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크라튈로스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7. 18.
크라튈로스 - 플라톤 지음, 김인곤.이기백 옮김/이제이북스 |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을 펴내며
작품 해설
작품 개요
등장인물
본문과 주석
<부록>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
작품 개요
1. 이름의 올바름에 대한 상반된 두 견해 (383a-385e)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와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
2. 자연주의의 일반적 논거에 의한 규약주의 비판(385e-390e)
1) 있는 것들의 본질(385e-386e)
2) 행위들의 본성과 이름을 부르는 행위의 본성(386e-3871d)
3) 도구의 기능과 이름의 기능(387d-388c)
4) 기술자로서 도구를 만드는 자와 입법가(388c-389a)
5) 만듦의 본: 형상 (389a-390a)
6) 도구를 만드는 자와 사용자의 관계
:입법가와 변증술 전문가의 관계(390b-390d)
7) 소크라테스의 잠정적인 결론(390rd-390e)
3. 어원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설명에 의한 규약주의 비판(390e-427d)
1) 헤르모게네스의 새로운 요청(390e-391c)
2)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이름들을 비롯한 사람들과 신들의 이름 고찰(391c-397b)
3) 우주론의 어휘들을 통한 여러 이름들 고찰(397b-410e)
4) 윤리적 함축을 갖는 이름들 고찰(411a-421c)
5) 최초의 이름들에 대한 고찰(421c-427d)
4.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 (427d-440e)
1) 이름과 사물 사이에 성립하는 모방 관계(428c-435d)
(1) 올바르지 않은 이름과 거짓된 이름의 가능성(428e-431c)
(2) 이름은 사물을 완전히 모방할 수 없다(431c-433b)
(3) 규약주의의 부분적 수용(433b-435d)
2) 이름을 아는 사람은 사물도 아는가?(435d-439b)
3) 만물 유전설과 형상설(439b-440e)
본문과 주석
383b 헤르모게네스: 소크라테스 선생님, 이 친구 크라튈로스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있는 것들 각각에는 저마다 올바른 이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름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어떤 것의 이름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르기로 합의하고 부르는 언어의 조각이 아니다. 오히 려 이름을 붙이는 올바른 규칙은 본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 사람이든 이민족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똑같다"라고요.
384d 헤르모게네스: 소크라테스 선생님, 실은 제가 이 친구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들과도 자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만 이름의 올바름이 합의 나 동의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근거한다는 주장은 저로서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가 어떤 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그 것이 올바른 이름인 것 같습니다. 설령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다시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서, 더 이상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나중 것이 이전 것 못지 않게 올바르다는 것이죠. 우리가 집안 노예들의 이름을 바꿀 때 바뀐 것이 전에 붙인 것 못지 않게 올바른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이름도 각 사물에 본래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관습을 확립하고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의 규칙과 관습에 따라서 있는 것이니까요.
388e 소크라테스: 자네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입법가인가 아니면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인가?
헤르모게네스: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이죠.
소크라테스: 따라서 헤르모게네스, 이름을 붙이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름을 만드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네. 바로 이 사람이 입법가이며 제작자들 중에서도 가장 드문 자인 것 같네.
390e 소크라테스: 따라서 헤르모게네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찮은 일이 아닐 뿐더러 하찮은 사람들의 일도 아니 고 아무나 하는 일도 아닌 것 같네. 그리고 크라튈로스는 맞는 말을 했네. 이름은 사물들에게 본래 있으며, 누구나 다 이름의 제작자가 아니고 각 사물에 본래 있는 이름을 주목하고 그것의 형상을 자모(字母)와 음절에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이름을 만드는 자라고 말일세.
432e 소크라테스: 이름의 경우도 잘 붙여진 이름이 있고 잘못 붙여진 이름이 있다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받아들이게. 그리고 이름은 이름 붙여지는 사물과 똑같아지게끔 모든 자모를 가져야 한다고 강변하지 말고, 적합하지 않은 자모도 이름에 쓰인다는 것을 인정하게. 그리고 자모가 그렇다면 구(句)에 포함된 이름도 마찬가지네.
