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


데미안 - 10점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민음사



1. 두 세계

2. 카인

3.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4. 베아트리체

5.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6. 야곱의 싸움

7. 에바 부인

8. 종말의 시작


작품소개 / 전영애

헤세 연보





7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도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회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 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수월하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1. 두 세계

10 내가 열 살이고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체험 하나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 시절로부터 짙은 향기가 밀려와, 속에서부터 아픔과 기분 좋은 전율로 마음을 뒤흔든다. 어두운 골목들과 환한 집들, 탑들, 시계 치는 소리와 사람들 얼굴, 편안함과 따뜻한 쾌적함으로 가득 찬 방들, 비밀과 무시무시한 유령의 공포로 가득 찬 방들. 따뜻하고 비좁은 방의 냄새, 토끼와 하녀들의 냄새, 가정 처방약 냄새와 마른 과일 향기가 난다. 그곳에서는 두 세계가 뒤섞였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 밖에 없었다 그 세계는 나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맑음과 깨끗함이었다. 그곳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이야기들, 깨끗이 닦온 손, 청결한 옷, 좋은 관습이 곁들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졌다.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곧바로 미래로 이어지는 곧은 선과 길이 그 세계 속에 있었다.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선한 원칙들, 사랑과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인생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정돈되어 있으려면 그 세계를 향해 있어야만 했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거칠고도 잔인한 그 모든 일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 바로 옆집에서 있었고 경찰 끄나풀들과 부랑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정뱅이들은 아내를 패고, 저녁 때면 젊은 여자들의 무리가 뒤엉켜 공장에서 꾸역꾸역 나왔다.


35 한번은 저녁에, 내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때, 어머니가 초콜릿 하나를 가져오셨다. 저녁에, 그날 하루를 착하게 보냈으면 잘 자라고 상으로 그런 위로의 주전부리를 받곤 하던 더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이제 어머니가 거기 서서 나에게 그 초콜릿 조각을 내밀고 계셨다. 나는 어찌나 괴로운지, 다만 고개를 가로 저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나는 간신히 「아니오! 아니오 I 아무것도 먹지 않겠어요!」라고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초콜릿을 침대머리 탁자에 놓고 가셨다. 다음날 어머니께서 그 일을 두고 캐물으려 하셨을 때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한번은 의사를 데려오셨다. 의사는 나를 진찰하고 아침에 차가운 물로 몸을 씻도록 처방을 내렸다. 그 시절 내 상태는 일종의 착란이었다. 우리 집안의 정돈된 평화의 한가운데서 나는 소심하게, 그리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잊는 일은 드물었다. 자주 흥분하여 해명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에게는 마음을 닫고 냉정했다.


2. 카인

36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쪽에서 왔다.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 작용하고 있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는 그 얼마 전에 학생이 한 명 새로 들어왔다. 우리 도시로 이사 온 어느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로 옷소매에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 학년 높았으며 나이도 몇 살 더 들었지만, 곧 모든 학생들처럼 나도 그를 주목했다. 이 이상한 학생은 보기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어른처럼, 아니 그냥 어른이라기보다는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하게 우리 유치한 소년들 사이를 오갔다. 인기 있지는 않았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싸움질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들에게 맞서는 그의 자신감 있고 단호한 어조가 다른 학생들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3.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64 내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버지 어머니 곁에서 내가 누렸던 안정감에 대하여, 어린아이가 사랑과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환한 환경 속에서 넉넉하게 즐기며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아름답고 정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나에게 흥미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 이르기 위하여 내가 내디렸던 걸음들뿐이다. 그 모든 아리따운 휴식의 지점들, 행복의 섬들과 낙원들의 마력을 나도 모르지 않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먼 곳의 광채 속에 싸인 채로 두고자 한다. 그곳에 다시 한 번 발 디딜 욕심을 내지 않는다.


