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버릿지: 복음서와 만나다 ━ 예수를 그린 네 편의 초상화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10. 22.
복음서와 만나다 - 리처드 버릿지 지음, 손승우 옮김/비아 |
초판 서문 / 개정판 서문 / SPCK 클래식 판 서문
1. 네 편의 복음서 ...
2. 포효하는 사자 - 마르코가 그린 예수
3. 이스라엘의 선생 - 마태오가 그린 예수
4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이 - 루가가 그린 예수
5. 높이 나는 독수리 - 요한이 그린 예수
6.... 하나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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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편의 복음서 ...
32 복음서는 일종의 고대 전기다. 복음서를 연구하며 우리는 고대의 초상 화랑을 따라 걷는다. 복음서들은 다른 고대 전기들과 같은 공간에 걸려 있으며 그렇기에 각 저자가 자신의 예수 이해를 그려낸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똑같이 주인공에 집중하며 복음서를 연구해야 한다. 복음서는 내러티브 양식으로 기록된 그리스도론, 좀 덜 엄밀하게 말한다면 예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33 복음서를 이해하려면 복음서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책에 담긴 내러티브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익혀야 한다. 이러한 방법은 네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각 초상을 음미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58 복음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향한 복음서 저자들의 창조적인 응답이다. 성자 하느님을 온전한 인간이 된 온전한 하느님으로 고백한다면 복음서를 온전한 인간의 언어로 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복음서에 존재하는 인간의 구성을 비평하고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복음서가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58 비평이라는 도구를 통한 읽기는 성서를 읽는 성서적인 방법인 동시에 문학 작품을 읽는 문학적인 방법이다. 복음서 저자들의 발 앞에 앉아 이들이 그린 초상을 바라보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기교와 재능, 마음과 정신을 발휘해야 하며, 기도하고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2. 포효하는 사자 - 마르코가 그린 예수
86 서두를 급박하게 전개하고, "즉시"를 빈번하게 사용하며 시간의 흐름을 압축한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세심하게 구조를 세워 샌드위치 기법, 3의 구조 등을 활용해 문체를 간명하게 하는 등 마르코는 모든 도구를 활용하여 예수의 행보, 그의 활동이 얼마나 긴급했으며 또 급박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선명하게 전한다.
91 마태오와 루가는 복음서를 예수의 가족과 그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나 마르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초원을 누비는 사자처럼 예수는 장성한 채 곧바로 무대 위에 선다.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와 가족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을 누그러뜨리나 마르코는 의도적으로 이 갈등을 권력자들이 예수를 공격하는 장면, 그리고 사탄과 벌이는 우주적 투쟁과 연관 짓는다. 새끼 사자가 자라서 한두 번 몸싸움을 벌인 뒤에는 자기 무리를 이루기 위해 가족을 떠나듯 말이다.
91 잘 짜인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영웅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하거나 승리를 쟁취 할 때까지 갈등은 내러티브에 힘을 싣고 긴장을 더 해준다. 갈등이 해소 될 때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마르코가 그리는 예수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 그 순간이 지금임을 선포하는 강렬한 인물이다. 그가 북쪽 지역을 종횡무 진으로 누비는 동안 마르코는 예수가 모든 대적자와 벌일 싸움을 차근차근 준비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122 본래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든 우리에게 전해진 마르코의 내러티브는 갑작스럽게 시작하여 느닷없이 끝나버린다. 처음 예수가 왔을 때 아무런 설명이나 정황이 없었듯 그가 떠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그가 어디로 갔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가 이곳에 있었을 때도 고통 속에서 능력이 드러나고 죽음을 통해 왕임이 선포되는 이 불가사의한 인물을 이해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3. 이스라엘의 선생 - 마태오가 그린 예수
125 마르코의 복음서 중 90% 정도(약 600 절)는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반복된다. 이 구절들은 523절로 축약되어 마태오의 복음서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오가 그리는 예수는 마르코가 그린 예수와는 꽤 다르다. 그는 마르코의 복음서에 탄생 및 부활 내러티브, 더 많은 가르침 자료를 추가하고 재구성해 통상적인 전기 진행 방식에 가까운, 훨씬 더 완전한 초상을 그린다.
126 마르코가 전하는 기사가 숨어계신 하느님, 예수의 부재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마태오는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에 게 관심한다.
165 독자들은 마태오의 복음서가 묘사하는 이스라엘,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잘 살펴야 한다. 마태오가 기록한 독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태오 특유의 세 짝 양식에는 적어도 세가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마태오는 예수를 구약성서를 성취하고 이스라엘 영웅들을 한데 모은 이스라엘 선생으로 그린다. 이는 저자와 그의 대상 독자 (청중)가 유대교에 깊이 물든 이들이었음을 암시한다. 둘째,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에 대한 마태오의 태도를 살펴보면 그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보기 어렵다. 즉 유대인을 전도하기 위해 이 복음서를 기획했을 개연성은 낮다. 셋째, 마태오의 갈등 묘사,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한 아픔, 쓰라린 분노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결론에 부합하는 상황은 무엇일까?