433b 소크라테스: 잘 됐네. 사물의 개괄적인 특징이 들어 있다면, 이름이 적합한 자모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아도 사물은 말로 표현될 것이네. 다만, 이름이 적합한 자모를 모두를 가지고 있을 때는 정확하게 표현되겠지만 적게 가지고 있을 때는 부정확하게 표현되겠지.
433e 소크라테스: 이름은 합의된 표시로서 합의를 한 사람들, 그러니까 이름을 붙일 사물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물을 표현해 주며, 바로 이 합의가 이름의 올바름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네. 누군가 현재 합의된 그대로 합의를 하든 그 반대로 합의를 하든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 현재 작다고 부르는 것을 크다고 부르고 현재 크다고 부르는 것을 작다고 부르기로 합의하든 말일세.
435b 소크라테스: 왜냐하면 관습과 합의에 따르는 한 닮은 자모들뿐 아니라 닮지 않은 자모들도 사물을 표현하니까. 그리고 관습이 합의와 아주 다르다고 해도 표현이 닮음에 근거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옳지 않을 것이네. 그보다는 관습에 근거한다고 해야 할 걸세. 관습은 닮은 것뿐만 아니라 닮지 않은 것을 가지고도 표현하니까.
438b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이름들을 통해서 사물들에 관해 배우거나 알아냈을까? 최초의 이름들이 아직 붙여지지 않았다면, 게다가 우리가 말했듯이 이름들이 어떠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거나 스스로 알아내는 방법 외에 달리 사물들에 관해 배우거나 알아낼 수가 없다면 말일세.
439a 소크라테스: 잘 붙여진 이름들은 그것들이 붙은 사물들과 닮았으며, 그래서 이름들은 사물들의 상(像)이라고 우리는 여러 차례 동의하지 않았나?
크라튈로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하게는 이름들을 통해서 사물들에 관해 배울 수 있지만, 사물들 자체를 통해서도 배울 수가 있다면, 어느 쪽 배움이 더 훌륭하고 명료할까? 상들로부터 이 상(像) 자체가 잘 닮았는지를 배우고 상의 실물인 진리를 배우는 쪽인가, 아니면 진리로부터 진리 자체를 배우고 그것의 상이 적절하게 만들어졌는지를 배우는 쪽인가?
크라튈로스: 진리로부터 배우는 쪽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 '있는 것들'에 관해서 어떤 방식으로 배우거나 알아내야 하는지는, 아마도 자네와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인 것 같네. 그러나 이름들로부터가 아니라, 있는 것들 자체로부터 배우고 탐구해야 하는 쪽이 이름들로부터 그렇게 해야 하는 쪽에 비해 한층 더 분명하다는데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네.
440b 소크라테스: 그러나 크라튈로스, 만약 모든 사물이 변하고 아무것도 지 속하지 않는다면 앞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네. 만약 앎 그 자체가 앎임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속한다면 앓은 언제나 지속할 것이고 그래서 앎이 있게 될 테지만, 앎의 형상 자체가 변한다면 그것이 앎의 형상과는 다른 형상으로 변하는 순간 앓은 있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그리고 이 추론에 따르면 앎을 가질 자도 없고 알려질 것도 없을 것이네. 그러나 앎을 갖는 자가 있는 한편 알려지는 것이 언제나 있다면,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으며 있는 것들 각각이 하나로서 있다면, 내가 보기에는 방금 우리가 말한 것들은 흐름과도 닮지 않았고 움직임과도 닮지 않은 것 같네.
'책 밑줄긋기 > 책 2012-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0) | 2018.08.08 |
---|---|
정재현: 종교신학 강의 ━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0) | 2018.08.03 |
양자오: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0) | 2018.07.31 |
티머시 스나이더: 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0) | 2018.07.20 |
이시다 미키노스케: 장안의 봄 (0) | 2018.07.16 |
후카이 토모아키: 신학을 다시 묻다 ━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 (0) | 2018.07.13 |
게르트 타이센: 역사적 예수 (0) | 2018.07.11 |
김영수: 사기를 읽다 (0) | 2018.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