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6. 5.
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민음사 |
편집자 서문
하리 할러의 수기
작품 해설
작가 연보
편집자 서문
9 이 책은 〈황야의 이리〉라고 불리던 ─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불렀다 ─ 한 사내가 쓴 수기를 담고 있다. 그의 원고에 설명조의 머리말을 따로 붙일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내에 대한 추억을 써나가자면 아무래도 그의 글에 몇 마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이 사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보잘것없다. 더구나 그의 과거나 신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다. 그렇지만 그의 개성은 나에게 강렬하면서도 호감이 가는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황야의 이리는 쉰 살에 가까운 사내였다. 몇 년 전 어느 날엔가 그가 가구가 딸린 방울 구하러 내 아주머니 댁에 찾아왔다. 그는 다락방과 그 옆에 딸린 침실을 빌리고, 며칠 후 여행 가방 두 개와 큼지막한 책 상자를 들고 와서는 아홉 달인가 열 달인가 우리와 함께 살았다 그는 아주 조용히 외톨이로 지냈다. 그의 방이 내 방과 가까이 붙어 있었던 까닭에 우리는 층계나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지냈울 것이다. 이 사내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처럼 끔찍이 사교성이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정말이지 ─ 점차 그렇게 불리게 되었듯이 ─ 한 마리 황야의 이리였다. 낯설고 거칠고 그러면서도 수줍어하는, 그것도 몹시 수줍어하는 존재,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그가 이러한 기질과 천성 때문에 얼마나 깊은 고독 속에서 살았는지, 또 이 고독을 얼마나 자신의 운명으로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물론 그가 여기 남겨놓은 수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이미 몇 번의 짧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를 어지간히 알고 있던 터라, 이 수기로부터 얻은 그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귀면서 갖게 된 ─ 물론 훨씬 빈약하고, 빈틈이 많은 ─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35 이 수기는 ─ 얼마만큼 현실의 체험이 그 바탕을 이루는지에 상관없이 ─ 거대한 시대의 병을 우회하거나 미화함으로써 넘어서려고 하지 않고, 그 병 자체를 서술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이다. 이 수기는 말 그대로 지옥의 순례이다. 지옥을 가로질러 가며 카오스에 맞서고 악의 고통을 끝까지 맛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칠혹같이 컴컴한 영혼의 세계를 때로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용기 있게 통과하는 것이다.
내가 이 수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 것은 할러의 말 한마디였다. 언젠가 우리가 이른바 중세의 〈끔찍스러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는 말했다. 「그런 끔찍스러움은 사실은 끔찍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중세인이라면 우리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들의 생활 양식 전체를 끔찍하고 경악스럽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혐오할 겁니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 모든 도덕과 전통은 나름의 양식을 가지고 있고, 자기에게 맞는 부드러움과 강고함을, 아름다움과 끔찍함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어떤 악은 참고 견디는 법입니다. 인간의 삶이 정말로 고통으로, 지옥으로 변하는 건 두 시대, 두 문화, 두 종교가 서로 교차할 때뿐입니다. 어떤 고대인이 중세에 살았어야 했다면, 그는 그것 때문에 애처로우리 만치 숨막혀 했을 겁니다. 그건 한 야만인이 우리의 문명 한가운데에서 숨막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꼭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은 한 세대 전체가 두 시대 사이에, 두 개의 생활 양식 사이에 끼여, 어떠한 자명한 이치도, 도덕도, 어떠한 안정감이나 순수함도 상실해 버린 시대입니다. 물론 너나할 것 없이 이것을 똑같은 강도로 느끼는 건 아니겠지요. 가령 니체 같은 사람은 오늘날의 고뇌를 한 세대 이상이나 앞서 체험해야 했지요.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이 고뇌를 고독하게 곱씹어야 했지만, 오늘날엔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체험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수기를 읽으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할러는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는 자였고, 일체의 안정감과 순수함을 상실한 자였다. 인간의 삶이 지닌 모든 문제를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과 지옥으로 승화시켜 체험하는 것 ─ 이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의 수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는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수기를 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덧붙여 말하거니와 나는 추호도 이 글을 변호하거나 폄하할 생각이 없다. 독자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리 할러의 수기
37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지나갔다. 나는 내 나름의 거칠고 소심한 생활 방식대로 숫처녀를 유혹하여 슬그머니 목을 조르듯이 그날도 그렇게 죽여버린 것이다. 서너 시간 일을 하고, 고서들을 뒤적였더니,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두 시간 정도 온몸이 쑤셔왔다. 가루약을 먹으니 통증이 사라져 다 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더운 탕에 들어가 기분 좋게 온기를 들이 마시고, 우편물 세 개를 받아 이 대수롭지 않은 편지와 인쇄물들을 대충 훑어보고 나서 심호흡을 했다. 좀 쉬려고 오늘 명상 연습은 생략하기로 했다. 한 시간가량 산책을 하면서 부드럽고 화사한 새털구름이 흩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상쾌했다. 고서를 읽거나 온탕 속에 누워 있을 때 느끼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그날이 딱히 황홀했다거나,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찼던 건 아니었다. 그저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해진 일상적인 나날 중 하루였을 뿐이다. 불평 많은 한 중년 남자의 하루, 적당히 편안하고, 어렵사리 견딜 만하고, 그럭저럭 지낼 만한, 그런 미지근한 나날 중 하루였다. 특별한 고통이나 걱정도, 별난 근심이나 절망도 없는 그런 날,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예를 쫓아 면도를 하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기에 알맞은 때가 아닌가 하는 그런 문제에도 흥분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황야의 이리론 ─ 미친 사람만볼 것
