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1


내 이름은 빨강 1 - 10점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1. 나는 죽은 몸

2. 내 이름은 카라

3. 나는 개입니다

4.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5.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6. 나는 오르한

7. 내 이름은 카라

8. 저는 에스테르랍니다

9. 나는, 셰큐레

10. 저는 한 그루 나무입니다

11. 내 이름은 카라

12. 나를 나비라 부른다

13. 나를 황새라 부른다

14. 나를올리브라 부른다

15. 저는 에스테르랍니다

16. 나는, 셰큐레

17.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18.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19. 저는 금화올시다

20. 내 이름은 카라

21.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22. 내 이름은 카라

23.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24. 나는 죽음이다

25. 저는 에스테르랍니다

26. 나는, 셰큐레

27. 내 이름은 카라

28.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29.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30. 나는, 셰큐레

31. 내 이름은 빨강

32. 나는, 셰큐레

33. 내 이름은 카라





1. 나는 죽은 몸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자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숨소리를 들어보고 맥박까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더니 우물로 끌고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미 돌에 맞아 깨져 있던 내 머리는 우물 바닥에 부딪히면서 산산조각이 났고, 얼굴과 이마, 볼도 뭉개져 형태를 분간할 수 없다. 뼈들도 부서졌고 입안엔 피가 가득하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 나흘째다. 아내와 아이들이 날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다. 울다 울다 지친 딸애는 넋을 잃은 채 대문만 쳐다보고 있을테고, 다른 식구들도 모두 목을 빼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나를 기다리고들 있을까? 어쩌면 벌써, 나의 부재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여기 이렇게 누워 있으니 내가 두고 온 삶이 아무 일도 없는 듯 계속되고 있으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무한한 시간이 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시간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무궁한 암혹과 암흑사이에서, 잠시 빛을 발하며 살았을 뿐이다.


나는 행복했다. 아니, 지금에서야 내가 행복했던 줄을 알겠다. 나는 술탄의 화원에 속한 화가들 가운데 가장 멋지게 그림을 장식했다. 그림 장식에서 나를 따를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술탄의 화원에서 일하는 것 말고 바깥에서도 일을해 매달 900 악체씩이나 벌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여기 이렇게 죽어 누워 있는 것이 더욱 분통하다.


나는 그림도 그리고 책장식도 했다. 페이지의 여백과 테두리에 형형색색의 잎사귀와 나뭇가지, 꽃과 새를 그려 넣어 장식하는 일이었다. 구불거리는 중국풍의 구름, 서로 껴안고 있는 잎사귀들, 여러 가지 색의 숲과 숲 속에 숨어 있는 영양들, 술탄들, 나무들, 궁전들, 말들, 사냥꾼들…… 젊었을 때는 접시에도 그림을 그렸다. 때로는 거울 뒷면과 나무 수저에도, 그리고 보스포루스 해안에 있는 별장과 저택의 천장, 궤짝의 겉면에도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일에는 손대지 않고 책 장식만 했다. 술탄이 보수를 넉넉히 주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일로 돈을 벌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죽어 보니 인생에서 돈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살아있지 않아도 돈은 여전히 중요하다.


