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머시 스나이더: 블랙 어스 ━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블랙 어스 - 10점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열린책들


머리말


서론 히틀러의 세계

1장 생활 공간

2장 베를린, 바르샤바, 모스크바

3장 팔레스타인의 약속

4장 국가 파괴자들

5장 이중 점령

6장 더 큰 악

7장 독일인, 폴란드인, 소련인, 유대인

8장 아우슈비츠 역설

9장 주권과 생존

10장 잿빛 구조자들

11장 신과 인간의 투사들

12장 의로운 소수


결론 우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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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2 직관은 우리를 저버린다 우리가 홀로 코스트를 나치 이데올로기와 결부한 것은 옳았지만 살인자들 다수가 나치가 아니었고 심지어 독일인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는다.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된 유대인은 거의 전부 독일 밖에 살았는데도 우리는 먼저 독일 유대인을 생각한다. 살해된 유대인은 대개 강제 수용소를 본 일도 없지만 우리는 강제 수용소를 떠올린다. 살인은 국가 제도가 파괴된 곳에서만 가능했는데도, 우리는 국가의 허물을 묻는다. 우리는 과학에 책임을 돌리고, 따라서 히틀러가 지닌 세계관의 중요한 요소를 인정한다. 우리는 나치가 이용한 단순 화에 빠져 국민을 비난한다.


14 홀로코스트의 역사는 히틀러 시대가 우리의 정신과 삶 속에 남겨 놓은 것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도록 현재적이어야 한다. 히틀러의 세계관이 단독으로 홀로코스트를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그 세계관에 숨은 통일성은 새로운 종류의 파괴적 정치를 인간의 대량 학살 능력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탄생시켰다.


서론 히틀러의 세계

17 히틀러의 세계에서는 정글의 법칙이 유일한 법칙이었다. 사람들은 자비를 베풀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고 최대한 탐욕스럽게 욕구를 채워야 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새로운 형태의 교제를 상상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인간을 자연과 다른 존재로 제시한 정 치사상의 전통을 버렸다. 정치 사상가들은 그러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사회의 형태로 무엇이 가능한지는 물론 어떤 것이 가장 공정한 사회인지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자연이 단 하나의 잔인하고 압도적인 진실이었으며 이와 다르게 생각하려 했던 지난 역사는 전부 환상이었다. 


1장 생활 공간

49 유럽인들이 생각할 때, 러시아가 유대인을 추방하면서 유대인 문제의 성격이 바뀌었다. 수만 명의 유대인이 러시아 제국을 떠났고 그 결과로 유럽의 도시들에서 주민들은 갑자기 동쪽 출신 유대인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추방은 우파와 좌파에서 똑같이 20세기의 중 요한 유대인 혁명가들 다수의 삶을 결정했다.


60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뒤 6년 동안 독일 국가를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폴란드를 자신의 전쟁에 쓸 협력자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1939년에 폴란드와 독일이 동맹을 맺고 소련에 맞서 싸웠다면 그 결과는 분명히 유럽의 유대인에게 재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는 그 대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에 맞서 벌인 전쟁을 따라갔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폴란드를 겨냥한 국가 파괴 전쟁이자 민족 절멸 전쟁으로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독일 내에서의 히틀러의 성공, 폴란드를 정복의 꿈에 끌어들이려던 시도의 실패, 그리고 침략 전쟁에 동참하고자 한 소련 지도부의 의지가 결합된 결과였다.


2장 베를린, 바르샤바, 모스크바

76 독일인들은 독일 유대인을 전쟁 이전 공동의 조국인 자국 영토에서 죽이려 하지 않았다. 독일을 벗어난 독일인들, 즉 이웃 나라들을 침공하여 점령하고 정치권력이 무너져 유대인이 보호받지 못하는 곳에서 그들을 만난 독일인들은 흔히 유대인을 선전에서 규정된 대로 비인격적 방식으로 묘사했다. 독일 밖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인종주의의 세계화는 세계 전쟁과 결합되었을 때 성공했다.


