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 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 |
제1부 도전
제2부 문명
제3부 계약
제4부 공동체
에필로그: 우리의 밤의 그림자를 뛰어넘기 위해
옮긴이의 말
성경 색인
제1부 도전
1장. 성경의 결말: 야만적인 하나님에 대한 찬양?
29 폭력적 하나님과 비폭력적 하나님으로 분리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성경의 하나님이 한편으로는 비폭력적 분배 정의의 하나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다. 이런 두 가지 초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런 두 가지 비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이 책의 과제이다.
2장. 성경의 중심: 의미는 중간에 있는가?
50 성경 속의 투쟁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악함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이 땅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비폭력적으로 분배하려는 하나님의 급진적인 꿈과, 다른 한편에서는 문명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꿈, 즉 내가 나의 것을 간직할 뿐 아니라 너의 것을 취득하고, 더욱 많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문명의 정상적인 꿈 사이의 투쟁이다. 따라서 훌륭한 책과 그 책 바깥에 있는 악한 세상 사이의 긴장관계가 아니다. 훌륭한 책과 악한 세상 사이의 긴장관계이며, 그 둘 모두가 그 책 속에 있다는 점이다.
58 그리스도고 성경의 규범과 기준은 성경의 그리스도이지만, 성경의 그리스도의 규범과 기준은 역사적 예수이다.
58 "규범"이나 "기준"이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교 성경을 읽기 위해서 단지 그리스도라는 안경만을 써야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서는 예수라는 안경도 써야만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복음서들 속에서 역사적 예수가 탄 평화의 노새가 계시록에 나오는 묵시적 군마를 압도한다 분명히 우리는 최소한 문명이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급진성에 편들고 있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제2부 문명
3장. 양심
66 우리가 창조의 시간을 기원전 4000년으로 보는 것과 그 장소를 메소포타미아로 보는 것을 결합하면,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2장 이후에 우리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의 너른 평원 위에서 벌어진 신석기 혁명의 클라이맥스, 즉 문명이 시작되는 시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81 아담과 하와가 먹은 것은 단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 정확히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 즉 윤리적 인식의 나무, 또는 도덕적 성실성의 나무, 또는 간단히 말해서, 양심의 나무였다는 점을 나는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창세기의 결론은 우리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것은 불가능한 불멸성이 아니라, 도덕적인 존재 - 책임성 - 에 있다는 점이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우리를 통제할 본능만이 아니라 우리를 안내하는 양심을 갖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알고 있는 전부이며,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82 창세기 2-3장은 전통적으로 순종과 불순종,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처벌 즉 인간의 "타락"에 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물론 이런 단어나 개념은 이 본문 속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인간은 불멸성이라는 망상 속에서가 아니라 양심의 도전 속에서 살도록 선택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현실은 형벌이 아니며, 인간의 행동이 초래한 귀결은 하나님의 처벌이 아니다.
4장. 폭력
98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성경 속의 "원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결론을 내린다. 첫째로,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본문에 따르면, "죄"는 본래 창세기 2-3장의 신적인 동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인간의 들판에서 발생했다. 둘째로, 창세기 4장에서 "죄"는 창조 속의 결함이 아니라 문명 속의 결함이며, 자연 속의 단점이 아니라 문화 속의 단점이다. 셋째로, 원죄는 개인들과 섹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들과 폭력에 관한 것이다. 원죄는 인간이 폭력을 확대시키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넷째로, 죄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저항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창세기 4:7에서 하나님은 "네가 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의 양심에 대해 하나님이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
제3부 계약
5장. 창조와 계약
124 나는 지난 50년 동안 학자들이 합의한 것, 즉 히타이트 방식의 종주-봉신 사이의 조약이 성격 속의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한 은유, 모델, 모체였다는 합의에 완전히 동의한다. 따라서 성경 전통 속의 계약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라는 대우주, 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라는 소우주의 종교-정치적이며, 종교-사회적이며, 종교-경제적인 결단이다.
6장. 축복과 저주
130 신명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심지어 놀라운 것은 계약이 지배적이며, 계약은 상벌규정이 지배하고, 상벌규정에서도 저주가 축복보다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신명기에서는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이 분배 정의의 하나님보다 우세하다는 점이다.
