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6. 24.
죽음 앞의 인간 - 필립 아리에스 지음, 고선일 옮김/새물결 |
Ⅰ 횡와상의 시대
머리말
1부 우리는 모두 죽는다
2부 자신의 죽음
Ⅱ 야성화된 죽음
3부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4부 타인의 죽음
5부 역전된 죽음
결론
네 개의 주제에 의한 다섯 가지 변주
주
찾아보기
Ⅰ 횡와상의 시대
1부 우리는 모두 죽는다
1 인간과 친숙한 죽음
49 죽음이 예고된다는 믿음은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오랫동안 대중의 정서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평소 죽음과 일반 서민들의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톨스토이는 그것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어느 시
골 역사, 임종을 눈앞에 두고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그런데 러시아의 농민들은 어떻게 죽어갔을까?" 러시아의 농민들도 기사 롤랑이나 스폴레토의 마귀 들린 처녀, 또는 나르본의 수도사처럼 죽어갔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여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50 죽음이 사전에 예고된다는 것은 급작스럽게 들이닥치지 않음을 의미했다. 죽음이 예고되지 않을 때 그것은 두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좋든 싫든 인정하고 기다려야 하는 필연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이 경우 죽음은 신의 노여움을 가장한 운명의 부조리한 도구가 되어 세상의 질서를 깨뜨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급사는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64 일상성 혹은 단순성이 죽음의 가장 본질적인 두 성격 중하나라면 나머지 하나는 공개성으로 이는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죽어가는 자는 군중의 한가운데 있어야 했다. 몽테스팡 부인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홀로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65 사람들은 이렇게 만인이 참석한 가운데 죽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홀로 죽는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좀 더 심오한 뜻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에 육체적으로는 결코 혼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원 침실에서 고독하게 죽어 가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오늘날에는 그저 평범한 의미를 담고 있을 뿐이다.
70 이 유대인 여인 가자가 원색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한 말은 축제 날 드넓은 초원에서 춤에 도취되어 삶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외침이기도 하고, 그날그날을 살아갈 뿐 앞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항상 대비하고 계획해야 된다는 생각이며, 세계를 합리적이고 의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71 죽음이 절대적인 부정이며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심연 앞에서의 단절이라는 사고는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혼돈이나 실존적인 번민 따위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예 죽음에 대한 일반화된 인식에 그러한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한편, 죽은 다음에도 현세에서의 삶이 계속될 뿐이라는 내세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롤랑과 올리비에가 서로 주고받는 장중한 마지막 인사에서도 다음 세상에서의 재회에 관한 암시는 전혀 없다. 애도 기간이 지나면 죽은 자는 곧바로 잊혀졌다. 죽음이란 다른 곳으로 건너감을 뜻했다.
82 여기서 그 친숙한 죽음을 길들여진 죽음이라 부른 것은 죽음이 예전에는 야생 상태에 있다가 그 뒤에 인간의 손에 의해 길들여 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 전과는 달리 오늘날 야만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죽음은 길들여져 있었다.
2 성인 곁 매장, 교회 내 매장
83 죽은 자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 서로 접근하던 시대, 다시 말해서 묘지들이 사람들이 사는 도시나 마을 내부로 침투하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 간의 상호 인접이 더 이상 용인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라지게 된다.
86 그런데 어떻게 고대 사회의 거부감에서 새로운 친근감으로 그렇게 급속도로 상황이 전이되었을까? 그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초기 순교자들 및 그들의 무덤에 대한 숭배 관행과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89 보다 합리적인 성직자 저술가들이 했듯이 해체된 육신을 다시 결집시킬 수도 있다는 믿음을 주지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초기 몇 세기 동안 이들은 신도들이 갖고 있던 대중적 믿음을 타파할 수 없었다. 대중들은 존재의 단일성과 연속성을 굳게 믿고 있어서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또 물질적인 육신으로부터 영광스런 육신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104 성인들의 유해 또는 그 유해들 위에 세워진 성당 주변으로 죽은 자들을 모아 놓았던 것은 그리스도교 문명의 고유한 특징이 되었다. 16 세기의 한 저술가는 "묘지가 단순한 분묘 혹은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서 안식하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신성한 장소"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묘지가 불순하고 고립된 장소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뭇사람들이 드나드는 신성한 장소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39 묘지는 고대 로마의 포룸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오로지 죽은 자들에게 한정된 공간이 되었지만, 중세로부터 17세기까지 묘지는 동시에 공공장소라는 개념과도 상응하고 있었다. 묘지라는 말에 담겨 있던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만이 17세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152 시장이나 다름없던 장소, 온갖 종류의 공고와 경매, 법령이 공포되고 판결이 선고되던 장소, 지역 사회의 회합 장소, 산책과 놀이 그리고 매춘과 협잡의 장으로서의 묘지는 한 마디로 그랑 플라스, 즉 큰 광장이었다.
