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05 파스칼의 팡세 3


팡세 (양장) - 10점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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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_14 파스칼의 팡세 3

첫시간에 《팡세》 1부와 2부, 드디어 인간의 비참과 위대함이라고 하는 모순을 보았다.

파트 12인 포르로아얄을 보면 앞부분과 뒷부분을 이어준다. 사실 《팡세》를 멋진 문장을 골라내기 위해서 읽고, 그런데 읽다보니 정말 서사가 완결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여기저기 우는 소리만 있으니 다 읽었다고 하기에는 곤란하지만 읽었다고 하려면 파트 12를 읽으면 된다. 왜냐하면 그 부분은 1부인 인간의 비참함과 2부인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대와 비참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인간 속에는 위대성의 어떤 대원리가 존재하며 동시에 비참의 대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 종교는 우리들에게 이 놀라운 모순들의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만 한다."고 되어있다.


12. 포르로아얄에서, §182

불가해성을 설명한 후에

인간의 위대와 비참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인간 속에는 위대성의 어떤 대원리가 존재하며 동시에 비참의 대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그 종교는 우리들에게 이 놀라운 모순들의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만 한다.


인간은 위대하고도 비참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종교라면 왜 비참한지 왜 위대한지에 대한 원리를 제시해야한다는 것이다. 종료라는 말을 뺀다면 인간은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모두 다 밝혀주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사상이라고 하겠다.


위대하면 안 비참할 것 같고 비참하면 위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나.

간단히 말하면 위대함과 비참함은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있는 것. 모순이다. '살았으나 죽어있다'와 같은 모순. 인간은 비참함이 있다. 먼저 비참함부터 설명해보면 파스칼은 인간이 비참함이 욕망이라고 말한다. 이기적이고 사적인 욕망이라기 보다는, 파스칼의 핵심적인 용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오는 것인데, 《고백록》에서 보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 나는 밝은 우정의 길, 즉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우정의 한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진흙투성이인 육체의 정욕과 사춘기의 열정적인 상상력이 안개같이 일어나 나의 마음을 흐리게 했고, 어둡게 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순순한 사랑이고, 추잡한 정욕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말하는 사욕이라는 것은 '육체의 정욕'이다. 영혼의 순결한 사랑이 아니고 욕정에 불타는 사랑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비참한데 앞에서 인간은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존재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 이렇게 비참한데 위대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굉장히 자학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인간이 유한자라는 것을 철저히 자각을 할 때 그런 자각 곁에 무한자인 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이 임재한다는 말을 쓰는데, 임재한다는 말은 희랍어 파루시아(parousiva)에서 온 것인데, 이 파루시아는 원래 곁에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너의 곁에 있다.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늘에서 구름타고 내려오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데카르트이나 파스칼과 같은 내성철학쪽에서 신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인간이 철저하게 유한함을 자각할 때 바로 그 순간이 무한함을 알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 그 비참함을, 내가 비참하다는 아는 것이 위대함인데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갈대인 것이다. 그래서 단편 §145를 보면 "내가 더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더 우월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포함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의 점인 것처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에 의해서 우주를 포함한다." 그러면 이게 바로 생각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인간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파스칼의 얘기가 §146에 있다.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7. 위대, §145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결코 공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조절함으로써이다. 내가 더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더 우월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포함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의 점인 것처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에 의해서 우주를 포함한다.


7. 위대, §146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비참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무거운 단어이다. 내가 비참하다고 말을 하면 사람은 그것은 견디기 힘들다.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파스칼은 밑에까지 내려가서 비참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다시 올라온다.


파스칼은 비참함을 아는 것이 위대함인데 그 위대함은 결국 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오로지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고, 이것이 《고백록》에서는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당신을 위한 기쁨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라틴어로 gaudere de te, ad te , propter te라고 해서, 당신으로부터의 기쁨, gaudium이 기쁨인데 변화가 일어나서 gaudere de te, de te는 신으로부터, ad te는 신을 향한, propter te는 신앞에서 또는 신을 위한 이라는 말이다. 신이라고 하지 않아도 온전한 기쁨의 원천이다. 기회가 되면 《고백록》도 읽어보려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를 맨처음에 중학교쯤 들을 때는 갈대는 고민이 많아서 그렇게 흔들리는 건가봐 라고 알아들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고민이 많아서 인생이 힘든거야 라고 하는데 그 뜻이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은 사유를 통해서 사유 안에, 사유를 끌어올려서 신에게 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

비롯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생각하는 것에 위대함이 있다는 의미겠다. 파스칼의 《팡세》는 제대로 사유하고 제대로 고민하라는 뜻이다. 이때 파스칼의 의도를 덧붙이자면 신을 향해서 가는 것이 제대로 사유하고 제대로 고민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파스칼은 논리적 사고만을 강조한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순전히 육체적인 것을 누르고 순수사유 같은 것이 있지는 않다. 우리는 흔히 뭘 겪어야 안다고 말한다. 겪고 느끼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느끼고 겪지도 않는데 생각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느낀다는 말보다도 겪는다는 말은 생각과 느끼는 것이 합해진 말이기 때문에 겪는다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그것이 겪어봐야 하는 것. 요즘에는 늙는다는 것이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늙은이가 지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겪음을 충분히 자기가 사유하지 못하고, 자기 서사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멸시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된다.


이번 기회에 《팡세》를 읽고, 욥기를 읽으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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