167 그리스도교인이 공의회에 넘어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해 이방인 통치자 앞에 끌려가게 되리라고 심지어 자기 가족에게도 그러한 일을 당하리라고 경고하는 복음서 저자는 마태오뿐이다. 그리고 이는 왜 마태오의 복음서가 유대교 색채가 짙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독자로 겨냥하지 않는지를 설명해준다. 유대인에게 선교를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이제 문제는 유대-그리스도교인에게 주어진 신학적 문제, 곧 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성서, 자신들의 소망을 성취할 선생을 배척했는가, 왜 하늘나라가 이방 사람들에게 가버렸으며, 왜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오의 복음서가 이러한 분열이 진행되던 80년대 중반 안티오키아와 같은 곳에서 기록되었다고 보면 그만이 전하고 있는 독특한 자료나 강조점은 비참한 상황에 처한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 위와 같은 물음들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77 선생은 그들과 영원히 "세상 끝날까지"(28:20)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복음서에 하느님은 숨어계시지 않는다. 계시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예수 역시 마지막까지 승천하지도 떠나지도 않는다. 이는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며 모든 것을 아우른다. 곧 "모든 권세"는 예수에게 있으며 제자들은 "모든 민족"에게 가서 "모든 것"을 가르칠 것이다. 예수는 그들과 "언제나" 함께 할 것이다. 마태오가 그린 예수의 초상에서 그는 다름 아닌 인간의 얼굴을 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4.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이 - 루가가 그린 예수
181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물이라는, 소에게서 떠오르는 오늘날의 인상을 일부 활용하겠지만, 독자들은 소가 지닌 힘과 강인함, 소라는 상징이 떠오르게 하는 노동력과 부, 희생 제사와 성전 등 고대이야기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루가가 그리는 예수는 철저하게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이, 모든 짐 진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돌보며 끝내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29 좋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종결되지 않으며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루가의 복음서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이가 지금도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속편을 위한 예고편이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며, 그는 자신이 세운 사도들의 행전 안에서, 그리고 이를 통하여 루가가 긴 안목으로 바라보고 있는 역사와 세계를 완성한다. 사도들은 예수의 영에 힘입어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하여 그와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활동을 해내며 이를 넘어선다. 그들은 치유하며 예수가 전하는 온 세계를 구원하는 메시지를 전한 다. 그들은 선포한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이가 있다!"
5. 높이 나는 독수리 - 요한이 그린 예수
235 루가는 시점을 더욱 앞당겨 탄생 이전의 일, 기적과 같은 엘리사벳의 임신, 세례자 요한의 출생으로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예수가 나아갈 길을 예비한다. 그러나 요한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훨씬 더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보기에 예수를 시간과 장소, 혹은 족보라는 인간적인 기원으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요한이보기에 예수는 모든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다.
254 요한의 그림은 서문에서 높이 날며 내려다보는 관점에서 시작했다.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예수는 이러한 인식을 잃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선재했음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 보낸 이가 누구인지, 자신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자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 그 때는 언제 오는지, 사람에게 가진 것이 다 떨어졌을 때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갈 것인지를 알고 있다. 창세 전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광 안에서 자신과 함께 할 모든 사람이 만나는 마지막 운명까지 그는 알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는 이토록 높이 날며 모든 것을 내려다 본다.
282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복음서를 읽어 온 독자에게 이 진리는 처음부터 알려져 있었다. 태초부터 하느님이셨던 말씀은 결말에 이르러서도 하느님임을 인정 받는다.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펴고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은 채, 쉬듯이 날며 커다란 원을 그리고 돌아왔다. 다른 쪽에서 바라보면, 독수리의 여정은 높고도 높은 곳에 서 시작해 땅속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여정이었다. 요한의 복음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 독수리가 둥지를 떠났다가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282 부활한 예수는 찾아와 우리를 치유하고 용서하고 회복시켜 준다. 그리고 우리를 아침 식사 자리로 초대해 자신의 손으로 물고기를 건네어 준다.
6. ...하나의 예수?
302 451년 열린 칼케돈 공의회는 마침내 예수가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성을 지닌 한 위격이라는 정통 그리스도론 공식을 확정했다. 이 책에서 예수에 관한 네 편의 초상을 살피며 언급했던 두 요소를 모두 담으려 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진술은 교회가 그리스 로마 세계로 이주해 갔음을 반영한다. 방랑하는 유대교 랍비이자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요 대리인이었던 예수를 당시 교회는 그리스 철학의 언어로 표현했다. 문화의 흐름에 따라 예수상은 다시금 새로이 해석되었고 또 새로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그리스도론 전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수세기를 거치며 셀 수 없을만큼 수많은 예수상이 등장했고 다양성은 더욱 확대되었다.
312 최초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부활은 다른 종교 집단과 철학 학파들의 이야기들과는 견줄 수 없는 반향을 일으켰다. 부활 기사는 이야기 속 영웅이 사망한 시조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영감을 주고 이야기를 창조했고, 또 창조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듣는 이들 가운데 지금도 살아있는 현존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이 현실에, 예수라는 인물 안에서 이 땅에 뿌리내렸다. 후에 만들어진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성육신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이야기 안에 뿌리내렸고, 이야기는 내러티브를 통해 전기라는 양식으로 체현된 신학을 통해 구체화하였다.
314 에제키엘이 본 환상에서 하느님의 보좌를 떠받치는 천사(거룹)들의 얼굴은 사자, 인간, 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에제 1:10, 10:14). 성 요한의 묵시록에서도 이 네 생명체는 하느님의 보좌를 둘러서 있다(묵시 4:7). 이 네 생명체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때면, 천사들과 원로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무수한 사람은 하느님을 향해 엎드려 경배한다(묵시 4:10, 5:8, 11, 14). 결국 이 네 상징은 경배라는 정황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켈스의 서에 복잡하게 그려진 그림들이 그러하듯, 성 마르코의 날뛰는 사자, 성 마태오의 이스라엘 선생인 인간, 성 루가의 무거운 짐 짊어지고가는 소, 그리고 성 요한의 높이 나는 독수리는 우리가 내면의 복음서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예수를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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