죽은 자가 말을 하는 이 기적을 보면서,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살아 있을 때 얼마를 벌었다는 따위의 얘길랑 그만두고 거기서 뭘 보았는지나 말해 보게. 사후 세계란 게 정말 있나? 자네 혼은 어디 있지? 천국과 지옥은 어떻던가? 거기서 뭘 봤어? 죽어 있는 기분은어떤지, 아프지는 않은지 애기해 보게!" 그렇다. 산자들은 당연히 저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시체들 사이를 누빈 사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부상자들 가운데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저세상의 비밀을 캐내려 했다. 그러다가 티무르 병사의 칼에 두 동강이 난 그는 저세상에서는 사람이 둘로 나누어 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웃기는 얘기다! 오히려 세상에서 둘로 나누어졌던 영혼이 이곳에서 합쳐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악마의 힘에 굴복한 불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하늘이 도우사, 바로 그곳에서 내가 당신들에게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게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죽었지만 당신들이 보는 바와 같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스러운 코란에 나오는, 금과 은으로 지은 천상의 저택 주위로 흐르는 시내나, 탐스러운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활엽수와 아름다운 처녀들은 보지 못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살아 있을 때 나는 코란 제56장 「와키야」에 나오는 그 커다란 눈을 가진 천상의 처녀들을 즐겨 그렸다. 코란뿐만 아니라 이븐 알 아라비 같은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묘사한 우유와 포도주, 꿀물이 흐르는 시내도 역시 보지 못했다. 물론 저세상에 대한 희망과 환상을 품고 사는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은 까닭에 내 이야기는 전적으로 나의 특별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사후 세계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신자라면 나처럼 죽은 뒤에도 안식을 찾지 못한자의 눈에 천국의 시냇물이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각설하고, 화가들 사이에서 '엘레강스'라고 불리던 나는 지금 시체가 되어 묘에 묻히지도 못한 채 버려졌고, 그래서 내 영혼은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 못했다. 내 영혼이 지옥에든 천국에든 다다를 수 있으려면 먼저 육신이 이 더러운 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여느 사람들에게도 간혹 일어나는 이 예외적인 상황은 내 영혼에 끔찍한 고통을 주고 있다. 산산이 부서진 머리통과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잠긴 채 상처투성이로 썩어 가는 몸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육체를 떠나려 몸부림치는 영혼의 깊은 고통은 또렷이 느낄 수 있다. 마치 세계 전체가 내 몸 안의 어떤 곳에 끼어 움츠러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수축의 느낌을 나로서는 죽는 순간에 느꼈던 놀랍도록 뻥 뚫리는 듯한 느낌과 비교할 수밖에 없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격의 순간, 누군가가 돌로 내 머리를 내리쳐 두개골이 깨질 때, 그놈이 날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아챘지만 정말로 죽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궁정 화원과 집 만을 오가던 생기 없는 삶 속에서는 내가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 열 손가락과 열 손톱, 그리고 악착같이 살인자를 물고 늘어졌던 내 이를 총동원해 열정적으로 생에 매달렸다. 하지만 머리를 울리던 그 연이은 타격의 고통을 일일이 떠올려서 당신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 ·


내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척 슬프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슴이 행하니 뚫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생을 떠나오는 순간, 뭔가가 팽창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이쪽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꿈속에서 잠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본 것은 눈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비열한 살인자의 신발이었다. 나는 잠들 듯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짜릿한 느낌을 맛보며 이쪽으로 옮겨왔다. 


지금 내가 투덜거리는 까닭은 홀랑 빠진 이들이 피범벅이 된 입속에서 석류 알처럼 뒹굴고 있어서도 아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얼굴 때문도 아니며, 버려진 우물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서도 아니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내가 살아 있을거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떠올리면서 내가 이스탄불 어느 구석에선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거나 아니면 여자들 꽁무니나 쫓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내 불안한 영혼을 한층 아프게 한다. 하루빨리 내 시체를 찾아 장례를 치르고 묘에 묻어 주었으면 한다, 제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날 죽인 살인자를 찾는 일이다! 그 비열한 살인자를 잡지 못하면 아무리 호화로운 무덤에 나를 묻어 준다 해도, 그 속에서 여전히 안식을 찾지 못한 채 기다릴테고, 당신들에게 불신앙을 전염시키리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당신이 나를 죽인 그 후레자식을 찾아낸다면 당신에게 저세상에서 본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겠다! 살인자는 물론 주리를 틀어 고문을 하고 몸의 뼈란 뼈는 모조리, 특히 갈비뼈는 반드시, 마디마다 똑똑 분지르고, 고문용 꼬챙이로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그 더럽고 기름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뽑을 때마다 놈이 고통으로 꽥꽥 팩비명을 지르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나를 이토록 고통스러운 지경에 처하게 한 살인자는 과연 누구이며, 어째서 뜬금없이 나를 죽였을까? 당신이 살인자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세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질 살인자들이 가득하다는 식으로 간단히 넘겨 버리지 마라. 당신이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한 가지 사실을 미리 알려 주겠다. 나의 죽음은 우리 종교와 전통 그리고 세계관을 부정하는, 섬뜩한 비밀 결사와 연루되어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이슬람과 당신이 믿고 살아가는 삶을 파괴하려는 적들이 왜 나를 죽이고 어느 날인가 당신도 죽일 수 있는지 알아내 보라. 언제나 벅찬 감동으로 눈물 흘리며 들었던 에르주룸 출신의 위대한 호자 누스랫의 설교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만약 내가 겪은 일을 책으로 쓴다면 제 아무리 세밀화의 거장이라도 결코 그 내용을 모두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코란처럼(부디 당신들이 내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이 책의 가공할 힘은 어떤 그림으로도 충분히 그려 낼 수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과연 내 말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걱정스럽다.