3장 팔레스타인의 약속

100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들에서 떨어져 나온 유럽의 속령들이 대체로 국민 국가가 되었던 반면, 아시아의 속령들은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령> 형태로 프랑스 제국이나 영국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들은 독립국을 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따라서 강대국에 맡겨져 정치적 훈련을 받아야 했다. 사멸한 오스만 제국의 남부 시리아에서 떨어진 팔레스타인은 그러한 위임 통치령의 하나였다. 1920년 영국이 점령했을 때 팔레스타인 살던 유대인은 매우 적었지만, 영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미래의 유대 민족의 고향으로 제시했다. 이는 시오니스트들의 바람과 일치했다. 그들은 언젠가 완전한 국가의 지위를 얻기 위한 협상이 타결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4장 국가 파괴자들

155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리벤트로프-몰로토프 협정은 단순한 불가침 조약이 아니었다. 그 협정에는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를 소련과 독일이 각각의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비밀 의정서가 포함되었다. 폴란드는 두 나라가 나누어 갖기로 했는데, 그 명백한 함의는 소련이 독일에 합세하여 폴란드를 침공하고 그 국가와 정치 권력을 파괴하는 데 협력한다는 것이었다.


155 소련-독일 협정의 비밀의정서에 포함된 지역은 세계 유대인의 심장부로서 유대인이 500년간 지속적으로 정착해 살던 곳이었다. 이 심장부가 유대인의 전 역사를 통틀어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 될 것 같았다. 스무 달 뒤 그곳에서 홀로코스트가 시작된다. 3년 안에 그곳에 살던 수백만 유대인 대다수가 죽는다.


161 폴란드국가의 파괴는 폴란드 유대인에 더할 나위없이 큰 영향을 미쳤다. 소수 민족들은 국가의 보호와 법치에 가장 크게 의존하며, 무정부 상태와 전쟁에서 가장 큰 고초를 겪는 이들이 바로 소수 민족이다.


161 제일 먼저 분해된 것은 국가 권력이었다. 1939년 9월 독일-소련 국경 우호 조약은 〈폴란드 국가의 붕괴>를 얘기했고, 뒤 이은 독일의 법률 언어는 폴란드 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유대인은 별안간에 그 어느 나라의 시민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5장 이중 점령

176 독일인들은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할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을, 즉 처음으로 유대인을 대규모로 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찾아냈다. 최종해결이 실현된 곳은 독일에 앞서 소련이 지배했던 곳, 소련이 두 대전 사이의 국가들을 파괴한 후 독일이 소련 제도를 폐지한 곳, 즉 이중 점령지대였다.


183 볼셰비키는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직접 그 일을 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의미가 명확한 공식 문서로 남겨 기록 보관소에 잘 정리해 놓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찬동할 수 있었다. 진정한 책임은 공산당에 있었기 때문이다.


6장 더 큰 악

216 특수임무단은 유대인 이외의 다른 사람도 사살했으며, 특수임무 아닌 다른 이들도 유대인을 사살했다. 특수임무단이 제일 먼저 유대인을 대규모로 사살했지만 이들은 독일인 가해자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 소수 집단이었다. 이들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화는 전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재판 중에 대다수 독일인 살인자들을 보호하고 학살을 독일 사회에서 떼어내려는 의도에서 등장했다.


230 예켈른은 이제 자신이 직접 <정어리 방식>이라고 이름 붙인 방법을 썼다. 사람들을 구덩이 안에 촘촘히 줄지어 눕게 한 뒤 사살하고 이어 다음 한 무리를 시체들 위에 바로 눕히고 죽이기를 계속 반복했다. 구덩이 하나가 꽉 차면, 독일인 한 명이 생존의 징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신 더미를 밝고 지나가며 아래쪽으로 총을 갈겼다.


242 결과적으로 이중으로 점령된 라트비아에서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다. 독일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살인을 수행한 현지인들의 학살 파견대가 등장했던 것이다.


7장 독일인, 폴란드인, 소련인, 유대인

290 독일인에 의해서든 소련에 의해서든, 둘 다에 해당되는 경우는 국가가 파괴된 곳이라면 어디서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홀로코스트는 국가가 빠르게 연이어 두 번 파괴 된 곳에서, 처음에는 소련이 전쟁이전의 국민국가를 파괴하고 그 다음에는 독일이 소련의 정부 기관을, 파괴한 곳에서 집단 사살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290 독일인들이 1939년 9월부터 들어와 있었으나 유대인의 대량 학살은 2년이 더 지난 후 시작된 서부 폴란드와 중부 폴란드에는 비밀 가스 시설, 게토에서 추방하기, 유대인 사냥이라는 다른 기술들이 적용되었다. 발트 국가들과 동부 폴란드, 소련의 유대인들에게는 총탄과 구덩이가 준비되었다. 중부 폴란드와 서부 폴란드의 유대인에게는 배기가스와 가마가 준비되었다. 유럽의 남은 유대인은 대부분 아우슈비츠라고 불린 곳을 향하게 된다.