185 분묘 형태가 어떠했는지 다음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좁은 공간에, 특히 야외에 위치한 묘지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묘지 기능을 했던 교회 내부에 시신들을 쌓아 올렸다. 둘째, 육탈된 인골들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다시 말해 시신을 매장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땅을 파고 뼈를 추려내어 납골당으로 옮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죽은 지들이 존재하는 장소는 늘 산 자들로 북적였으며, 따라서 이곳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2부 자신의 죽음
3 죽음의 순간, 삶의 기억
191 흔히 중세 사회를 교회의 지배에 예속되어 있었던 세계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여러 종류의 이단이나 원시적 자연주의를 통해 교회에 저항하던 사회로 상상한다. 그 시대에 세계가 교회의 그늘에서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에 절대적이고 완벽하게 예속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공통 언어, 즉 단일한 소통과 이해의 체계를 인정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인간 존재의 심층으로부터 발원하는 욕망과 환상들이 하나의 기호 체계로 표현되었으며, 그 기호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어휘 체계에 의해 제공되었던 것이다. 각 시대는 본능적으로 어떤 특정 기호 체계를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기호들이 그 시대의 집단적인 행동 양식에 내재된 심층적인 경향들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3 중세 초기의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던 것이다. 즉 이들이 갖고 있었던 종말 개념은 묵시록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며, 마태오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극적인 장면은 무시되고 있다.
208 곧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삶이 단 한 순간에 파악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순간이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사후 어느 한 시점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 순간은 초기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보아 세계 종말의 순간으로 유예된 것이다. 천년지복설의 신봉지들이 머지않아 곧 도래하리라고 믿고 있었던 바로 그 세상의 종말 말이다. 여기서도 한 인간 존재의 끝을 육체적인 소멸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뿌리 깊은 사고가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삶을 연장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상상했다. 그것이 늘 축복받은 지들의 영생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의 죽음과 삶의 최종적인 결말 사이에 중간자적인 공간을 마련할 수는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209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분리시킴으로써 또 다른 결과가 나타났는데, 이는 한층 뚜렷한 것이었다. 삶의 최종적인 종결로서의 최후의 심판과 육체적인 죽음 사이에 놓여 있었던 간격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간격이 존재하는 한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 아니었으며, 삶에 대한 결산도 얼마간 미결 상태 로 남아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죽은 자 역시 어둠 속에서나마 반쯤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반생반사의 상태인 망자는 언제든지 '되돌아와서는' 지상의 인간들에게 자기에게 필요한 도움, 즉 미사나 기도를 요청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축복받은 중재자들 또는 독실한 신도들이 필요한 경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유예 기간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또한 생전에 이루어 놓은 자선 행위 들이 다시 알려지는데 필요한 시간이 부여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불멸하는 영혼의 운명은 육체적인 죽음을 맞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상의 세계에 때때로 출몰하여 요구하는 망령들의 입지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반면에 오랫동안 학자, 신학자 또는 시인들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었던 기다림의 장소로서의 연옥에 대한 믿음이 점점 대중화되었고, 결국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수면과 휴식에 관련된 오래된 이미지들을 대치하기에 이른다.
250 마카브르라는 주제는 높은 사망률과 급격한 경제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이 느꼈던 죽음에 대한 매우 강렬한 경험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영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일반인들로 하여금 현세를 무시하고 개종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설교사들이 사용하던 수단만도 아니었다. 죽음과 부패 과정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죽음 또는 내세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이것들이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오히려 현세에 대한 열정적인 애착과 더불어 모든 인간의 삶이 결국 도달하게 마련인 실패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을 나타내던 기호였다.