화원의 도제 시절 나는 심연에 감춰진 진실과 저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걸 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나의 최후는 이 빌어먹을 우물 바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물론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두 눈을 크게 뜨고 늘 경계하라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이라곤 내 몸이 썩어 악취가 진동하게 되면 누군자가 나를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를 죽인 살인자가 잡혔을 때 어느 자비로운 이가 그에게 가할 고문을 상상하는 일밖에는.



31. 내 이름은 빨강

『왕서』의 저자 페르도우시가 가즈니에서 마흐뭇 왕의 궁정 시인들에게 촌놈이라고 무시당한 후, 첫 3행의 각운을 맞추기가 너무나 어려워서 아무도 완성하지 못했던 4행시의 마지막 구절을 읊었을 때 나는 페르도우시의 카프탄 위에 있었다. 『왕서』의 전설적인 주인공 뤼스템이 사라진 말을 찾으러 먼 나라에 갔을 때는 그의 화살집 위에, 전설적인 거인을 멋진 검으로 두 동강 냈을 때는 거인의 낭자한 피 속에, 뤼스템이 머물던 궁전에서 아름다운 공주와 사랑을 나누며 밤을 보낼 때는 그들이 덮었던 이불의 구김살 사이에 있었다. 나는 어디에나 있었고 지금도 어디에나 있다. 투르가 동생 이레치의 목을 야만적으로 내리쳤을 때 꿈 같은 장관을 이룬 전설적인 군대가 초원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일사병에 걸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름다운 코에서 반짝이는 피가 흘러내릴 때 나는 거기 있었다. 요일마다 먼 나라에서 온 각기 다른 미녀와 각기 다른 빛깔의 돔 아래에서 밤을 보내며 그녀들이 해 주는 이야기를 듣던 사산 왕조의 샤 베흐람 귀르가 그림을 보고 사랑에 빠진, 화요일의 미녀의 옷자락에도 나는 있었다. 쉬린이 그립을 보고 사랑에 빠져 버린 휘스레브의 왕관과 카프탄에도 나는 있었다. 성을 에워싼 군대의 깃발에, 만찬의 식탁보에, 술탄의 발에 입을 맞추는 대사들의 벨벳 카프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칼에도 있었다. 우색산 카펫, 벽 장식, 미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창문 틈으로 거리를 구경할 때 입고 있던 블라우스, 싸움닭의 볏, 전설의 나라에서 자라는 전설의 과일과 석류, 악마의 입, 액자 테두리의 가느다란 선, 천막의 구불거리는 장식들, 세밀화가의 취향에 따라 그려진 맨 눈으로는 겨우 볼 수 있는 꽃들, 설탕으로 만든 새 조각과 버찌로 만든 새의 눈들, 목동의 양말, 전설에 등장하는 새벽과 수천수만의 전사들, 왕과 그의 애첩들의 시체와 상처를 표현하려고 하는 잘생긴 견습생과 장인들의 눈길을 받으며 나는 인도와 부하라에서 온 두꺼운 종이 위에 가는 붓으로 칠해졌다. 피가 꽃처럼 피어나는 전쟁터에, 미소년들과 시인들이 들판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때는 가장 훌륭한 시인의 카프탄 자락에, 천사들의 날개와 여자들의 입술에, 시체들의 상처에, 그리고 목이 잘려 피투성이가 된 머리에 칠해지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당신들이 던지는 질문을 들었다. 색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색은 눈 길의 스침, 귀머거리의 음악, 어둠 속의 단어 한 개다. 수천 년 동안 책에서 책으로, 물건에서 물건으로 바람처럼 옮겨 다니며 영혼의 말소리를 들은 나는, 내가 스쳐 지나간 모양이 천사들의 스침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걷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입을 다물고, 내가 얼마나 멋진 빨강인지 한번 들어 보라. 색을 아는 세밀화가는 인도의 가장 더운 지역에서 온, 최상품의 말린 빨간색 벌레를 절구에 찧어 고운 가루로 만든 뒤, 이 빨간가루 5 디리헴, 비누풀 1 디리헴, 그리고 로토르 1/2 디리헴을 준비한다. 물 3 오카를 냄비에 담아 비누풀을 넣고 끓인 뒤, 로토르를 물에 넣고 잘 짓는다. 그리고 맛 좋은 커피를 한 잔 마실 동안만큼 끓인다. 그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잠시 후면 태어날 아기처럼 안달한다. 커피가 세밀화가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그의 눈이 반짝반짝해지면 빨간 가루를 냄비에 넣고, 나를 만들 때에만 사용하는 가늘고 깨끗한 꼬챙이로 잘 저어 섞는다. 이제 곧 나는 진짜 빨강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농도다. 물을 끓이되 너무 오래 끓여서도 안된다. 꼬챙이 끝으로 그물을 떠서 엄지(다른 손가락은 절대 안 된다!) 손톱에 발라 본다. 아, 빨강이 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손톱이 붉은색으로 물든다. 그런데 농도는 좋지만 찌꺼기가 있군 냄비를 화로에서 내리고 나를 깨끗한 천에 부어 거른다. 이제 나는 한층 맑아진다. 그리고 다시 냄비에 부어 불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두 번을 더 끓여서 거품을 내고, 약간 빻은 백반을 넣어 찬 곳에서 식힌다.


