야 나오는 것인데 뭔가가 없다. 서사라고 하는 것이 자기 중심이 있어야 형성이 되는 것이고, 셀프를 의식해야 형성이 되는 것이고, 계속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하지 않은 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만을 마시면서 슈퍼마리오처럼 움직여가면 성찰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서사라는 것이 허황돼 보일지라도 그런 하나의 목적이 있어서 목적을 향해서 고투해 나아갈 때 만들어지는 것. 그런데 파스칼은 덜되어 있다. 


파스칼을 읽으면서 사실은 화장실용 격언이 가득 담긴 책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은 《팡세》는 시작부터 보면 신 앞에서 인간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떻게 서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신 안에 있는 것인데 편집자 셀리에가 말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구조와 같다. 서두를 보면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떄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사실 서구에서 나온 기독교 문헌의 기본 구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구조이다. 


원래 내가 신 안에 있는 존재인데 신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신에게서 발버둥치면서 떨어져 나간다. 그러다가 이게 아니구나 회심을 하고 다시 신에게 향해 가는 것. 신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가 시작인데, 내가 신 안에 있었음을 아는 것이 끝이다. 그러면 시작과 끝이 같으니 원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단적인 신으로서 하나님을 얘기하기 싫으면 적어도 세속적인 관념적이고 정신적으로 일생에 걸쳐서 지향할만한 신말고 목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없다. 그것을 만들어서 갖고 있고, 어느정도는 설정을 해놔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기서사를 계속 다듬어가야 하는 것. 자기 서사를 만들려면 목적이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신이라는 목적이 있는 것이 자기서사를 만드는데 훨씬 좋다. 그런 점에서 파스칼의 신존재 증명이 있다. 신 내기를 건다고 할 때 있다고 하는 쪽에 거는게 남는 장사다라는 것이 그 유명한 신존재증명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신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할 때 자기 삶의 정신적인 목적을 의식하는 것이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자기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뇌에서 본능적으로 스토리를 만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존재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데이터는 점으로 들어온다. 그 점들을 이어서 뭔가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면 견뎌내지 못한다. 인간 존재 자체가 서사적인 존재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