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 종교신학 강의 ━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이 가야 할 길


종교신학 강의 - 10점
정재현 지음/비아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1부 서론

2부 종교 간 관계 유형 분석

3부 종교에서 인간으로

4부 결론





1부 서론

제1강 강의를 시작하며

26 20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종교신학은 영어로 쓰면 Theology of Religions, 풀 어서 번역하면 '종교들에 관한 신학'입니다. 어떻게 보면 각 종교가 가진 신학(다른 종교들에서는 종학 또는 교학이라고 부릅니다)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신학은 Cristian theology of Religions, 즉 '종교들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자기 정체성과 타자 관계성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 하는 시대적 과제들 수행하는 분야인 셈이지요.


26 종교 신학이라는 말이 지닌 역사가 짧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다종교 상황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볼 때 현대 이전에 행해진 적이 없습니다. 종교신학은 현대가 시작되는 19세기 중엽부터 싹이 트더니 20세기 중엽에 비로소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제2강 종교 간 관계 분석을 위한 틀

40 현대는 탈중심주의를 표방하며 이는 어디에도 중심을 허락하지 않는 상호주의를 내세웁니다. 이에 따라 현대는 자타 관계에 주목하며 '타자'를 말합니다. 객체와 타자는 어떻게 다를까요? 앞서 말했듯 객체가 주체의 처분에 달려 있다면, '타자'는 주체의 처분에 맡겨진 그래서 결국 주체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같음이 아니라 자기의 처분 바깥에 있는 다름입니다.


44 우리 시대인 현대에는 쌍방의 관계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대상으로부터 상대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대상은 '마주하여 잡아낸 모양'이니 주체 안에 담기는 꼴이지만, 상대는 '서로 마주 함'을 뜻하니 주체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타자가 다름으로 다가올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습니다.


53 피조 세계의 큰 비중을 무인격성이 차지한다면 하느님의 창조원리에 이미 그러한 요소가 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원리에 있지 않은 것이 피조 세계에서 우연히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지요. 여기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가 하느님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피조 세계와의 관계에서 창조주 하느님이 관여하시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활동하실 때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자연의 필연성으로 나타나는 무인격적 차원이 있음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2부 종교 간 관계 유형 분석

제3강 배타주의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복음주의’

70 우리는 근대에 관한 맥그래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앓 없이도 있음 그대로 신이 인간에게 새겨질 수 있고 그러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달리 말하면 '무엇' 물음에 대한 답 하나로 충분한데 근대인들이 '어떻게'를 들이댐으로써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대답인 '있음' 그대로 예수도 보고 복음도 봐야 한다는 맥그래스의 입장,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이라는 구도는 앎의 주체가 등장 해 믿음의 꼴을 엮는 근대와는 충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근대를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78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인 것은 복음의 세계선포를 위한 본질적 기반과 증거다.

      자체(유일성-특수성)                         객관(보편성 확보)               실체


79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의 정당성의 근거는 "복음의 세계 선포"에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체와 실체로 충분하며 복음의 세계선포를 통해 확보 될 것이 기대되는 보편성(객관)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골방에서 한 사람만 인정하더라도, 아니, 단 한 사람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그 자체로 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포괄주의는 '선험적 보편성'에서 시작합니다.'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칼 라너의 표현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80 배타주의는 저 보편성이 없어도 특수성은 특수성 그대로 자체로 성립합니다. 이는 배타주의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든 배타주의로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4강 포괄주의(1)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그리스도교와 세계 종교’

98 포괄주의는 배타주의와는 달리 '그리스도교의 유월성'이 가장 중요한 주장입니다. 배타주의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포괄주의가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은 언뜻 비슷해 보이나 실제로는 현격히 다릅니다. 특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차이가 중요한데 이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루겠습니다.


98 '유일성'은 다른 것이 틀렸을 뿐 아니라 다른 것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라면, '우월성'은 다른 것과 함께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되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판단해 주장하는 말입니다.


117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윤리와 행동에서 우월하다.

                             대상                    주관                선험


118 결론은 우월성인데 이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나오나 선험적으로, 즉, 일일이 모든 종교를 다 검토하고 평가하지는 못하고 그저 몇 개를 살피고서는 직관적으로 우월성을 선언하는 방식입니다. 대상-주관-선험이라는 요소는 이렇게 얽혀 포괄주의의 입장을 엮어냅니다.


제5강 포괄주의(2) 에른스트 트뢸치의 ‘세계 종교와 그리스도교’

132 배타주의 근거는 그리스도이고 포괄주의의 근거는 교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교입니다. 트뢸치가 끊임없이 말하는 것도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교 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사를 더는 외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예수의 역사성 문제도 중요하지만. 트뢸치를 포함한 포괄주의자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교가 태동하고 인류 문화사와 엮인 과정에서 인간 사회에서 지닌 위상과 함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역사 의식 때문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


137 주변 일대에서 최고타당성은 그리스도교에 귀속된다.

          대상         주관      선험


배타주의의 세 요소는 자체, 실체, 객관이었습니다. 이와 견주어 포괄주의는 자체가 아니라 대상, 실체가 아니라 선험, 객관이 아니라 주관입니다. 포괄주의가 주장하는 그리스도교가 지니는 최고의 타당성은 주변 대상과의 비교에서 이루어집니다.


제6강 포괄주의(3)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교인’

150 이름이 바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한계는 소극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종교인에 대하여 '익명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의 근거라면 적극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종교인도 "가시적인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리고 세례를 받기 이전에 … 성화케 하는 은총을 소유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150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그러므로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모두에게 내리며 그렇기에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을 가능성은 특정 종교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162 은총에 의한 익명성선교를 통한 가시화를 요청한다.