59 언젠가 〈황야의 이리〉라고 불리던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리였다. 그는 두 발로 걷고 옷을 입은 인간이었지만 본래는 한 마리 황야의 이리였다. 그는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엄청나게 똑똑한 사내였다. 그러나 그가 배우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건 자신과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불만투성이 인간이었다. 그가 그렇게 된 건, 마음 저 아래에서는 자신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황야에서 온 이리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기 ─ 혹은 의식하고 있다고 믿기 ─ 때문이었다. 그가 정말 이리였는지, 그가 한때, 아마도 태어나기도 전에 마술로 이리에서 인간으로 변신한 것인지, 혹은 그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황야의 이리의 영혼을 타고나서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 혹은 그가 원래부터 이리라는 이러한 믿음이 그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인지, 아니면 그의 병적인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영리한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논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이 인간이 어린 시절에 거칠고 제멋대로이고 게을러서 그의 선생님들이 그의 내면에 있는 야수를 죽이려고 했고,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자기가 사실은 본래 야수인데 교육과 인성이라는 얇은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라고 상상하고 믿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선 오랫동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할 수도 심지어 책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야의 이리에 관한 한 이런 따위는 쓸데없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정작 그에게는, 이리가 요술에 의해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왔든, 혹은 강압에 못 이겨 들어왔든, 아니면 그저 그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자신은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것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이 이리를 그의 내부에서 끄집어낼 수는 없을 테니까.
88 인간이란 이미 창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요구이며, 그 실현을 갈구하면서도 또 겁내는 하나의 먼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가는 도정은 언제나 무서운 고통과 무아경 속에서 그저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 길을 가는 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고 그들에게는 오늘은 단두대가 내일은 기념비가 마련될 것이다. 이러한 예감이 황야의 이리의 마음속에도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리〉와 대립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시민적 관습에서 말하는 바로 저 범용한 〈인간〉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인간에 이르는 길, 불멸에 이르는 길을 하리는 분명 예감할 수 있고, 또한 때때로 주저하면서도 그 길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그 대가로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고통스런 외로움을 겪지만, 하리는 하나뿐인 불멸로의 좁은 길을 가라는 저 지고의 요구와, 정신이 추구하는 저 진정한 인간됨을 긍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이 보다 더 큰 고뇌와 추방과 최후의 포기로, 어쩌면 단두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충분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89 어쨌든 우리의 황야의 이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적어도 파우스트적 이원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육신의 통일성에는 정신의 통일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기껏해야 이러한 조화의 이상으로 가는 긴 순례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면에 있는 이리를 극복하고 완전히 인간이 되거나, 아니면 인간을 포기하고 최소한 이리로서 분열되지 않은 통일적인 삶을 살고 싶어한다. 추측건대 그는 한 번도 진짜 이리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92 이런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황야의 이리〉라든가 〈두 개의 영혼〉이라든가 하는 말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시민 사회에 대해 그렇게 소심한 사랑을 느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하고 슬픈 일이다. 부처를 이해하고 인간성의 극락과 지옥을 예감하는 사람이라면 상식과 민주주의와 시민적 교양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아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이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은 소심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차원이 점점 높아져 자그마한 시민의 다락방이 너무 좁게 느껴지면, 그는 그것을 〈이리〉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이리가 때로는 그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자기 내면에 있는 거친 것은 모두 이리라고 부르고, 그것을 심술궂고 위험한, 시민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섬세한 감각을 지닌 예술가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자기 내면에는 이리 뒤에 다른 많은 것들도 살고 있다는 것, 물어뜯는 것이 다 이리가 아니고, 여우나 용, 호랑이, 원숭이, 극락조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또한 그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인간이 거짓 인간인 시민에 억눌려 있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것과 겁나는 것, 큰 것과 작은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등 여러 가지 형상들로 이루어진 이 온 세상, 이 천국의 정원 전체가 이리의 동화에 억눌려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한다.