65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숨기고 은폐해야 하는 하나의 원시적 충동이 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했던 시절이 왔다. 어떤 사람이나 그렇듯이, 천천히 눈뜨는 성에 대한 감정이 나에게도 하나의 적이자 파괴자로, 금기로, 유혹과 죄악으로 들이닥쳤다. 나의 호기심이 찾은 것, 꿈과 기쁨과 두려움이 내게 가져다준 것, 사춘기의 큰 비밀, 그것은 내 유년의 평화에 감싸인 행복감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 아이의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내 의식은 집안의 허용된 세계 속에 살았으며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세계는 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꿈, 충동, 은밀한 소망들 속에서 살았다. 그 위에서 저 의식적 삶이 만드는 다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속에서 유년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91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은 나의 주변에서 폐허가 되었다. 부모님은 어느 정도 당황하여 나를 바라보셨다. 누이들은 아주 낯설어졌다. 익숙한 느낌들과 기쁨들을 나에게서 각성이 일그러뜨리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세계는 낡은 물건들의 떨이판매처럼 서 있었다. 맥없고 매력 없이.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서걱임이었다. 그렇게 어느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방학이 지나면 다른 학교로 가기로, 처음으로 집을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이따금씩 내게 어머니가 특별히 다정하게 대하시면서, 미리 작별을 하며, 나에게 사랑, 향수 그리고 잊지 못할 것들을 마음속에 마력으로 심어주려 애쓰셨다. 데미안은 여행을 떠났다. 나는 혼자였다.


4. 베아트리체

92 내 친구를 다시 만나지 못한 채, 방학이 끝날 무렵에 나는 성 00시로 갔다. 부모님 두 분이 함께 오셔서 갖은 세심함을 있는 대로 기울여 나를 어느 김나지움 선생 댁인 소년 하숙집에 맡기셨다. 그때 나를 어떤 일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놓았는지 아셨더라면 부모님은 놀라서 굳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좋은 아들, 쓸모 있는 시민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나의 본성이 다른 길들로 밀려갈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부모님의 그늘, 정신의 그늘 속에서 행복하려 했던 나의 마지막 시도는 오래 걸렸고, 가끔 성공하는 듯도 했지만 결국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120 아버지도 이제는 비난도 위협도 없이 다시 전 같은 어조로 편지를 쓰셨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에게나 그 누구에게 어떻게 나에게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할 충동을 느끼지 않았다. 이 변화가 우리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소망과 일치한 것은 우연이었다. 이 변화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나를 그 누구에게도 접근시키지 않았다. 나를 오직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어딘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데미안을, 먼 운명을. 내 스스로야 몰랐다. 그 한가운데 있었잖은가. 베아트리체로 일은 시작되었으나, 얼마 전부터 나는 그림 그려진 종이들 그리고 데미안에 대한 나의 생각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얼마나 완벽하게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베아트리체마저 시야에서 생각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다. 내 꿈들, 내 기대들, 내 내면의 극심한 변화에 대해 나는 아무에게도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설령 그렇게 하고자 했더라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걸 원할 수 있었겠는가?


5.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122 내가 그린 꿈 속의 새는 내 친구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너무 놀랍게도 나에게로 답장이 왔다. 학교 우리 반 교실 내 자리에서, 한 번은 쉬는 시간이 끝난 뒤 다음 수업이 미처 시작되기 전에 쪽지 하나가 내

책에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 반 학생들이 수업 시간 중에 몰래 서로 쪽지 편지를 보낼 때 흔히 접는 것과 똑같이 접혀 있었다. 내가 놀랐던 건 다만, 누가 나한테 그런 쪽지를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어떤 학우와도 그런 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야 끼지 않을 테지만, 그 어떤 학생다운 장난을 하자는 것이겠거니 하고 쪽지를 읽지도 않은 채 앞쪽 책 속에 끼워 넣었다. 수업 도중에 우연히 그 쪽지가 다시 손에 들어왔다. 종이를 만지작거리다 아무 생각 없이 펴게 되었는데 그 안에 몇 마디 말이 적힌 것을 보았다. 그 위로 한 번 시선을 던지고는 말 하나에 사로잡혀 버렸다. 놀라 읽었다. 그 사이 나의 가슴은 운명 앞에서, 큰 추위가 닥친 때처럼 오그라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


