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7. 27.
새로운 인생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
새로운 인생
작품 해설
9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
― 노발리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몸이 나로부터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의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는, 마치 내가 읽고 있던 책장들로부터 내 얼굴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러한 강력한 힘 때문이었다. 그 빛은 나의 이성을 무디게 만드는 동시에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나는 이 빛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었다. 혹은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미 빛 안에서, 내가 훗날 알게 되고 또 가까워지게 될 어떤 삶의 그림자를 느꼈다. 책상에 앉아서 책장을 넘기는 동안, 내 머릿속 한구석은 내가 지금 책상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페이지들에서 새로운 단어들을 접할 때마다 내 삶은 송두리째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이어 내게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한순간 나는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얼굴을 책장으로부터 멀리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닫곤 공포에 휩싸였다. 그 다음엔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독감에 압도되었다. 그것은 지리도, 언어도, 관습도 모르는 나라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한 고독이 가져다 준 속수무책을 경험하고 나자, 나는 더욱더 책을 경험하고 나자, 나는 더욱 더 책에 얽매이게 되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혹은 조심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낯선 나라에서 내 삶이 어떤 길을 택하게 될 것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 책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낯선 오지에서 나를 인도해 줄 안내서를 읽듯,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책을 읽어 나갔다. 도와 달라고, 내가 아무런 사고 없이 안전하고 무사하게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인생이 이 안내서 속에 들어 있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어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나의 갈 길을 찾으려 애썼고, 한편으로는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 수도 있는 경이로운 상상들을 하나하나 꿈꾸고 있었다.
책은 여전히 내 얼굴에 빛을 비추며 책상 위에 놓여 있었지만, 방에 있는 다른 친숙한 물건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 앞에 놓인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생의 존재를 놀라워하며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토록 강렬한 힘으로 내 삶을 바꾸어 놓은 이 책이 사실은 평범한 물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책 속의 단어들이 내게 약속한
새로운 세계의 경이를 향해 나의 마음이 그 창문과 문 들을 서서히 열어 가고 있을 때 문득 나를 이 책으로 이끈 우연한 계기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나의 의식에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피상적인 영상에 불과했다.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자, 어떤 공포가 나에게 이 영상을 떠올리게 했다. 책이 내게 보여준 새로운 세계는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이상하면서도 놀라운 것이어서, 이 세계 속에 완전히 빠져 들지 않기 위해 현재와 관련된 무엇인가를 느껴야 한다는 조급함이 일었다. 책에서 고개를 들고 내 방이나 옷장, 침대 혹은 창밖을 보았을 때 내가 알던 세상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시간과 책장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흘러가고 있었다. 멀리 기차가 지나갔다 어머니가 나가는 소리,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시의 일상적인 소음들에 귀를 기울였다. 거리에서 요구르트 장수가 종을 딸랑이는 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소리들을, 생소한 소리처럼 들었다. 처음에 소나기 내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곧 여자 애들이 줄넘기하는 소리로 변했다. 또 날씨가 개는구나 생각했을 때에는,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려 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음 페이지, 그 다음 페이지, 또 그 다음 페이지를 읽었다. 다른 생의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보였다. 내가 알았던 것과 알지 못했던 것 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 삶과 내 삶이 가게 되리라고 생각되는 길이 보였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내가 상상하지도, 생각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했던 어떤 세계가 점점 더 내 존재 속으로 침투하며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 내가 알았거나 한때 고민했던 모든 것은 사소한 것으로 변했고, 예전에 내가 몰랐던 것들은 숨어 있던 곳으로부터 하나씩 나타나 내게 신호를 보냈다. 이것들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했다 해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천천히 가지고 있었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예전에 사물에 대한 관심이나 호기심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와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인생에 흥분 때문에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엄청나고 다양하면서도 복합한 가능성들이 일종의 공포와 같이 변해 버렸을 때,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에 들떠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내 얼굴 위로 비친, 책에서 뿜어져 나온 빛 속에서 허름한 방들. 폭주하는 버스들 지친 사람들, 희미한 글자들, 사라진 마을과 사람 들, 유령들을 보고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여행이 있었다, 항상 여행이 있었다. 모든 것은 여행이었다. 그때 나는 이 여행을 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내 앞에 나타날 것 같다