                        선험       주관         대상화 


은총은 인간의 어떠한 조건에도 지배되지 않는 무조건적인 것이어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이름 붙이기에 앞서며 이러한 뜻에서 익명적입니다. 또한 익명성은 인간이 무조건적인 은총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깔려 있고 들이닥쳐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려주는 선교는 원초적 보편성에 역사적 구체성을 부여하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제7강 다원주의(1) 폴 니터의 ‘절대가 아니고도/아니어서 참된 종교’

182 초대 교회는 주위의 많은 이방 종교와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강조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지만 이는 다분히 시대적이고 종교문화적인 차원으로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그 뜻이 통하기 위해서는 신중심주의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185 하나의 특수한 계시자로에의 전체적인 위임은 다른 특수 계시자들 가운데서의 보편적인 하느님을 위한 전체적인 개방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186 보편적인 하느님은 '특수한 형식'에 자신을 위임하는 데 있어서 부분적으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쏟아붓듯이 자신을 드러내시나 이 '특수한 형식'은 시공간적으로 하나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특수한 형식'에도 보편적인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고 위임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8강 다원주의(2) 레너드 스위들러의 ‘종교 간 대화’

201 타 종교인과 만날 때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이상을 내세우고 타종교인에 대해서는 눈에 비치는 현실의 문제를 떠올리며 이를 맞대응시키곤 합니다. 이는 범주의 오류이지만 성찰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하기 쉽습니다.


202 실제 대화에서 '다름'에 대한 판단은 오해로 드러날 수도 있고 다른 '다름'이 새롭게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남과 대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202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면서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으려면 하나의 언어가 요구되는데 에큐메니컬 에스페란토어는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제안은 또 하나의 특정 언어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소통 가능성을 위해, 인간의 공통 본성을 토대로 한 언어로 종교 간 대화 이루어져야 함을 말합니다.


215 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의존하고 있기에 우리의 해석이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 (20)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인식론적 천박함"입니다. 이는 인간이 절대자를 규정 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도 자신의 이해와 해석을 거친 자신의 규정 만이 옳다는 생각을 뜻합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천박함이 발생하는 이유는 앎이라는 행위를 인간이 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앎에 바탕을 둔 믿음이 신의 있음 그대로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천박함은 그저 천박함에 머 무르지 않으며 타인의 생각과 믿음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데까지 나아가니 결국에는 자기를 절대화하는 폭력적인 편협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3부 종교에서 인간으로

제9강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구성적 상대성’

215 인간이 절대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 그것도 자신의 이해와 해석을 거친, 자신의 규정만이 옳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천박함'이 발생하는 이유는 앎이라는 행위를 인간이 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앎에 바탕을 둔 믿음이 신의 '있음 그대로'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25 앎의 차원에서 보면 종교의 본질과 정체성이 자기 동일성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앎이 다 잡아낼 수 없는 삶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러한 본질적 자기 동일성은 매우 지엽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225 대화의 장에서 도표를 그려놓고 줄을 긋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소통 불가현상에 대한 책임을 방기해도 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종교인은 타 종교인 혹은 비 종교인과 만날 때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할 책임이 있습니다.


제10강 ‘구성적 상대성’이 드러내는 ‘다종교적 체험’

240 우리는 교리를 의식하되 교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미 신앙이 다종교적 체험으로 엮어 져 있음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교리라는 형식의 용어 묶음이 어떠한 선까지 작용해야 하는지를 심사숙고 해봐야 합니다.


241 진리와 해석의 불가분리 관계에서 하나의 종교는 논리적 근거를 잃습니다. 체험과 해석의 불가분리 관계에서 하나의 종교는 현실적 근거를 잃습니다. 현실에서 구성원 각자가 지닌 신앙의 결을 따라 자기 신앙, 자신의 종교적 욕구와 관련해서 교리의 뜻이 새겨집니다. 체험과 해석의 분리 불가능성을 교리와 신앙에 적용하면 이렇게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바탕은 '있음'이나 '앎이 아니라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제11강 ‘개종 가능성’에 근거한 우상 파괴

252 그는 '순수'를 가정하는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나온 통일적 다원주의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개진합니다. 또한 종교간 관계 논의의 초점을 종교에서 인간으로 바꾸어 "인간의 종교적 뿌리"를 해부하고 조망합니다. 


253 여기서 그는 "인간의 종교적 뿌리"를“우연히 처하게 된 실존적인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우연", "실존", "상황"이라는 세 단어에 주목합시다. 이 셋을 묶으면 결국 인간의 삶이 됩니다. 이처럼 파니카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철저하게 인간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맺습니다.


258 계시에 대한 천박한 이해는 종교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제품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을 담은 종교는 우연한 상황을 살아야 하는 실존과 궤를 같이하며 "발전", "성장", "실수", "연속성", "새로움", "변형", "혁명", "삶", "죽음", "부활"이 빚어 내는 넉넉한 공간에서 엮여져 갑니다.


4부 결론

제12강 강의를 마무리하며

273 종교 현실에 대한 우리의 처방도 그저 종교 자체만을 가지고 이야기해도 좋을만큼 결코 단순할 수 없습니다. 복잡한 분석을 외면한다고 그냥 단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단순하다'라는 명제는 온갖 갈등과 충돌의 역사를 아우르다가 이르게 되는 귀결일지언정 이보다 앞서 군림하는 선언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단순함을 명분으로 복잡함을 말살하는 폭력일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의 이름을 표방 한 폭력을 역사에서 무수하게 보아 왔습니다. 


273 우리 자신 안에서 다름과 그름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있는 다름을 통해 남들을 만나고 그름을 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어느 순간에도 다 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앞을 향해 달려 갈 뿐이라는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름들이 한 데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름을 고치면서 서로를 올 곧게 벼려내는 기쁨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참된 뜻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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