252 아바리티아란 축적하려는 욕망 혹은 소비에 대한 혐오, 즉 오늘날의 avarice(인색함을 뜻한다)와 동의어가 아니라 삶 그 자체, 또는 사물과 인간 존재들, 오늘날에 이르러 무한한 애착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탐욕스럽고도 열정적인 애정을 말한다. 아바리티아란 "현세적 세속적인 것과 외적인 사물들 배우자, 또는 이 세상에서의 친구들 또는 물질적인 부, 일생 동안 지나치게 사랑하던 모든 사물들에 대한 과도한 애착"인 것이다.
266 죽음과 개인성 간의 관계 중 마지막 단계, 즉 12세기에 시작되어 15세기에 전후무후한 절정기를 맞았던 그 느린 움직임의 최종 시점에 마카브르의 죽음을 위치시킬 때, 이 마카브르의 죽음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4 내세에 대한 보증
280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의 구원을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중개라는 것이 왜 존재했을까? 1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죽은 자들은 모두 구원된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즉시 천국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순교 성인과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낸 신도들만이 우선적으로 죽음 직후에 지복직관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품은 천국이나 지옥이 아니라 로마의 교회법에서 말하는 레프리제리움이며 , 이곳에서 의인들의 영혼은 세상이 끝나는 날에 이루어질 부활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89 산 지들의 개입은 죽은 자들이 즉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절대적으로 악한 자들과 절대적으로 선한 자들은 사후에 영벌의 불길이 아니라 연옥의 불길에 내맡겨진다는 사고가 형성되는 데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것이 연옥이라는 사고와 단어가 출현한 배경이다.
349 12 세기에 일상적인 관습으로 정착되면서 유언장은 고대 로마 사회, 그리고 먼 훗날 18세기 말에 나타난 유형 다시 말해 단지 재산 상속을 규정하기 위한 목적을 띤 사법 행위로서의 유언장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극빈층에게까지 부과하던 종교적 행위였다.
350 신도들은 생을 마감할 때 공문서를 통해 신앙 고백을 하고 죄를 인정하고 속죄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유언장 집행자로서 죄인의 사면을 관장하고 유산 중 일부를 교회 재산과 영적인 금고를 불리는 데 쓰일 장례 십일조로서 징수했다.
352 중세 때 죽어가는 자들 앞에는 양자택일만이 놓여 있었다. 교회와 그리스도교 전통이 주창하는 것처럼 사람과 사물들, 즉 현세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고수하고 영혼을 파멸로 이르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인가, 즉 temporalia aut aeterna['한갓된 것들 또는 영원한 것들'의 뜻]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주어진 것이다.
353 따라서 유언장은 템포랄리아 temporalia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아이테르나 aeterna를 얻을 수 있고, 또한 현세에서 축적한 재산을 구원을 위한 자선 행위와 결부시킬 수 있게 하는 종교적인 수단이었으며 준성사에 버금가는 행위였다.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교회를 매개로 유한한 인간과 신 사이에 체결된 보험 계약서였다. 이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계약으로 '천국으로 가기 위한 여권'이라는 자크 르 고프의 표현에 잘 나타나 있듯이 유언장에는 우선 천상의 재산을 보장받으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보험금은 종교적인 증여를 통해 지상의 통화로 지불해야 함은 당연했다.
364 이렇게 종교적 행위로서의 유언의 기본 목표는 자선 행위에서 벗어나 가족 간 경영의 차원으로 전이되었으며, 동시에 죽음에 대비하여 행하는 준비 행위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죽음이란 현실적인 죽음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었다.
5 횡와상, 기도상, 그리고 영혼
374 무덤이 묘지 숭배를 위해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정확한 장소를 지시한다는 사실은 고인에 대한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목적성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모누멘툼, 혹은 메모리아 등 무덤을 가리키는 명칭들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무덤은 기념물(메모리얼)이었다. 죽은 자의 내세는 종말론적 차원으로 제물 또는 제식들을 통해서 보장될 수도 있지만, 표식 혹은 비문이 새겨진 무덤이나 작가들이 작성하는 추도사를 통해 현세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고인의 명성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되었다.
