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9. 2. 7.
제1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13
제2권 51
제3권 79
제4권 121
제5권 159
제6권 203
제7권 233
제8권 277
제9권 315
제10권 349
제2부 부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사상 388
『니코마코스 윤리학』 작품 해제 406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구조: 철학적 입문 424
성격적 탁월성과 악덕의 도표 453
용어해설 454
참고문헌 465
찾아보기 479
1094a1-5 모든 기예(techne)와 탐구(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 그러나 추구되는 여러 목적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의 경우 그 목적은 활동(energeia)이며, 다른 것들의 경우에는 활동과는 구별되는 어떤 성괴물(ergon)이기 때문이다. 행위와 구별되는 목적이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성과물이 본성적으로 활동보다 더 낫다.
1094a18-29 그래서 만약 행위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이것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라는 것이라면, 또 우리가 모든 것을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무한히 나아갈 것이며, 그 결과 우리의 욕구는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좋음이며 최상의 좋음(ariston, 최고선)일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앎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큰 무게를 가지지 않겠는가? 또 마치 과녁을 가지고 있는 궁수처럼 마땅히 그래야 할 바에 더 잘 적중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고 한댜면 우리는 적어도 개략적으로나마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 또 어떤 학문에, 혹은 어떤 능력에 속하는 것인지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1095a14-23 이제 다시 주제로 돌아가서 살펴보도록 하자. 모든 종류의 앎과 선택이 어떤 좋음을 욕구하고 있으므로, 정치학이 추구한다고 지적했던 좋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상의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 보자.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대중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을 '행복(eudaimonia)'라고 말하고, '잘 사는 것(eu zen)' 과 '잘 행위하는 것(eu prattein)'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대중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동일한 답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령 즐거움이나 부나 명예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1101b32-1102a3 칭찬은 탁월성에 관련한 것이다. 사람들은 탁월성을 통해 고귀한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반면 엥코미온은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실제로 수행된 성과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더욱 정확하게 다루는 일은 아마 엥코미온에 관해 연구를 해 본 사람에게 더 적합한 주제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부터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행복이란 명예로우며 완전한 것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또 행복이 원리(arche)라는 사실로부터도 사정은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행하며, 좋은 것들의 원리이자 원인인 것을 명예롭고 신적인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1103a14-25 탁월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적 탁월성이며, 다른 하나는 성격적 탁월성이다. 지적 탁월성온 그 기원과 성장을 주로 가르침에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반면 성격적 탁월성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 이런 이유로 성격을 이르는 '에토스(ethos)'도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로부터 조금만 변형해서 얻어진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성격적 탁월성들 중 어떤 것도 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본성적으로 그런 것은 어느 것이든 본성과 다르게는 습관을 들일 수가 없으니까. 예를 들어 돌은 본성적으로 아래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기에 위로 움직이도록 습관을 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만 번을 위로 던져 습관을 들이려 해도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불을 아래로 움직이게끔 습관을 들일 수도 없는 일이며, 어떤 것도 그 본성과 다르게 습관을 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성격적〕 탁월성들은 본성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본성에 반하여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1103b22-25 품성상태(hexis)들은 〔그 품성상태들과〕 유사한 활동들로부터 생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활동들이 어떤 성질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 활동들의 차이에 따라 품성상태들의 차이가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죽 이렇게 습관을 들였는지, 혹은 저렇게 습관을 들였는지는 결코 사소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큰 차이, 아니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1107a1-4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상태로,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에 의존한다. 이 중용은 이성에 의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할 그런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다. 중용은 두 악덕, 즉 지나침에 따른 악덕과 모자람에 따른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
1117b8-17 따라서 용기와 관련된 것 또한 이러하다고 한다면, 죽음과 부상은 용감한 사람에게도 고통스럽고 내키지 않는 것이 될 것이지만, 그는 이것들을 견뎌 낼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모든 탁월성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또 더 행복해질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를 더 괴롭힐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며, 이런 사람이 알면서도 가장 큰 좋음들을 〔용감한 행위를 통해〕 빼앗긴다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 못지 않게 용감하며, 아마 더 용감할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이 모든 좋은 것들 대신 고귀한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탁월성의 발휘(energein)가 즐겁다는 것은, 이미 그 목적에 도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모든 탁월성에 타당하지는 않다.