가도 사라져 버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더 찾고 싶게 만드는 시선을, 오랜 세월 동안 죄악이나 불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던 부드러운 시선을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이 되고 싶었다. 그 시선을 통해 바라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싶었다.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지, 정말로 그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스스로를 납득시킬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살고 있다면, 이 책은 당연히 나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누군가가 나의 생각들을 나보다 먼저 생각해서 적어 내려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단어들과 그것들이 지닌 의미가 일반적인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 이젠 이해가 됐다. 처음부터 나는 이 책이 처음부터 나를 위해 쓰였음을 감지했다. 모든 단어, 모든 비유가 마음에 와 닿았던 이유는 문장이 비범하거나 단어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이 나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느낌에 휩싸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살인, 사고, 죽음, 놓쳐 버린 신호 들 사이에서 나의 길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295 식당에 앉을 때, 8시 45분에 기차가 있다고 그가 말했다. 나를 배웅한 후에 극장에 가려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미 나를 돌려보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난을 만났을 때 나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책에 대해 말하고, 책을 알리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내 인생이 있었으면 했어. 하지만 나는 이미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책을 갖고 있었어. 책이 내게 열어 준 세계에 도달하길 바라며 내가 경험했던 것들은 내게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자난은 나를 선동했어. 내게 인생을 알게 해 주겠노라고 했지. 어디엔가, 나를 넘어선 곳, 내가 알면서도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어떤 정원이 있다고 말했지. 그녀는 그 정원의 열쇠를 너무나 원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책에 관해 말해야 했고 나중에는 책을 줘야만 했어. 그녀는 책을 읽었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지. 나는 책에 대한 그녀의 열정 그곳에서 보았던 세상을 향한 너무나 열렬한 동경에 속았어. 한동안, 이렇게 해서 책의 고요함을, 그곳에 쓰여 있는 것의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내적인 음악을 나는 잊었어. 마치 책을 처음 읽었던 시절처럼 이 음악을 거리에서든, 먼 곳에서든,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바보 같은 희망에 휩싸였지. 그사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주자고 제안한 것도 그녀의 생각이었어. 네가 책을 읽고, 그 즉시 그녀를 믿는 것을 보고 나도 두려웠어.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잊고 있던 찰나에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내게 총을 쏘았지."
나는 책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어쩌면 모든 책이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라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세상의 정적 또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엇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정적과 소음도 그것 자체는 아니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내가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봐 다시 한번 다른 말로 설명하고자 했다
321 나는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단지 내온 인생을 바꾸어 버린 책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러나 책을 읽을 때. 나는 상처 입은 내 인생에 깊은 어떠한 의미를 주려고도, 위안을 찾으려고도, 더욱이 슬픔의 아름답고 존중할 만한 부분을 찾으려고도 절대 시도하지 않았다. 체홉에게 폐렴에 시달리는 그 재능 있고 겸손한 러시아인에게 사랑과 경탄 이외에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헛되이 지나버린 상처받고 슬픈 인생을 체홉주의라는 감성으로 미화시키고, 인생의 빈곤함에 대해 으스대면서 아름다움과 숭고한 감정을 느끼는 독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리고 위안을 구하는 이러한 독자들에 응하는 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약삭빠른 작가들을 혐오한다. 이 때문에 나는 많은 현대 소설들을 읽다가 말고 도중에 덮어 버리곤 한다. 아, 말[馬)과 대화하면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슬픔에 가득 찬 남자. 