375 그런데 약 5세기 이후부터 이러한 문화적 단일성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즉 비문과 초상들이 사라지고 무덤들은 익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문자의 퇴각'이라고도 말한다. 문지를 새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자에 대한 이러한 무관심은 일부 성인들의 무덤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심지어 저명인사들의 무덤까지도 거부감 없이 적용되었다. 물론 구술적인 문명에서는 익명성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큰 것은 사실이다.
438 그리고 18세기 이후에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묘지 형태이다. 그런데 11세기에서 대략 18세기 중엽까지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에는 발생론적인 연속성이 중단 없이 이어진다. 즉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할 때에도 구조상의 본질적 특징들이라기 보다는 양식 차원의 사소한 것 들로부터 기인하는 감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전이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횡와상 계열과 기도상 계열이라는, 형태상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두 가지 계열이 즉시 눈에 띈다. 이 두가지는 시기적으로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차례대로 정확하게 연계하고 있지도 않다.
444 17세기 초 횡와상이 있는 평평한 무덤들은 그때까지 유일하게 무덤을 보유할 수 있었던 계층인 지식인 엘리트 계층에 잔존해 있던 '길들여진 죽음'이라는 아주 오래된 태도의 가시적이고 변함없는 최후의 흔적들이다. 이러한 유형의 무덤은 11-12세기경에 출현한 개인적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새로운 욕구, 그리고 거의 천 년에 걸쳐 지속되어온 휴식이라는 감성 간의 타협점이었다. 죽음이란 저 세상으로 떠나는 행위이지만 영원히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랜 기간의 수면, 그것도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취하는 수면에 들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온전한 삶도 사후의 삶도 아닌, 단지 삶과 유사한 수면 상태를 가리키고 있었다.
466 결국에는 종교적 장면까지 사라지고, 기도상만이 남게 된다. 기도상이 이전에 소속되어 있던 군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기도상은 항상 무덤의 중심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죽음을 상징하는 인물상으로서 그의 태도나 자세는 죽음 그 자체와 직결되어 있다. 이때 죽음은 이미 완수된 것일 수도 있고, 아직 기다리고 있거나 예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483 결국 횡와상이 사라지자 기도상이 오로지 정신적인 측면만을 내세우던 본래적인 성격을 망각한 채 정신과 물질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호모 토투스로서의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도상은 횡와상보다 더욱 개인화된 모습을 늘 유지했을까? 횡와상이 익명성과 숙명이라는 개념에 더욱 충실했던 반면, 기도상의 태도에는 한 개인의 전기적인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나타나 있었다.
486 오늘날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영혼과 육신의 분리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 등장한다. 육신에게는 무가 예정되어 있으며, 영혼에게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운명, 즉 매우 조직화된 내세에서의 삶, 또는 추모를 통한 현세에서의 사후의 삶, 이도 저도 아니면 육신과 동일하게 무가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500 18 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다시 말해 이전에는 그 특권을 누리지 못했던 계층의 가시적 무덤들이 묘지들을 점유하게 된 시기에 십자가 사용은 완전히 정착되었으며, 그 후 널리 확산되고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바 비非그리스도교화 현상이 두드러졌던 지역에서 20세기까지 철저하게 고수된다. 오늘날까지도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의 무덤에 십자가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투사들의 이례적인 도전쯤으로 여겨진다.
515 15 세기에 묘표가 무덤에 설치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하지만 이 경우 묘표는 무덤을 구성하는 일부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무덤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묘표는 분묘의 가장 일상적인 형태가 되었으며, 무덤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각각의 기부 장소에 세워지거나 아니면 무덤을 흡수 · 통합하여 그 자체가 무덤을 이루는 주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러 묘표라는 명칭 대신에 단순히 묘비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면서 무덤이라는 의미를 사실상 획득하게 된다.