93 그는 〈인간〉이나 〈이리〉라는 부류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인간〉 쪽으로 셈해 넣지 않는가! 소심한 것, 원숭이 같은 것, 어리석은 것, 하잘것없는 것 모두를, 그것이 이리에 속하지 않는다 하여 〈인간〉 쪽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건 그가 강한 것, 숭고한 것 일체를 그저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리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하리와 작별하고 그가 홀로, 자기 길을 걷게 하자. 그가 이미 불멸의 인물의 반열에 들어서 있고, 그가 걷는 험난한 길의 목적지에 이미 당도해 있다면, 어떻게 그가 이렇게 갈팡질팡하며 선뜻 결심하지 못하고 거칠게 동요하는 그의 인생 행로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그가 이 황야의 이리에게 용기를 주듯, 꾸짖듯, 동정하듯, 놀리듯 미소를 보낼 것인가!
307 나는 이빨을 악물고 조용히 물었다. 「제가 요구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면 어쩌겠습니까? 모차르트 씨, 황야의 이리에게 지시하고 그의 운명에 개입할 권리가 당신에게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모차르트가 친근하게 말했다. 「내 기가 막힌 담배나 한 대 피우라고 청하겠네」 이렇게 말하면서 그가 요술을 부리듯 조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내게 건네주는 동안 그는 어느새 더 이상 모차르트가 아니었다. 그의 검고 이국적인 눈이 따스하게 빛났다. 그는 내 친구 파블로였다. 그는 또한 나에게 장기말 놀이를 가르쳐준 그 사내와 쌍둥이 형제처럼 닮아 보였다. 「파블로!」 나는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쳤다 「파블로,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건가?」 파블로는 내게 담배와 불을 주었다. 「나의 마술 극장에 와 있는 겁니다」 그는 빙긋이 웃었다. 「당신이 탱고를 배우고 싶든, 장군이 되고 싶든, 아니면 알렉산더 대왕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든, 그것은 우선은 모두 당신 마음대로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하리씨, 당신은 나를 적지 않게 실망시켰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까맣게 잊었어요. 당신은 내 작은 극장의 유머를 깨뜨리고 추한 짓을 했습니다. 칼로 사람을 찔러 우리의 멋진 가상의 세계를 현실의 얼룩으로 더럽혔습니다. 당신은 잘못을 저질렀어요. 당신이 헤르미네와 내가 거기 누워있는 걸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질투에서 나온 행동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이 장기말을 다루는 법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는 당신이 그 놀이를 잘 배웠다고 믿었습니다. 이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는 어느새 손가락 사이에서 장기말로 작아져 있는 헤르미네를 집어들고 조금 전에 담배를 꺼냈던 그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달콤하고 짙은 담배 연기가 좋은 냄새를 풍겼다. 나는 온몸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한 일 년쯤 푹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오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파블로를 이해했고, 모차르트를 이해했다. 나는 어딘가 등 뒤에서 그의 무서운 웃음소리를 들었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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