141 욥기 3-37장에서 우리는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불량한 신학이 멋진 시로 포장된 것을 듣게 되는데, 그의 친구들은 모두 신명기적 근본주의자들로서, 그의 고통은 분명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며, 그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그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욥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욥기의 독자들은 처음부터 욥의 상황에 대한 그런 신명기적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실제로 하나님은 욥기의 처음(1: 8)과 마지막(42:7) 에서 그런 신명기적 해석을 부정하신다.
7장. 예언과 기도
166 신명기 전통이 예언자 전통과 시편 전통에 영향을 끼진 대가는 성경적 하나님의 성격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천지창조보다는 계약에 더욱 치중하고, 계약의 관심에서는 역사보다 상벌규정에 더욱 치중하며, 상법규경의 관점에서는 축복보다 저주에 훨씬 치중하는 하나님이 되셨다.
168 만일에 이스라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데 삶 전부를 바쳤다면, 그 역사에서 달라졌을 것이라곤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게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지리적 위치에 있는 민족이 군사적으로 패배한 것이 하나님의 처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과 신 모두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이런 사실은 질병과 가뭄, 기근과 심지어 지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시편들이 용서를 부르짖고 자비를 간구하는 외침으로 가득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168 외적의 침입, 내부적인 기근을 비롯해서 온갖 재난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도대체 어떻게(how) 살아내지 못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도대체 어느 곳에서 (where) 살았는가에 따른 인간적 귀결이었다.
8장. 지혜와 하나님 나라
179 지혜는 우리의 타고난 운명을 계시하며, 우리의 타고난 정체성과 더불어 그 권리들과 책임성들을 드러낸다. 지혜를 거절하는 것은 외적인 율법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의 처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성격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적 행동의 귀결을 초래하는 것이다.
제4부 공동체
9장. 이스라엘과 로마의 도전
213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해도, 우리가 이미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요점을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항한 것은 단순히 정복자에 맞서는 피정복자들, 하나의 식민지가 제국에 대항한 일반적 충돌이 결코 아니었다. 대신에 그것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미래적인 황금시대로 선포했던 종말론적 비전과 로마가 선포했던 이미 현재적인 황금시대 사이의 격돌이었다. 정의롭고 평화로우며 비폭력적인 세계가 이스라엘에게는 여전히 미래의 종말이었지만, 로마에게는 이미 현재적인 제국이었다.
10장. 예수와 하나님의 급진성
219 묵시종말론자란 하나님의 세계 대청소에 관한 특별한 신적인 계시를 선포한 예언자이다. 이런 계시 자체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일 수 있으며, 특히 구체적으로 임박한 폭력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에서 긴장상태가 고조되면서, 오직 하나의 문제만 가장 중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도대체 언제 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조만간인가? 지금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아닌가? 다시 말해서, 묵시종말론은 흔히 매우 협소한 의미에서 임박한 종말론 혹은 폭력적 종말론만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219 세례자 요한은 "언제 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했으며, 거부할 수 없는 프로그램을 실천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임박했으며, 그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오직 인간의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27 임박한 나라로부터 이미 현존하는 나라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 개입에서부터 하나님과 인간의 쌍방적인 협력으로 바뀐 것을 필요로 했다.
228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이 곧 도래하실 것으로 예상했지만, 곧 도래한 것은 안티파스 왕이었다. 요한은 죽었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는 아마도 하나님은 개입하시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개입하지 않으시며, 조만간도 아니며, 영원히 개입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과 협력만 있었으며, 앞으로도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과 협력과 참여만 있을 것이다.
228 나는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 개입하시는 나라로부터 협력하는 나라로 ━ 바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나라를 떠안거나 그 안으로 들어갈 때만 도래한다. 그 나라는 쌍방적이며 참여하며 협력하는 나라이며, 계약상의 프로그램이었다. 왜냐하면 그 구성원들 시민들 공동체들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236 문제는 역사적 예수가 최초의 크리스천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예수가 폭력적인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또한 폭력적인 하나님의 폭력적인 아들이 되었다는 점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내가 이미 강조했던 것처럼, 이것은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낡은 대립관계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신앙 모두의 비폭력적 예수 그리스도와 폭력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관계를 밝히는 문제이다.
236 물론 역사적 예수는 성경의 그리스도를 위해 근본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역사적 예수에 기초한 신학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예수 안에 계시되었다. 그리스도교 성경의 규범이 성경의 그리스도라면, 성경의 그리스도의 규범은 역사적 예수이다.