527 18세기 동안 지하 묘소라는 개념은 아직 그 상징성이 매우 강했던 예배당의 개념보다 우세하지는 못했으나 점차 비중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는 시신의 물리적 보존이 산 지들의 실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었던 그 시대의 경향과도 상통한다.
527 죽은 자들은 이제 아치형의 지하 묘소라는 그들만의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샤르니에로 다시 옮겨지는 전통적인 이장 관습에서 벗어나 영속적으로 한 장소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죽은 자들이 머무르는 공간은 산 자들의 공간, 즉 이들이 모여 미사에 참석하는 예배 장소인 예배당의 지하에 위치하게 된다. 이 새로운 유형의 분묘, 또 그에 따라 나타나게 된 죽은 자들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19세기에 이르러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Ⅱ 야성화된 죽음
3부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6 전환
541 죽음을 위한 기술 대신에 삶을 위한 기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죽어가는 자의 침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기간 전체에, 또 삶의 매순간에 모든 것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566 죽음을 대신하여 보다 일반적 차원의 숙명적 죽음이라는 개념이 부상한다. 즉 예전에는 죽음이 이루어지는 현실적인 순간에 집약되었던 죽음의 감정은 이제부터 삶 전체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그만큼 그것의 강도도 점차 약화되어갔던 것이다.
7 바니타스
587 15세기 사람들은 자기 집 침실이나 서재에서 시간의 흐름이나 이 세상의 환상들 그리고 삶의 권태를 암시하는 그림과 물건들로 둘러싸여 지냈다. 그리고 이것들을 가리켜 재에 대한 자신들의 취항을 잘 표현한다. 그 시대 모랄리스트나 독실한 신앙가들의 용어를 빌려 '바니타스'라고 일컬었다.
596 이렇게 해서 바니타스는 인간에게 죽음이 아니라 '필멸의의 삶'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게 했다. 이러한 개념은 곧 공통적 사고로서 자리잡게 된다. 모든 문화는, 특히 근대나 오늘날과 같은 문자 문화는 사회 전반에 부과되는 이 공통적 사고들 중 몇 개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공통적 사고란 한 사회의 결속을 돕는 조건화에 필요한 강력한 요소들이다. 이것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사회 전반적인 동의가 있어야 하거나 그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시대의 흐름 속에서 평범하고 상투적인 것, 혹은 자명한 이치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8 죽은 육신
646 이 시대의 의사들은 죽은 자에게 일종의 개인성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으며, 죽은 육신이 아직 인간 존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고 때로는 그것을 표명하기도 한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의학은 이와 같은 사고를 포기한다. 그리고 죽음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이자 변형이며 생명의 부재라는 주장을 채택한다. 이렇게 해서 죽음은 '순수한 부정'이 된다. 따라서 죽음은 그 성질이 확인되어 명명되고 분류되는 질병과 분리되어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647 14세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매장지로 운반하기 위해 일부 유명인들의 시신을 처리하거나, 혹은 여러 개의 무덤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시신을 절단하는 관행이 있었다. 먼저 덩치가 큰 사냥감을 다루듯 시신을 절단한 다음, 살을 제거하고 고귀한 부위인 뼈 만을 추출하기 위해 뜨거운 물에 삶았다.
9 살아 있는 죽은 자
718 이처럼 뿌리 깊은 강박증은 18세기 말 이후 매장 관리의 차원에서 취해지는 여러 가지 조치들을 낳게 했다. 오늘날에는 이것들이 치안 유지, 즉 살인 같은 범죄 행위를 밝혀내고 그것이 은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에서 탄생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보다는 섣부른 매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이미 18세기에 주교들이 24시간의 유예 기간을 강권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유언자들이 요구하던 기간과 일치한다.
719 18세기 말에는 '시신 안치소'라는 기관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확실한 사망 진단을 위해 부패 초기 단계까지 시신을 보관하고 감시하겠다는 발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계획이 실현되지 못했으나 독일에서는 실시되었다.
