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무서록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9. 18.
무서록 - 이태준 지음/범우사 |
璧(벽)
15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 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이나 한 폭 걸어 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았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 할 수 있는 것일까!
16 벽이 그립다. 멀찍하고 은은한 벽면에 장정 낡은 옛 그림이나 한 폭 걸어 놓고 그 아래 고요히 앉아보고 싶다. 배광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리운가 보다.
早熟(조숙)
20 어떤 이는 천재들이 일찍 죽는 것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했다. 천재는 더 오래 산다고 더 나올 것이 없게 그 짧은 생애에서라도 자기 천분의 절정을 숙명적으로 빨리 도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인생은 적어도 70, 80의 것이어니 그것을 20,30으로 달(達)하고 가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오래 살고 싶다.
21 좋은 글을 써 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인생은 즐겁다!" "인생은 슬프다!" 어느 것이나 20, 30의 천재들이 흔히 써 놓은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 70, 80의 노경에 들어보지 못하고는 정말 '즐거움' 정말 '슬픔'은 모를 것 같지 않은가! 오래 살아보고 싶은 새삼스런 욕망을 느낀다.
바다
32 거기의 한 노인 더러 바다를 보았느냐 물으니 못보고 늙었노라 하였다. 자기만 아니라 그 동리 사람들은 거의 다 못 보았고 못 본 채 죽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한 소년이 바다가 뭐냐고 물었다. 바다는 물이 많이 고여서, 아주 한없이 많이 고여서 하늘과 물이 맞닿은 데라고 하였더니 그 소년은 눈이 뚱그래지며 "바다? 바다!"하고 그윽이 눈을 감았다. 그 소년의 감은 눈은 세상에서 넓고 크기로 제일가는 것을 상상해 보는 듯 하였다. 내가 만일 아직껏 바다를 보지 못하고 '바다'라는 말만 듣는다면 '바다'라는 것이 어떠한 것으로 상상될까? 빛은 어떻고 넓기는 어떻고 보기는 어떻고, 무슨 소리가 날 것으로 상상이 될꼬? 모르긴 하지만 흥미있는 상상일 것이다. 그리고 '바다'라는 어감에서 무한히 큰 것을 느낄 것은 퍽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생각도 된다.
冊(책)
69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책' 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은 보온만을 위한 세기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든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筆墨(필묵)
72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만년필이다. 앞으로도 만년필의 신세를 죽을 때까지 질지 모르나, '만년필'이란 그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정들지 않는다. 파운틴 펜을 번역한 것이 틀림 없을 터인데 얼른 쉽게 '泉筆(천필)'이라고도 않고 하필 '萬年'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다. 묵즙이나 염수를 따로 준비하는 거추장스러움이 없이 수시 수처에서 뚜껑만 뽑으면 써낼 수 있는 말하자면, 그의 공리는 수(壽)보다도 먼저 단편(單便)한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萬年'이라 하였다. 만년이라면 칠십 인생으로는 거의 무궁한 세월이라 상시 상주를 그리는 인간이라 만(萬) 자가 그다지 좋았기 때문이면 '만세필'이라, 혹 '만수필'이라 했어도 좋을 법하지 않았는가.
古翫(고완)
124 우리 집엔 웃어른이 아니 계시다. 나는 때로 거만스러워진다. 오직 하나 나보다 나이 더 높은 것은, 아버님께서 쓰시던 연적이 있을 뿐이다. 저것이 아버님께서 쓰시던 것이거니 하고 고요한 자리에서 쳐다보면 말로만 들은, 글씨를 좋아하셨다는 어버님의 풍의가 참먹 향기와 함께 자리에 풍기는 듯하다. 옷깃을 여미고 입정을 맛보는 것은 아버님이 손수 주시는 교훈이나 다름없다.
126 시대가 오랫다 해서만 귀하고 기교와 정력이 들었다 해서만 완상할 것은 못 된다. 옛 물건의 옛물건다운 것은 그 옛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자취를 지녔음에 그 덕윤이 있는 것이다. 외국의 공예품들은 너무 지교해서 손톱자리 나가는 금 하나만 나더라도 벌써 병신이 된다. 비단옷을 입고 수족이 험한 사람처럼 생활의 자취가 남을수록 보기 싫어진다. 그러나 우리 조선 시대의 공예품들은 워낙이 순박하게 타고 나서 손때나 음식물에 쩔을수록 아름다워진다.
고완품(古翫品)과 생활
132 고전이라거나, 전통이란 것이 오직 보관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죽음'이요 '무덤 '일 것이다. 우리가 돈과 시간을 들여 자기의 서재를 묘지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청년층 지식인들이 도자를 수집하는 것은, 고서적을 수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 그것이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정말 고완의 생활화가 있는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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