11장. 그리스도와 문명의 정상성
238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6:37)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8:44)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히 비판, 단죄, 용서 없음의 말이다. 이것은 분명히 언어폭력이며, 물리적 폭력은 아니다. 언어폭력은 복음서들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즉 예수가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는가, 아니면 요한이 그의 예수를 바꾸었는가? 이 사례는 그러나 훨씬 더 폭넓은 과정의 본보기일 따름이다. 이것은 비폭력적 예수를 탈급진화시키며, 또한 예수가 문명의 정상성 속에 문화적으로 변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254 그리스도가 이 일을 위해서 사용할 폭력은 로마제국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폭력보다도 훨씬 더 능가하는 폭력이다. 매우 끔찍하고, 또 끔찍하며, 또 끔찍한 역설적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은 돌아오는 네로 황제와 그의 파르티아 군사력을, 돌아오는 그리스도와 그의 천군천사로 대체시켰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최악의 명예훼손이며, 예수에 대한 최악의 중상모략이다. 이것은 또 성령에 대한 최악의 죄이기도 하다.
12장. 로마와 카이사르의 도전
255 여기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거의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즉 비폭력적인 역사적 예수의 주장을 비폭력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계시로 받아들이고 따르라. 예수를 두 단계에 걸쳐 둔갑시킨 것, 즉 우선은 언어폭력을 사용한 인물로 둔갑시키고 그 다음에는 물리적 폭력을 사용할 인물로 둔갑시킨 전복(subversion)을 이해하고 거부하라. 다시 말해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라는 도전에 대해, 나는 이미 그 해결책을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서 찾았다. 만일 성경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 성경의 규범이며 기준이며 분별자라면, 역사적 예수는 성경적 그리스도의 규범이며 기준이며 분별자이다.
13장. 바울과 그리스도의 급진성
298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살인을 자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로마가 크리스천들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로마에 맞서서 대응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점에서 예수뿐 아니라 바울도 악에 대해 크리스천들이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도록 가르친 것은 로마의 핵심적 가치, 즉 폭력적 승리를 통한 평화라는 핵심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로마뿐 아니라 실제로 모든 문명의 정상성에서는, 다른 모든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이처럼 정복당한 사람들보다 정복자가 높으며, 식민지보다는 제국이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는 가치관이다.
14장. 바울과 제국의 정상성
303 바울이 쓴 일곱 개의 진정한 편지들(데살로니가 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저후서, 로마서)은 급진적인 바울을 보여준다. 아마도 바울이 쓰지 않았을 세 개의 편지들(데살로니가 후서, 골로새서, 예배소서)은 첫 번째 탈급진화 과정을 거친 보수적인 바울을 보여준다. 그그리고 분명히 바울이 쓰지 않은 세 개의 편지들(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은 마지막 탈급진화 과정을 보여준다.
320 바울을 이론적인 차원과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의 가르침을 사회적 차원과 실천적 차원에서 따르는 일은 엄청나게 어려웠다. 바울 이전에 예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하기는 쉽지만, 따르기는 어려웠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같은 말이었다. 즉 유대인들의 고향 팔레스타인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가 유대인 디아스포라 전역에서, 로마의 제국신학이라는 모체에 비추어 매우 분명하게 표현한 말이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말이었다.
321 구약성경으로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토라에서 시작해서 예언서를 거쳐 예수와 바울에 이르는 모든 성경의 전승들은 하나님의 급진성이 다시 문명의 정상성 속으로 되돌아가는 똑같은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에필로그: 우리의 밤의 그림자를 뛰어넘기 위해
329 두 가지 사례만 다시 기억해보자. 땅은 팔거나 사는 방식을 통해 영구적으로 취득할 수 없다는 토라의 주장은, 대출과 저당권 상실의 방식을 통해 땅을 취득할 수 있게 전복되었다. 크리스천은 다른 크리스천을 노예로 소유할 수 없다는 바울의 주장 역시 노예를 소유할 수 있지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으로 전복되었다. 그러나 위의 도표와 은유 모두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막다른 골목에 갇혀 있다. 주장과 전복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이나 토라, 예수나 바울이 가르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장과 전복 사이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결국 성경의 하나님은 문명의 정상성을 더욱 선호하시는 것인가?
335 요약하자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한 정답은 이것이다. 성경을 단지 하나의 책으로 읽어 그 의미가 그 결말에 나온다고 예상하지 말고, 성경을 하나의 이미지로 바라보고 그 클라이맥스는 그 중앙에 있다고 예상하라 성경의 말을 읽지만, 성경을 시각적으로 그림을 그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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