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현: 한국교회사에 묻는 열일곱 개의 질문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10. 16.
한국교회사에 묻는 열일곱 개의 질문 - 박종현 지음/동연(와이미디어) |
머리말
1. 조선시대 이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적이 있는가
2. 기독교는 한국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나
3. 기독교를 한국에 들여오려 한 이들은 누구인가
4. 기독교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5. 한국교회의 영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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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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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전쟁은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14. 한국에 교파가 지나치게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15. 한국교회연합운동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16.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 바뀌었나
17.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맺음글
48 초기 한국교회에 도래한 교파는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미국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캐나다 선교부, 호주 장로교 선교부, 영국 성공회, 구세군, 성결 교회였다. 남북 장로교와 남북 감리교는 미국에서 벌어진 노예제도와 관련이있다. 노예제도 문제는 18세기 복음주의 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사회적 과제 중 하나였다. 영국에서는 18세기 말부터 감리교의 영향을 받은 영국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가 끈질긴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벌였다. 그는 절친한 친구이던 영국의 명재상인 윌리엄 피트의 정치적 도움과 클래펌 공동체의 후원으로 40년 이상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입법 투쟁을 전개하였다. 1806년 대영제국의회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유럽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기독교 정신이 구현한 휴머니즘의 위대한 승리였다.
51 한국교회는 흔히 복음주의 교회로 알려져 있다. 복음주의란 종교개혁 사상을 계승한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는 개신교 전통을 말한다. 근대에 와서 복음주의는 근대 부흥운동에서 나타난 종교 체험 특히 거듭남의 체험을 강조하는 전통을 말하며,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성서의 권위를 훼손한다고 보아 자유주의와 대립하는 신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52 근본주의는 복음주의가 종교개혁 전통을 유지하려 하는 것에 비해 이 전통에 도전하는 사조들과 이념적 투쟁을 벌이는 과격한 태도를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그래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어도 언론에서 이슬람 근본주의나 시장 근본주의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투쟁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하였다.
52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선교사였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였고 가톨릭을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물론 캐나다 선교사 스코트처럼 초기부터 자유주의를 견지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복음주의자들이 항상 자유주의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62 한국 교회에 부흥 운동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신비적 정서, 서적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 그리고 헌신적인 종교생활의 기풍들이 어울려 된 것이다. 부흥운동은 대중들의 종교적 요구를 빠르게 충족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회심의 체험에서 신학적 사유의 기반을 구축하였고 근대 기독교의 경험적 신앙을 한국에 깊고 넓게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기독교의 성육신적 신비, 성례전적 신비와 한국인의 신비적 정서 사이의 상통성이 한국의 기독교 선교와 만나 번영을 이루게 된 것이 부흥운동이었다.
99 1930년대가 되면서 서북의 장로교회의 교세가 급증하면서 한국 교회는 장로교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감리교의 교세가 약 20여년 정도 우세하였으나 1907년 대부흥 운동기를 지나면서 장로교회의 교세가 감리교를 넘어섰고 1930년대가 되면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장로교의 교세가 집중되면서 평양은 교권의 중심이 되었다.
105 한국교회의 분열은 해방 후에 고려파, 기장, 합동과 통합의 장로교회 분열과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의 분열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이미 1930년대 종파 운동에서 균열이 가시화되었고, 1950년대 이후의 분열은 그 균열의 연장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종파에 따른 지역과 인적 구조는 아직도 한국교회에 남아있는 계보로서 유효하게 여겨질 정도로 영향력을 미쳤다.
136 이시기의 교회 성장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에서 감리교회의 교세가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초기에는 감리교 선교부의 투자가 많아서 감리교회의 성장이 앞섰다. 그러나 장로 교회는 네비우스 방법으로 알려진 자립, 자치, 자전의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교회 성장의 속도가 빨라졌다. 감리교회가 교육과 의료 등 사회 선교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한 것과 달리 장로교회는 복음전도와 교회의 성장에 주력하여 교세가 빠르게 성장했다. 1907년 부흥 운동을 지나면서 장로교회의 교세가 감리교회를 넘어서고 그 이후로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는 현재까지 장로 교회가 개신교 최대의 교파로서 남아있다.
141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 온 것은 오순절 운동과 침례교회의 눈부신 성장이다. 장로 교회, 감리 교회와 성결 교회가 오랜 역사 덕분에 조직은 비대해졌지만 역동성이 둔해진 반면에 새로운 교파들은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게 된다.
141 미국 오순절 교회가 한국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의 오순절 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찾게 되었다. 특히 조용기 목사의 출현은 한국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142 1970년대 여의도로 이전한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1970년대 한국교회는 빠른 성장을 유지하였다. 20년 평균 400%를 성장하였는데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같은 기간 2,000%를 성장하여 진기록을 세운다. 그 기간에 오순절 운동은 20년간에 한국의 주류 교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열정적 예배와 신비체험, 낙관적 신앙, 현세적 축복의 복음은 한국사회를 강타하였고 대부분의 기독교회의 설교와 예배와 찬양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62 전쟁으로 인한 이념적 대립은 양측이 점령한 지역에서 반복되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가혹하게 진행되었고, 전쟁의 공포와 불안의 희생양으로서 대량 살육이 횡행하였다. 전후 한국의 기독교가 철저한 반공을 하게 된 것은 한국 전쟁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165 전쟁 후 한국교회에도 나타난 부정적 변화는 경건의 이질화였다. 박태선의 전도관 및 문선명의 통일교 등 이질적 종교집단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도 한국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 분위기를 탄 것이었다. 신비주의와 열광주의가 만연하였고 기존 교회들은 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분열하여, 사회를 치유하고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기보다는 전쟁의 파생 효과 속에 부정적으로 노출되었다.
170 사실 모든 교회의 교회론은 하나의 통일된 신학에 의존한다. 그것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분열에 사용되는 다른 성서적 근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에 근거한 교회의 개별성이다.
178 신학적 대립, 신사참배 문제의 미청산, 교회 내의 파벌의 문제는 비단 장로교회뿐 아니라 감리교회의 분열과 성결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그 후 15년 간 이루어진 한국교회의 분열은 한 동안 세계 기독교의 근심이 될 정도로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 후 보수측인 합동과 고려파는 새로운 분열을 파생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합동계열은 1980년대 이후에도 계속적인 분열로 100여개가 넘는 교파 난립의 양상을 띠면서 이 후 발생한 한국교회 문제들의 물리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179 한국 교회의 분열은 한국 교회에 교회론의 과제를 제기하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어떻게 교회 지도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리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191 한국교회 일치운동의 그늘은 교회연합운동의 노선과 신학이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진보적 노선의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보수적 노선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양분되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1980년대 이후 보수적 교회들의 분열 양상을 되풀이하는 것과 유사한 분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교회일치운동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196 199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교회는 각 교단별로 한국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오순절 운동에서는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감리교회는 광림교회가, 장로교회는 온누리교회와 명성교회가 세계 최대의 교회라는 영예를 누렸다. 세계최대교회 10개 중 7개가 한국에 있다는 뉴스가 보도될 정도로 대형 교회의 출현과 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사 파송도 그에 따라 늘어났다. 1974년 최초로 태국에 최찬영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이 되었을 때는 전 세계에 15,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국가가 되었다.
202 해방 후 한국 교회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한쪽에서는 양적 성장과 그것을 토대로 하는 봉사와 복지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지배 구조의 왜곡이 교회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이러한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을 오늘의 양면적 현상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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