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익진: 불교의 체계적 이해


불교의 체계적 이해 - 10점
고익진 지음/광륵사


머리글


제1부 불교의 근본교설

제2부 불교, 어떻게 믿을 것인가?

제3부 불교와 기독교

제4부 한국사회와 불교 윤리

제5부 일불승의 보살도





24 '깨달음'이라는 말은 계시라는 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신이 특정한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계시라면, 깨달음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침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26 중생들의 '깨닫는 능력'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가서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론을 불교에서는 방편시설이라고 부른다. 방편은 접근한다는 말이고 시설은 알아내게 한다는 뜻이다.


64 연기라는 말은 '연하여 결합해서 일어난다'는 뜻인데, 각 지분은 자기 앞의 지분에 연하여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온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게 되는 과정을 유전문이라고 부르고, 무명의 멸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멸하게 되는 과정을 환멸문이라고 부른다.


73 불교의 연기론에 의하면 인간의 생사 괴로움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자기 마음 속의 무명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무지의 타파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의 설전 행동의 목표는 무명을 타파한 세계 즉 열반에 있고, 그 방법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명 번뇌를 멸하는 자력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90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 부른다. 해탈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자유 등을 의미하고 열반은 '불어 끈다'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두 술어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계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석가모니께서 불교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표현하는 술어로 채택한 것이다. 이것은 그 경지가 그러한 개념에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97 오늘날 한역으로 전해자는 4 아함과 남방불교에 팔리어로 전해지는 5 니카야는 바로 이러한 교설을 결집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아함의 교설이라고 부른다.


98 교단은 마침내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분열한다. 이것을 근본이부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일단 이렇게 분열이 생기자 이로부터 다시 세부 분멸이 뒤따라 먼저 대중부에서 8파, 계속해서 상좌부에서 10파가 갈려나가 B.C 1세기경까지에는 총 20부파의 형성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라고 부르고 그 이전을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99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위열반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증득하는 아라한으로 인식되었다.


99 부파불교가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을 때, 교계의 한편에서는 석가모니께서 뜻한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되찾으려는 사상운동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대승불교 운동이라고 하는데, 재가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혁신적인 출가인의 지도층이 그 추진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의 길을 소승이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적인 보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하였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이제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에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석가모니께서 베푼 교설의 진정한 뜻이라고 그들은 역설하였다.


107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을 보리살타 또는 줄여서 보살이라고 한다. 보리는 깨달음을 구하는 또는 깨달음 속에 있는 중생이라는 말이 된다.


153 불교에 있어서의 믿음은 이와 같이 항상 발심을 수반하는데, 이러한 발심은 부처님과 같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곧 종교적 실천의 행으로 옮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화엄경은 이런 뜻을 잘 표현하여 십주 다음에 십행을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이상과 같은 불교적 믿음과 발심과 행을 하나로 연결한 종교적 생활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87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는 말로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라고 한다. 업은 원인이고 보는 결과이므로 업인·과보로 표현하기도 한다.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를 것이고 그들의 성질은 상응할 것이다. 선업에는 좋은 보가, 악업에는 나쁜 보가 따른다는 말이다.


190 불교의 이러한 업설에 의할 때 인간의 현실 상황은 그가 짓고 있는 업에 대한 보의 총화가 바야흐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은 동시에 그의 새

로운 업이 작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1 불교의 업설에 의할 때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은 바로 중생들 자신의 업력인 것이다. 불교학에서는 우주 안에 있는 전 중생들의 이러한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세계는 공업의 소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218 불교의 무아설은 단순한 무아설이 아니라 연기에 입각한 연기무아설이다. 그것이 부정하고 있는 나는 무명에서 연기한 '온'의 '나'로서 참다운 아트만의 부정이 아니다. 참다운 아트만은 나의 부정을 통해서만 나타나고 추호라도 나의 긍정이 있으면 나타나지 못한다. 불교가 무아설에 시종일관함은 이 때문이다.


274 '관세음을 생각하고 부르라'는 말에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은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다. 절대적인 믿음에서 적극적인 선업에로, 거기서 다시 아집의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대승 공관의 실천에로, 그리하여 또 다시 큰 자비의 구제활동에로 심화될 것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347 조선시대 소설문학(특히 임진란 이후)에는 권선징악의 인과응보 사상이 들어있지 않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불교의 어느 사상보다도 구소설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인과응보설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구소설이 불교문학을 뜻했던 것은 아니다. 유교사회에서 그럴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과응보설이 그 정도로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것이 당시 사회에 얼마만큼 깊이 통속화되어 있는가를 의미한다. 오늘날도 인연이라는 말이 일상생활 용어가 되어 있으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378 형이상학적 진리와 현실적 사실이 이렇게 정합하지 않을 때, 전자에 입각해서 후자를 억지로 설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378 불교의 십업설은 바로 이런 현실적 사실에 입각해서 설해진 윤리적 교설이다. 인간은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을 나라고 집착하여 그 존속을 위해 끊임없이 편안함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 인간의 의지적 활동을 업이라고 부른다.


379 선악업인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고락과 보과 따른다는 말이다. 이런 법칙성은 자연법칙적 인과율과는 달리 피차에 의지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성립케 되는 윤리적 성격의 것이다.


381 업설은 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교리일 뿐만 아니라 삼국에 전래한 초 전기 불교의 중심사상도 그것이었다. 그러한 업설은 전래 당시엔 국가발전에 장애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던 귀족세력의 무교적 사상기반을 해소하려는 정치성을 띤 것이었다.


398 필자가 뜻하는 바는 적어도 아함·반야·법화의 삼부경만은 모든 불자가 다같이 지송하고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삼부경은 일불승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근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아함경의 연기론을 떠나 반야경의 공은 이해될 수 없고 삼승의 교리 없이 법화경의 일불승은 있을 수 없다. '일불승을 셋으로 갈라 삼승을 설한다'는 법화경의 뜻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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