이 글줄을 몇 차례 읽은 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떤 의심도 불가능했다. 이건 데미안이 보낸 답장이었다. 나와 그 말고 그 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내 그림을 그가 받은 것이다. 그는 이해하였고 내가 풀이하는 것을 도운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서로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압락사스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들어본 적도 읽어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144 그 꿈에 대해 피스토리우스는 말했다. 「자네를 날게 만든 도약,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위대한 인류의 재산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지. 그러나 그 러면서도 곧 두려워져! 그것은 빌어먹게 위험하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듯 차라리 날기를 포기하고 법 규정에 따라 인도(人道) 위를 걷는 쪽을 택하지. 그런데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유능한 젊은이에게 합당한 대로 말이야. 그리고 보게,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네.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말이야. 자네를 계속 낚아채 가는 커다랗고 알 수 없는 보편적인 힘에다가 하나의 섬세하고 작은 자신의 힘이 더해지는 것을 발견하네. 하나의 기관, 하나의 방향 키 말일세! 이건 대단한 거야. 그것이 없다면 그냥 공중에 떠 있을테지, 미친 사람들이 그러듯이 말이야. 자네에게는 인도를 걸어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다 더 깊은 예감이 주어졌어. 그러나 거기에 맞는 열쇠와 방향 키가 없어. 바닥 없는 곳으로 좌악 빨려들고 있지.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싱클레어, 자네는 그 일을 하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냐구? 그건 자네가 아직 전혀 모르겠지. 자네는 그것을 새로운 기관, 즉 하나의 호흡조절기를 가지고 하고 있어. 이제 자네의 영혼이 근본에 있어서 얼마나 〈개인적〉이지 못한가를 알 수 있을 거야, 이런 조절기를 고안해 낸 게 자네 영혼은 아니니까 말이야. 조절기란 새로운 게 아니야! 그것은 일종의 차용이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하는 거야. 그것은 물고기의 평형 기관 —― 부레지. 실제로, 부레가 동시에 허파여서 상황에 따라서는 정말로 숨쉬는 데 부레를 이용하는, 진화가 덜 된 희귀한 물고기 몇몇 종류가 오늘날에도 있지. 그러니까 자네가 꿈에서 날 때 비행용 기포로 사용한 허파와 한 치도 안 틀리고 똑같이 말이야! 」 그는 나에게 동물학 책까지 한 권 가져와 그 진화가 덜 된 물고기들의 이름과 도판도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속에서 한 가닥 특이한 전율을 느끼며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나온 기능 하나를 생생하게 느꼈다.


6. 야곱의 싸움

146 특이 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로부터 압락사스에 대하여 들은 것을 짧게 다시 들려줄 수 없지만 그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 위의 또 한 걸음이었다. 나는 당시에, 열여덟 살의 평범치 않은 젊은이였다. 수백 가지 일에서 조숙하고, 다른 수백 가지 일에서 몹시 뒤처지고 무력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또 꼭 그만큼 자주 의기소침하고 굴욕스러워 했다는가 하면 어떤 때는 어떤 때는 자신을 천재로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절반쯤 돌았다고 생각했다. 또래들의 기쁨과 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잘되지 않았고, 자주 비난과 근심으로 자신을 소모했다. 마치 내가 절망적으로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기라도 하듯이, 마치 내게 삶이 닫혀져 있기라도 하듯이. 그 자신이 성숙한 괴짜였던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용기와 스스로에 대한 존경을 간직하는 법을 가르쳤다. 내가 한말들, 내가 꾼 꿈들, 나의 환상과 생각에서 늘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언제나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논평하면서 그는 나에게 예를 제시했다.