1130b25-33 또 전체적인 탁월성을 만들어 내는 것들은 공동을 위한 교육과 관련해 제정된 법에 따르는 것들이다. 각 개인에 따르는 교육, 즉 그것에 따라 단적으로 좋은 인간이 되는 교육이 정치학에 속하는지, 아니면 다른 학문에 속하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자. 좋은 인간이라는 것과 좋은 시민이라는 것이 아마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닐 테니까. 부분적인 정의와 그 정의에 따라 정의로운 것의 한 종류(eidos)는 명예나 돈, 혹은 정치체제를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눌 수 잇는 것들의 분배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1131a24-29 또 이것은 가치(axia, 공적)에 따라 분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고려해 보더라도 분명하다. 분배에 있어 정의로운 것은 어떤 가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가치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를 가치라고 말하고, 과두정의 지지자들은 부나 좋은 혈통을 가치라고, 또 귀족정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탁월성을 가치라고 말한다.
1134b18-23 정치적 정의의 한 부분은 자연적인 것이며 다른 한 부분은 법적인 것 혹은 관습적인 것이다. 자연적 정의는 사람들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어디에서나 동일한 힘을 가진다. 반면 법적 정의 혹은 관습적 정의는 애초부터 이러한 방식으로 규정되든 저러한 방식으로 규정되든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일단 제정된 연후에는 차이를 갖는 것〔=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포로의 몸값은 1므나라는 것 혹은 양 두 마리가 아니라 염소 한 마리를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가령 브라시다스에게 희생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과 같이 개별적인 경우를 위해 법으로 제정된 모든 법률과 결의들이다.
1134b31-1135a5 다르게 있을 수도 있는 것[변할수있는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이 자연적으로 그러한 것들이고, 어떤 것들이 자연적으로 그렇지는 않고 법적이며 규약에 의한 것인지는, 양자가 공히 유사하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인 한 분명하다. 동일한 구별이 다른 경우에도 들어맞을 것이다. 자연적으로는 오른손이 더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양손잡이가 될 수 있으니까. 규약과 이로움(sympheron)에 따라 정의로운 것들은 척도(metron) 와 유사하다. 포도주와 곡물을 재는 척도는 어디서나 동등하지는 않지만 도매에서는 더 크고 소매에서는 더 작으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정의로운 것들은 어디서나 동일하지는 않다. 정치체제 역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오직 하나의 정치체제만이 어디서든지 자연에 따라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하더라도.
1139a18-29 영혼 안에는 행위와 진리를 지배하는 것 세 가지, 즉 감각(aisthesis)과 지성(nous)과욕구(orexis)가 있다. 이 중에서 감각은 어떤 행위의 원리(arche)도 아니다. 이는 동물들도 감각은 가지고 있지만 행위에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분명해 진다. 그런데 사유에 있어서 긍정과 부정에 해당하는 것은 욕구에 있어서는 추구와 회피이다. 따라서 성격적 탁월성이 합리적 선택과 관련한 품성상태이고, 또 합리적 선택은 숙고적 욕구이므로, 합리적 선택이 신실한 것이려면 이성(logos)도 참이고 욕구도 올바른 것이어야만 하며, 동일한 것을 두고 이성은 긍정하되 욕구는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실천적 사유이며 실천적 참이다. 그러나 이론적일 뿐 실천적이거나 제작적이지 않은 사유에 있어서 그것의 잘함과 못함은 참과 거짓이다.
1139b14-19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참을 인식하는 품성상태들에 대해 논의해 보자. 영혼이 그것에 의해 긍정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참을 인식하게 되는 것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자. 이것들은 기예(techne), 학문적 인식(episteme), 실천적 지혜(phronesis), 철학적 지혜 (sophia), 그리고 직관적 지성(nous)이다. 추측과 의견(doxa)에 의해서는 허위에 빠질 수 있으니까.
1141b9-17 실천적 지혜는 인간적인 좋음에 관계하며, 숙고가 가능한 것에 관계한다. 우리는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기능, 즉 잘 숙고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아무도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갖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것도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좋음이라는 목적을 갖지 않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잘 숙고하는 사람은 인간적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것을 헤아림에 따라 적중시키는 사람이다. 또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까지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1142a24-29 실천적 지혜가 학문적 인식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실천적 지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종의 것에 관련하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직관적 지성(nous)과 대립해 있다. 직관적 지성은 그것에 관한 설명(logos)이 있을 수 없는 정의(horos)〔개념)들에 관련하는 반면 실천적 지혜는 그것에 관해 학문적 인식은 있을 수 없고 〔오직〕 지각(aisthesis)의 대상일 뿐인 최종적인 것에 관련하기 때문이다.