며칠 동안 나는 냄비 안에서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채 줄곧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모든 책장, 모든 장소, 모든 물건에 칠해질 것을 상상하고는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정적 속에서 빨강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언젠가 페르시아의 한 도시에서, 어느 장님 세밀화가가 기억으로 그린 말 그림 속, 안장 덮개의 장식 그림에 색을 칠하고 있는 견습생 앞에서 장님 세밀화가 두 명이 논쟁을 벌였다. 

"평생 신념을 갖고 열심히 일한 결과, 자연스럽게 장님이 되는 우리 세밀화가는 빨강이 어떤 색이고, 어떤 느낌인지를 알고 기억하지. 그런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다면 지금이 견습생이 칠하고 있는 빨강을 어떻게 알 수 있겠나?"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세밀화가의 물음에 다른 세밀화가가 대답했다. 

"훌륭한 의견이요. 그렇지만 색이란 아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지." 

"그렇다면 자네는 한 번도 빨간색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빨강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손가락 끝으로 만져 보면 그 느낌이 철과 동의 중간쯤 되지.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뜨거울테고. 손으로 쥐어 보면 소금기가 아직 남아 있는 물고기처럼 느껴지겠지. 입에 넣으면 입안이 꽉 찰테고, 냄새를 맡으면 말 냄새가 나겠지. 꽃의 향기로 치면 붉은 장미보다는 국화 향기와 비슷할 걸세." 


110년 전의 베네치아의 예술가들은 우리의 전설적인 장인들이 신을 믿었듯이 자신들의 화풍을 믿었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검에 베인 대수롭지 않은 상처를 표현할 때나, 혹은 평범한 마포에 그림을 그릴 때 다양한 톤의 빨강을 사용하는 것을 일종의 불명예, 혹은 저속한 것으로 여겼다. 결단력과 의지가 모자라는 화가들이나 카프탄을 칠할 때 다양한 톤의 빨간색을 쓴다고 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을 표현한 거라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빨강은 단 한가지 색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빨강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억에 의지해 말을 그리는 장님 세밀화가가 물었다.

"색의 의미는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우리가 본다는 것을 뜻하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빨강을 설명할 수 없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이 단자, 불신자들은 신을 부정하고자 할 때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네."

“그러나 신은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네. 그래서 코란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같지 않다고 쓰여 있지."

그 순간에도 견습생은 말의 안장 덮개를 천천히 나로 칠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의 검고 흰 부분을 나의 충만함과 힘 그리고 생동감으로 채우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붓이 나를 종이에 퍼지게 할 때는 온 몸이 근질거리듯 즐거웠다. 이렇게 내가 칠해지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되라!"라고 하자 마자 세상이 온통 나의 핏빛 색으로 물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를 보지 않은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 만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