8장 아우슈비츠 역설

293 〈아우슈비츠)라는 낱말은 홀로코스트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법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유대인은 아우슈비츠가 주된 학살 시설이 될 때쯤이면 그 동쪽에서 이미 죽임을 당했다. 아우슈비츠는 기억되었지만, 홀로코스트의 대부분은 대체로 잊혔다.


299 독일군이 도착했을 때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약 99퍼센트가 죽임을 당했다. 덴마크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유 대인의 약 99퍼센트가 생존했다. 덴마크 유대인은 아우슈비츠로 갈 운명이었고, 에스토니아 유대인은 아우슈비츠가 학살 시설이 되기 전에 운명을 맞이했다.


303 덴마크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달랐다. 덴마크 왕국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같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달리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으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구속받지 않았고 소련군에 점령 당하지도 않았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 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했을 때, 덴마크는 연루되지 않았다. 덴마크는 소련의 침공을 받지 않았으며, 그 엘리트들은 집단 사살과 추방이라는 소련의 행태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에스토니아에서 생성된 정치적 자원은 덴마크에서는 만들어 질 수 없었다. 덴마크 국가는 전혀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령은 한번뿐이었기 때문에 이중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308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때에 이 세상의 유대인은 대부분 안전했다. 이유는 간명했다. 독일 세력은 그들이 사는 곳까지 미치지 못했고 그들이 시민으로서 살았던 국가들을 위협하지 못했다. 폴란드 여권을 지닌 유대인은 전쟁 이전 폴란드 국가를 인정한 나라들에서는 안전했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죽임을 당했다.


309 시민권은 개인과 이들을 보호하는 국가 체제 사이의 상호 관계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309 독일과 동맹한 나라나 더 전통적인 점령 정권들이 들어선 나라에서는 주요 정치 제도들이 온존했기에 비유대인이 유대인을 보호했다고 처벌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국가의 시민이었던 비유대인은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쉽게 죽일 수 없었다. 그러나 총독 관구와 점령지 서부 소련에서는 유대인을 도우면 죽음의 처벌을 받았다.


9장 주권과 생존

338 히틀러는 지구에서 유대인의 저주를 제거하려 했다. 나치의이 규범적 접근방식은, 일단 정책으로 실현되면, 다른 나라에서도 민족정화를 가능하게 했다. 유럽의 유대인을 보낼 장소, 즉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은 유럽 다른 곳의 민족정화론자들에게 특별한 기회를 제공했다. 원하지 않는 소수 민족을 (여러 소수 민족 중 하나를) 제거할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호 작용은 오직 홀로코스트의 실행자들이 지구에서 모든 유대인을 제거하려는 욕망을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0장 잿빛 구조자들

359 외교관은 유대인에게 여권이나 최소한 여행 증명서를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상호 의존하는 인간 세계로의 초대장이었다. 그 세계에서 사람은 국가로 대표되기 때문에 분명코 사람으로 대우를 받는다.


11장 신과 인간의 투사들

404 폴란드의 지배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수백 년 동안 그 신자들과 함께 살았던 수백만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아무런 반대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당시 가톨릭 교리는 유대인이 집단적으로 예수의 살해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으며, 근대성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은 공산주의라는 병을 유대교와 연관 지었다. 따라서 유대인을 구한 로마 가톨릭의 동기는 자신이 것이든 교구 사제의 것이든 일종의 개인주의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 하다.


12장 의로운 소수

441 유인들 속에서, 비유대인이 유대인의 방문을 받았을 때 취할 수 있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대응은 도움을 약속한 뒤 그 유대인의 돈을 전부 최대한 빨리 빼앗은 다음 경찰에 고발하는 것이었다. 누가 유대인을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를 고발하여 보상과 그 재산을 받고 구조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 고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죽음을 초래한 사람들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했다고 믿으면 위안이 되겠지만, 실제로 그들은 일반적인 경제적 합리성을 따랐다. 의로운 소수는 개인적 복지의 경제적 계산에 토대를 둔 규범을 비합리적이라고 보는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결론 우리의 세계

468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대다수가 독일 시민이 아니었다. 독일 시민이었던 유대인은 독일이 파괴한 국가의 시민이었던 유대인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나치는 자신들의 혁명을 자국 안으로 가져오려면 먼저 밖으로 나가 이웃 사회들을 폐허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알았다.


468 독일의 모든 중요한 범죄도 국가 제도들이 파괴되거나 폐지되고 심각하게 훼손된 곳에서 발생했다. 독일이 550만 명의 유대인과 300만 명 이상의 소련군 전쟁 포로를 죽이고 이른바 반유격전에서 약 100만 명의 민간인을 죽인 것은 전부 국가 없는 지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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