722 우리와 같은 오늘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19세기 말 의사들은 가사라는 것이 현실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사고를 경험적 근거나 과학적 가치가 없는 미신으로 배척했다. 게다가 이들이 여기에 쏟아 부은 열성은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이다. 이들은 가사에 관한 논의를 통해 혼합된 상태로서의 '죽음의 시간'의 존재에 의문을 품었으며, 삶과 죽음이 혼재된 상태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723 그러나 다른 두 세대, 즉 16-17세기, 그리고 18세기의 의사들은 죽음의 시간을 삶과 죽음이라는 두 요소가 공존하는 상태로 인식했다. 죽음은 더 나중에, 곧 부패의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현실화되고 완성된다는 사고였다.
4부 타인의 죽음
10 '아름다운 죽음'의 시대
725 죽음을 대하는 옛 사람들의 절제된 감정 또 이와 같은 감정이 큰 공포로 변질될 위험이 거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그것을 부풀리고 큰 공포의 대상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불안의 씨앗을 이용하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신도들을 가장 중대한 유혹인 '절망'으로 이끌 위험성이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성직자들은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833 중세 말기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인간 차원의 개입 동기는 서로 다르다. 중세 말기에는 본인 지신이 관건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에게 억지를 부리기도 했으며, 기도나 자선 행위, 또는 면죄부를 축적함으로써 구원을 보장받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점차적으로 개입은 타인들을 위한 것이 되어간다. 그러다가 18세기,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현세에서의 애정과 배려를 축음 저 너머의 세계로 연장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834 연옥의 부재, 고인들을 위한 개입의 불가능성, 이러한 것들은 죽음이 지닌 취소 불가능성을 감소시키고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서로 근접시키려는 차원의 심리적인 진전을 가속화시켰다. 이렇게 되면서 죽은 자들은 산 자에 준하는 존재들, 즉 '육체에서 분리된 정령들'이 된 것이다.
851 20세기 후반기에는 내세의 삶이라는 개념이 쇠퇴되거나, 혹은 이전에 비해 존중받지 못하는 사고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한 여론 조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 개념은 죽음에 임박한 노인들이나 더 이상 잃을 것도 감출 것도 없는 중환자들에게 다시 나타나고 있다. 내세의 삶, 혹은 기억의 삶에 대한 다양한 믿음들은 사실상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에 대한 수많은 응답이다.
853 애도행위에서, 묘지에서, 미술이나 문학 뿐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죽음을 둘러싸고 있었던 명백한 공개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감추어지고 있었다. 죽음이 아름다운이라는 가면 속으로 은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853 여기서 죽음의 역사는 악의 역사와 마주친다. 과거 그리스도교 교리나 일상생활 속에서 죽음은 악의 표출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때 악은 삶 속에 스며들어와 있으며 삶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악이었다. 리스도교도들에게 죽음은 천상, 그리고 악에 관한 가장 일상적인 표현 형태였던 지옥 간의 비극적인 대결 순간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지옥을 거의 믿지 않았다. 지옥은 단지 애정으로 묶인 소그룹의 밖에 있는 자들인 낯선 자들 또는 적들에게나 적용되는 개념일 뿐이었다.
855 그렇다고 해서 지옥의 종말이 신의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낭만주의자들이 대부분 열렬한 신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죽음이 아름다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사고 속에서 성서의 하느님은 자주 대자연이라는 외양을 취하고 있었다.
11 묘지 방문
858 그런데 19세기 초부터 묘지들이 지형도 내부로 돌아온다. 오늘날 도시나 심지어 농촌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때 촘촘히 짜인 도로망 사이로 푸르스름한 빈 공간들을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다. 이것은 대도시의 드넓은 공동묘지들이거나 시골 마을의 작은 묘지들로, 때로는 교회 주위에, 또는 그보다 자주 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다.
1002 중세 묘지가 함축하고 있는 산 자와 죽은 지들 간의 순진하고 가벼운 친숙함에도 의미 변화가 찾아온다. 더욱 의식적이고 의례적인 친숙함으로 변모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가족 구성원들 간이나 같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여러 가족들 간의 새로운 감성적 관계를 공개적으로, 그러나 조심스럽게, 또한 비장감이나 즉흥성 없이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상징적이고 관습적인 언어가 된 것이다. 그 후 이 묘지 역시 19 세기의 여느 도시 묘지들처럼 분할되고 양도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에 따라 무덤들을 들어내는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5부 역전된 죽음
12 역전된 죽음
1010 한 개인의 죽음은 그가 속한 사회 집단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가까운 가족에서 시작하여 친구와 친지, 사업자의 지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대되는 사회 그룹이 집단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모두가 그 옛날 루이 14세처럼 대중 앞에서 죽어갔으며, 각자의 죽음은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공적인 사건이었다. 죽음은 한 개인의 소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 집단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므로 그 상처를 치유해야 했다.