174 그렇다.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꿈꿀 수는 있었다. 미리 느낄 수는 있었다. 예감할 수 있었다. 아주 고요한 시각을 찾아낼 때면 몇 번 그것을 조금 느꼈다. 그럴 때면 내 마음 속으로 눈길을 보내며 똑똑하게 뜨여 있는, 내 운명의 영상의 두 눈을 들여다본다. 그 두 눈은 지혜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광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 환히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깊은 악의가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 중 그 무엇도 택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무엇도 원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갖겠다고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운명뿐이었다. 거기로 가는 한 구간을 피스토리우스는 길잡이로 나에게 봉사했다.


175 나는 종이에 적었다. 〈한 인도자가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완전히 어둠 속에 서 있습니다. 한 발자국도 혼자 디딜 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데미안에게 그 종이를 보내려 했다. 그렇지만 그만두었다. 내가 그러려고 하면 번번이, 그게 멍청하고 무의미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기도를 외웠고 그것을 자주 내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그 말은 매시간 나와 함께 있었다. 기도가 무엇인지 나는 예감하기 시작했다. 내 학생 시절이 끝났다. 나는 방학 동안 여행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생각해 내신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어떤 대학에 갈지는 몰랐다. 철학을 한 학기 듣기로 했다. 다른 과목을 들었더라도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7. 에바 부인

194 표적을 가진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들로 비칠지도 몰랐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한 깨어 있음을 지향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그들의 의견, 그들의 이상과 의무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점점 더 긴밀하게 패거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다. 그곳에도 힘과 위대함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견해로는 우리 표적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 개별화된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향한 자연의 뜻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고수(固守)의 의지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류가,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는 인류가 무언가 완성된 것, 보존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우리들에게는 인류가 하나의 먼 미래,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고, 그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그 법칙은 그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은 미래였다.


209 그녀는 산뜻하고, 이제는 전혀 더 이상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어머니가 겁먹은 아이들에게로 가듯 그녀는 우리들에게로 왔다. 「슬프지는 않은데요, 어머니. 저희는 다만 이 새로운 표적의 수수께끼를 약간 풀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거긴 아무것도 없네요.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 필요 있는 것은 겪게 되겠지요」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작별을 하고 혼자 홀을 지나가는데, 히아신스 향기가 시들고, 맥빠지고 시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림자 하나가 우리들 위에 드리워졌던 것이다.


8. 종말의 시작

220 나는 어느 지하실에 누워 있었다. 머리 위에 포화가 퍼부어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 수레에 누워 덜컹덜컹 빈 벌판을 지나갔다 대체로 나는 잠을 찼거나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깊이 잠자면 잘수록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김을, 나를 지배하는 주인인 어떤 힘을 내가 따르고 있음을 그만큼 더 격렬하게 느꼈다. 어느 외양간 짚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어두웠다. 누군가가 내 손을 밟고 갔다. 그러나 나의 내면적인 것은 더 나아가려 했다 더 강하게 그것은 나를 끌고 갔다. 다시 나는 수레 위에 누웠다. 나중에는 들것 혹은 사다리 위에 누웠다. 점점 더 그 어딘가로 가라고 명령받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내 거기로 가려는 충동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나는 목적지에 와 있었다. 밤이었다. 의식은 분명했다. 이제 막 내 안의 끌림과 충동이 힘차게 느껴졌던 참이었다. 이제 나는 넓은 홀에, 바닥에 깔린 자리에 누워있었다. 내가 부름을 받은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위를 바라보았다. 내 매트리스 바로 곁에 다른 매트리스가 바싹 붙어 놓여 있었고 누군가가 그 위에 있었다. 그 사람이 앞으로 몸을 숙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마 위에 그 표적이 있었다. 그것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도 말할 수 없었거나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 너머 벽에 달려 있는 신호등 불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내내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그가 얼굴을 내게 더 가깝게 밀었다 우리가 거의 닿을 때까지.


222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입술에서는 계속해서 조금씩, 그러나 결코 줄어들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사람들이 깨웠다. 붕대를 감아야 했던 것이다. 마침내 완전히 잠이 쨌을 때, 나는 얼른 옆 매트리스로 몸을 돌렸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거 기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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