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 10점
톰 라이트 지음, 백지윤 옮김/IVP


1 좋은 소식?

2 어리석거나 거리끼거나 좋거나

3 예수 왕에 놀라다

4 왜곡되고 상충하는 복음들

5 천국을 다시 생각하다

6 잘못된 미래, 잘못된 현재

7 하나님에 놀라다

8 좋은 소식을 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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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소식?

18 만약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지옥에 가리라는 것이 복음의 배경 이야기라면, 종종 그 메시지는 소식(일어난 사건을 알리는 것)이 아닌 충고(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로 이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충고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말로 들린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잡겠습니다." 만약 거기에 어떤 소식, 아마도 예수님이 그 선택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어 줄 어떤 길을 제공하셨다는 이야기 정도가 끼어 있다고 해도 결국 그 남자의 말이 옳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소식이며, 또 그 충고를 중요하게 받아들일 몇몇 운 좋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좋은 소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25 어떤 일이 일어났다.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당장 모든 것의 존재 방식이 달라진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울의 시대에 이런 종류의 좋은 소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완벽한 역사적 사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소식이 작동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2 어리석거나 거리끼거나 좋거나

54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 예수, 이 메시아의 임재가 그들에게 실재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그들은 단순히 그분에 대해 듣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그분이 바로 옆에 서 계시는 것처럼 느꼈다. 이것이 왕에 대한 선포,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에게 나타나는 효과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과 지금 함께 하신다는 그 느낌은 갑자기 다른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게 해준다.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전과 그 곳에 있는 사람이 만든 우상들, 그리고 온갖 추악한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들을 갑자기이 사람들은 그런 것이 참된 인간으로 사는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들은 그런 삶의 방식에서 완전히 돌아서기를 원한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싶어한다. 


3 예수 왕에 놀라다

75 그분은 정말로 고통 당하셨다. 진짜로 피를 홀리시고 죽으셨다. 부활은 죽음이 별것 아니라거나 진짜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부활이 드러낸 것은 십자가에서 악 자체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악의 권세는 예수님을 삼켰고, 그분에게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윤리적이고 영적인 폭력을 가함으로써 그분의 존재 모든 줄기에 파고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내려진 형벌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 악 자체 위에 내려진 형벌(실제 사형 선고)이었다.


78 현대 세계와 마찬가지로 고대 세계에는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주 다양한 생각이 존재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그런 여러 생각 중 아주 독특한 한 가지다. 곧 새로운 육체로 존재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죽고 사라진 뒤 일정 기간이 지나 새로운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78 고대 사회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이 궁극 점으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믿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곧 온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의 일부로서 그들을 새로운 종류의 육체적 생명으로 되살리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생과는 다르다. 사람들은 종종 이점을 헷갈려 하는데, 환생은 죽은 사람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데 반해 부활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 정체성의 적절한 물질적 표현인 근본적으로 새로워진 육신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86 어떤 경우에도 부활은 정확하게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한다고 볼 수 없다. 성 금요일 오후와 부활절 아침 사이에 예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분의 육신은 무덤에 있었지만, 그분은 자신의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눅 23:43). 누구도 이 낙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여기서 단 한 번만 쓰였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바로 그것이 죽음 이후의 삶이다. 부활은 그 다음 단계, 알려지지 않은 전혀 다른 종류의 존재 방식을 향한 거대한 도약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며, 낙원이든 다른 어떤 곳에서든 죽음 이후의 삶을 보내는 짧은 기간 뒤에 따라오는 새로운 육신적인 생명이다.


88 좋은 소식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것을 통해 이제 세상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는 것이다.


88 예전이나 지금이나 좋은 소식은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일어 났으며 언젠가 모든 창조 세계에 완전하고 순전하게 일어날 것이고, 또한 우리 인간, 누구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지금 여기서 그 변화에 사로 잡힐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4 왜곡되고 상충하는 복음들

114 어떻게 하면 이 더러운 옛 세상에서 탈출해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타락과 부패와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창조세계와 그 세계의 일부인 우리 인간을 구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116 창조와 언약을 잊어버린 복음을 제시하는 것, 무고한 희생양의 피로만 진노가 풀리는 성난 신에 관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 창조의 회복과 완성 대신 이 세상은 내버려둔 채 일부 사람(영혼)을 다른 곳, 말하자면 구름 위 천국으로 데려 갈 준비를 하는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진정한 성경적 기독교라기보다는 복잡한 형태의 이교주의에 훨씬 가깝다.


126 그러나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일부 지혜로운 낭만주의 사상가들도 인정하듯, 진정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은 그 경험이 다른 무언가의 우연한 부산물일 때 나온다. 감정 자체를 위해 자극하고 그런 감정을 신앙이라 부르면서 그 신앙이 영생에 이르는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주의만큼이나 섣부른 캐리커처다.


5 천국을 다시 생각하다

155 성경은 역사의 현재 시점이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이 마침내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기 위해 오실 재림, 이 과거와 미래의 두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의미 역시 그 두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새 창조는 이미 일어났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그리고 새 창조는 완성될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미래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사고는 바로 이런 더 큰 소망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 


6 잘못된 미래, 잘못된 현재

183 이 나라의 도래는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나서 일어난다.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 창조의 때가 아니다. 부활과 새 창조는 그 이후의 일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평범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예수님의 전 세계적 통치가 먼저다. 그 다음 영광스러운 기간 이후 새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이들의 부활을 포함한 마지막 일들이 올 것이다.


183 사람들이 이분법적 세계관에 따라 더 이상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가 아닌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을 고대하게 되면서. 복음 사역은 일종의 구출 작전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관한 것이다.  땅은 회개하지 않는 그 땅의 거주민들과 함께 방치될 것이다.


7 하나님에 놀라다

204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인들의 기본 입장인 이분법적 우주관은 '세상은 세상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모든 것이 괜찮지 않다. 모든 것이 바르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그 약속의 확증이자 그것의 첫 번째 성취이며, 성령의 역사는 그러한 성취를 계속 이어가게 할 것이다.


221 참된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이 존재한다면 그 참된 하나님은 세상 안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세상 안에 있는 대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생각 속 관념으로 대할 수 없다. 그렇게 치자면 우리가 그분의 생각 속에 있는 관념들이다.


8 좋은 소식을 기도하다

239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상호 보완적으로 만드셨다. 신약성경의 여러 저자들도 주장하듯, 마지막에 이르러 궁극적인 새 창조 세계가 완성될 때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다. 예수님이 행하고 계셨던 것의 모든 핵심은 땅과 하늘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바로 지금 그분의 사역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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