1156a32-1156b5 젊은이들의 친애는 즐거움을 이유로 성립하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감정에 따라 살며 주로 그들에게 즐거운 것을 추구하고, 또 지금 있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즐거운 것들도 달라지게 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되고. 또 쉽게 헤어진다. 그들의 친애는 즐거움에 따라 바뀌는데 그러한 즐거움의 변화는 빠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또 에로스 지향적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대부분 감정에 따른 것이며 즐거움을 이유로 성립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가 순식간에 헤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면서, 이들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살기를 원한다.
1156b-10 완전한 친애는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애이다. 이들은 서로가 잘 되기를 똑같이 바라는데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그렇게 바라며, 또 그들은 그 자체로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를 위해 그 친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이다.
1175a9-18 모든 사람들은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움을 욕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일종의 활동이며, 각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능력〕들을 가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신의 활동을 발휘한다. 예를 들면 음악가는 자신의 청각을 가지고 멜로디에 관련해서 활동하며,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유를·가지고 관조 대상들에 관련해서 활동한다. 다른 나머지 경우들 각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런데 즐거움은 그 활동들을 완성시키고 따라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 또한 완성시킨다. 따라서 사람들이 즐거움도 추구한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일이다. 즐거움은 각자에게 있어 진실로 선택할 만한 것으로서의 삶을 완성시키니까.
1176a34-1176b8 우리는 행복이 품성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만약 행복이 품성상태라면 평생 잠만 자면서 식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크나큰 비운을 겪고 있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한 생각이며,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행복을 일종의 활동으로 규정해야 한다면, 또 만약 활동들 중 일부가 다른 것을 위해 선택되는 필수적인 것이고, 다른 일부는 그 자체로 선택되는 것이라면, 행복은 분명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들 중 하나로 놓여야 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활동들의 하나로 놓여서는 안 된다. 행복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활동은 그것으로부터 활동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추구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가 바로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고귀하고 신실한 것들을 행하는 것은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할만한 것들 중 하나이니까.
1177a12-36 행복이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최고의 탁월성은 최선의 것에 대한 탁월성이다. 이것이 지성이건 혹은 다른 어떤 것이건, 이것은 본성상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며, 고귀하고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 자체가 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적인 것이든, 자신의 고유한 탁월성에 따르는 이것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이 활동이 관조적인 것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이전에 논의했던 바에, 또 진리에 일치하는 것 같다. 이것이 최고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지성이 최고이며, 지성이 상대하는 대상 또한 앎의 대상들 중 최고이니까. 게다가 이 활동이 가장 연속적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행위하는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행복에는 즐거움이 섞여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 중 '지혜(sophia)'에 따르는 활동이, 동의되는 것처럼 가장 즐거운 것이다. 여하튼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은 그 순수성이나 견실성에서 놀랄만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앎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그러한 관조에서 더 즐겁게 삶을 영위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더욱이 우리가 논의하는 자족도 다른 무엇보다 관조적 활동과 관련한다. 철학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나 정의로운 사람, 다른 탁월성을 가진 사람 모두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들이 충분히 갖춰졌을 경우, 정의로운 사람은 그가 그 사람에 대해 해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될 상대방, 혹은 그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될 동반자를 필요로 하며, 절제 있는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 또 그 밖의 탁월한 사람들 각각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철학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혼자 있어도 관조할 수 있으며, 그가 지혜로우면 지혜로울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가 동반자를 가지면 아마 더 잘 관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장 자족적이다.
1177b17-26 만약 탁월성에 따른 행위들 중 정치적인 행위들과 전쟁과 관련한 행위들이 그 고귀함이나 위대함에 있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이 행위들은 여가와 거리가 먼 것이며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자체 때문에 선택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반면에 지성의 활동은 관조적인 것으로서 그 진지함에 있어 특별한 것이며 활동 자체 이외에는 어떤 다른 목적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즐거움을 (이 즐거움이 그 활동을 증진시킨다) 가지는 것이라면, 또 〔마지막으로〕 만약 인간에게 가능한 한 자족성과 여가적인 성격, 싫증 나지 않는 성질, 그리고 지극히 복된 사람에게 귀속하는 모든 성질들이 바로 이 활동에 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다면, 이 활동이 삶의 완전한 길이를 다 받아들이는 한, 이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행복에 속하는 것들 중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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