1011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두가지 특징이 두드러져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이전의 상황과 대조되는, 다시 말해 이전 상황에 대한 '역전된 이미지' 혹은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국가적인 인물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가 죽음을 추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16 19세기에 이르러 유언장에서 종교적 문구들이 사라지면서 작별 인사, 마지막 당부 등 은밀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대화의 중요성이 증가되었다. 그런데 죽어가는 자에게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이 사적인 혹은 공식적인 대화의 단계가 제거되고 말았다. 죽어가는 자는 한 마디의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승을 하직하게 된 것이다.
1022 이처럼 예고는 우연히 찾아온다. 환자 자신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환자의 격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오늘날의 의사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직접적인 개입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우연에 맡겨버린다.
1030 임종 환자의 침실은 이렇게 가정에서 병원으로 전이되었다 이러한 전이는 의학적 기술을 빌미로 가족들에게 용인되었으며, 이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더욱 보편화되고 절차도 매우 간편해진다. 이때부터 병원은 죽음이 공개성(죽음은 공개되는 순간부터 불건전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혹은 그것의 잔재들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이렇게 해서 병원이 고립된 죽음의 장소가 된 것이다.
1041 여기서 지옥의 지옥의 개념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악마를 믿는 이들조차 악마의 활동을 이 세상에 한정하고 있으며 영벌이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이 부분에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우리는 앞에서 적어도 19세기 초부터 이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1046 애도절차가 사라진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경박함이 아니라 사회의 준엄한 억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가 유족들의 감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는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죽음의 존재를 거부하는 한 방식이다.
결론
1102 타인의 죽음은, 오히려 그때까지 억압되어 있던 비장감(파토스)을 불러 일으켰다. 예전에는 과도한 감정 표출(혹은 지나친 무관심)에 대응하기 위한 방패막이로써 간주되던 침실에서의 의례 혹은 애도의 의식들이 본연의 의례성을 상실하게 되고, 유족들의 고통이 자발적으로 표출되는 장으로 개조된다. 그런데 이들이 비통해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고인과의 육체적인 이별이었다.
1105 이처럼 오늘날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19세기에 출현한 감성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풍부한 창의성을 과시하는 이 감성이 마지막으로 고안해낸 작품은 임종 환자 혹은 중환자에게 끝까지 상태의 심각성을 은폐함으로써 그를 그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죽어가는 자 역시 이 존엄한 놀음을 알아채는 경우 공모자로서 여기에 응했다.
1109 그렇다면 악이 사라진 마당에 죽음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해 사회는 오늘날 두 가지 응답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는 범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급화된 것이다. 첫 번째 대답은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대한 집단적 자기 고백이다.
1110 죽음을 행복의 개념과 조화롭게 만드는 것만이 이들의 항구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단지 평온한 자가 우호적인 사회로부터 빠져나가는 은밀하지만 품위 있는 출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심적 고통이나 신체적 통증도 없으며 불안감도 없는 한 개인의 생물학적 전이라는 사실에 의해 지나치게 타격을 받아서도 지나친 비통함에 잠겨서도 안 된다.
'책 밑줄긋기 > 책 2012-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앙드레 지드: 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0) | 2020.07.20 |
---|---|
하워드 A.존슨: 키르케고르 사상의 열쇠 (0) | 2020.07.16 |
헤르만 헤세: 데미안 (0) | 2020.07.07 |
한자경: 칸트 철학에의 초대 (0) | 2020.06.29 |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2 (0) | 2020.06.22 |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1 (0) | 2020.06.19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0) | 2020.06.15 |
쇠얀 키에르케고어: 공포와 전율 ━ 코펜하겐 1843년 (0) | 2020.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