아, 자신의 사랑을 하염없이 물을 주던 화분 속 꽃들에게 바친 무력한 귀공자, 허름한 의자에 앉아서 절대 오지 않을 편지를 옛날 애인을 또는 이해심 없는 딸을 기다리는 예민한 남자.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처와 아픔을 전시하는 이 주인공들을, 체홉을 투박하게 모방하고 훔쳐서 다른 지형과 기후에서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작가들도 사실상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보시오, 우리를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보시오, 우리는 얼마나 예민하고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특별한가요! 고통은 우리를 당신들보다 더 섬세하고 감성적이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되고 싶고, 당신의 불행을 승리로, 특히 우월함으로 바꾸고 싶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믿으십시오. 우리의 슬픔이 인생의 평범한 즐거움보다 더 멋지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니 독자여, 그다지 섬세하지도 못한 나 같은 인물을 믿지도 말고, 나의 고뇌나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폭력성도 믿지 말라. 오직 이 세계가 잔인한 곳이라는 사실만을 믿어라. 그리고 서양 문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 소설이라는 이 새로운 장난감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이 페이지들에서 독자들이 듣는 나의 목소리가 이토록 격한 이유는 내가 책으로 오염되고 거대한 사고들로 인해 저속해진 수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외국에서 들여온 장난감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배회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말하고 싶다. 자난을 잊고, 내가 경험한 것들을 이해하고, 내가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인생의 색깔을 상상하고, 즐겁게 그리고 조금 더 영리하게 (항상 영리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계속해서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일종의 책벌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식인다운 누군가를 모방하려는 욕구에는 휩쓸리지 않았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러한 욕구에 휩쓸린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을, 마치 극장에 가는 것과 신문과 잡지를 뒤적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했다. 이러한 행위는 어떤 이익이나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뭐랄까,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고 더 지식 많고 더 심오하게 생각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내게 겸손함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르프크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들이 내게 대화를 하고 싶게 자극을 불러일으켰지만, 나는 이를 주로 머릿속에서 책들끼리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385 천사는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그러나 동시에 내게서 너무나도 먼 곳에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알았다. 그 깊고, 적나라하고, 강렬한 빛이 나를 위해 그곳에 있다는 것을. 마기루스가 전속력으로 초원을 달리고 있었지만 천사는 내게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주위의 환한 빛 때문에 정확히 무엇을 닮았는지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천사를 알아보았을 때 나는 기쁨, 가벼움,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 천사는 페르시아 세밀화에 나오는 천사를 닮지도 않았고, 캐러멜 포장지에 있는 천사를 닮지도 않았으며, 사진에서 본 천사를 닮지도 않았고, 내가 오랜 세월 그 목소리를 듣기를 갈망해 온 내 상상 속의 존재를 닮지도 않았다. 한순간 나는 천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천사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여전히 느끼는 그 어렴풋한 즐거움과 놀라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처음 느꼈던 우정이나 친밀감, 연민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나는 그것들로 평온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 몇 년 동안 기다려 왔던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속에서 버스의 속력보다도 더 빠르게 커지는 두려움을 진정하기 위해 이 순간의 나에게 천사가 시간, 사고, 평온, 굴, 인생, 새로운 인생의 비밀을 알려 주길 원했다. 그러나 모두 쓸데없었다.
천사는 내게서 너무나 멀고 또한 너무나 멋졌지만, 그만큼 무정했다. 무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앞에 나타나기만 했을 그 순간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반쯤은 어두운 초원을 달리는, 빈 깡통처럼 덜컹거리는 마기루스의 앞 좌석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떠오르는 빛 속에서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 정도였다. 모든, 그 모든 무자비하고 피할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힘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운전사를 보았을 때, 무언가가 앞 유리창 전체를 가공할 힘으로 덮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60~70미터 전방에 서로 추월하려는 두 대의 트럭이 우리를 향해 전조등을 곧바로 비춘 채 우릴 덮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사고를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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