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 묻지마 믿음 그리고 물음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8. 10.
묻지마 믿음 그리고 물음 - 정재현 지음/동연(와이미디어) |
들어가기 전에
들어가면서: 본디 '종교적 인간', 그런데 인간과 종교의 관계는?
0. 사람과 믿음: '묻지마 믿음'을 묻기 위하여
1. 무엇을 믿는가?
2.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3. 왜 믿는가?
4.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5. 누가 믿는가?
6. 언제/어디서 믿는가?
나가면서: 묻지마 믿음'에 대한 물음의 뜻
들어가면서
22 죽음이 그저 유한한 본능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욕망으로부터 배운 무한 때문에 넘어서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는 '한계에 대한 체험'과 새로 욕망을 통해 힐끗이라도 보게 된 한계 너머 저편의 '무한에 대한 동경'이한데 얽히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한을 알지 못했다면 한계에 대한 느낌도 이렇다 하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3 이제 인간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된 것입니다. 결국 죽음이 종교의 근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태동 계기가 된 것이지요. 여기서
'한계에 대한 체험'이 유한성 의식이라면 '무한에 대한 동경'은 초월 지향성으로 추릴 수 있을 터입니다.
0. 사람과 믿음: '묻지마 믿음'을 묻기 위하여
37 먼저 '무엇'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무엇' 물음은 둘로 갈라 지는데, 믿음의 대상과 정체에 대한 물음이 그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왜'를 통해 믿음의 근거나 이유를 논하며, 나아가 '어떻게'라는 물음을 가지고 믿음의 방법에 대해 더듬고자 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물음들, 즉 '누가', '언제', '어디서'를 각각 이어서 묻고자 합니다. '누가'가 주체 물음이라면 '언제'와 '어디서'는 상황 물음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체와 상황 물음들은 '왜'라는 근거를 묻게한 물음들이며 주체가 '어떻게'를 상황에서 실천하는 물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믿음이란 인간이 하는 것이거나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니,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이런 물음들이 믿음에 대해 현실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1. 무엇을 믿는가?
58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그것도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이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무조건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믿음을 믿는 것은 결국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묻지마 믿음'의 모습입니다.
66 만일 성서가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여러 개 중에 어떤 하나만 맞고 나머지는 틀린 것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성서는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 또는 '나를 만나주신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네 가지는 물론 아무리 종류가 많아도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이처럼 성서는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줍니다.
2.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99 문학이나 예술의 다양한 사조들은 삶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특정한 각도와 관심에서 읽어내어 곱씹고 즐기며 또 겪어내는 방식이지만, 믿음은 특정한 각도나 관심에서가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펼쳐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삶이 온전하게 일치되는 것이 이루지는 못 할지라도 향해 가야하는 목표라는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자리가 삶의 전 영역이 아니라 마음에만, 마음 중에서도 한 갈래에만 머물게되면 안정을 구하려는 믿음은 그러한 갈래들 사이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쏠려진 한쪽을 붙들고 늘어지게 됩니다. 결국 부분을 전체로 둔갑시키는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102 우리는 믿음의 영역을 마음의 갈래로부터 삶의 모든 영역으로 펼쳐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마땅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믿음과 삶의 일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이 행위의 차원을 지니지 않으면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행위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진하게 새겨야 할 것은 '행위없는 믿음'이라는 말이 성립조차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행위가 없으면 아예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왜 믿는가?
113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고백은 분명히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은총이라면 당연히 '무조건'이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믿음을 포함한 어떠한 것보다 앞서는 '선행'이어야 합니다. 은총이란 인 간의 노력과 업적은 물론 믿음까지도 포함한 어떠한 전제나 조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보다 구원이 당연히 앞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을 향한 하느님의 투자입니다. 가능성은 나중에 이루어질 것이고 투자는 먼저하는 것이니 구원이 믿음에 앞서는 순서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앞선 물음과 대답처럼 '구원받기 위하여 믿는다'라고 하면 구원이 믿음이라는 수단에 대한 목적이 됩니다. 말하자면 구원이 믿음과 조건적인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선 은총의 '무조건'이 손상됩니다.
4.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136 "나를 따르려거든 나를 따르라"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으려거든이나 복받으려거든 또는 잘살고 싶거든이 아니라 "따르려거든 따르라"라고 선언합니다. 조건절의 형식을 취하지만 동어 반복을 통해 조건의 얼개를 깨부수는 절묘한 수사입니다. 말하자면 따름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전제되어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함으로써 따름으로서의 믿음이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연하게 선포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곧 따름이라고 할 때, 이 따름은 그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깔지 않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5. 누가 믿는가?
185 를이제 '누가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나'는 그렇게 서로 다른 개체로서의 주체이면서 그런 개체적 주체도 같음과 다름이 뒤섞인 자기로서의 '나'입니다. 따라서 나의 믿음만이 옳다고 주장할 그런 '나'가 홀로 있을 수 없으며 '믿음'도 옳음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6. 언제/어디서 믿는가?
212 무엇보다도 '언제'와 '어디서'의 뜻을 가장 직접 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더듬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일 것 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추려낸 현실 초월과 현실 참여가 공히 깔고 있는 현실이 바로 '언제'와 '어디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고 초월하면서도 피하지 않고 참여해야 하는 현실이 바로 나를 이루고 있는 '언제'와 '어디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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