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욱: 중동은 왜 싸우는가? ━ 정체성의 투쟁, 중동사 21장면


중동은 왜 싸우는가? - 10점
박정욱 지음/지식프레임


Scene 01. 무함마드, 신의 계시를 받다 - 이슬람 국가의 탄생

Scene 02. 누가 예언자의 후계자인가 -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Scene 03. 술탄 메흐메드 2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다 - 튀르크 전성시대

Scene 04.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강제 개종 정책 - 이란은 왜 시아파가 되었나

Scene 05. 빛바랜 오스만 제국의 개혁 - 탄지마트와 입헌혁명

Scene 06.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근본주의 열풍 - 와하비즘과 사우드 가문

Scene 07. 하심 가문, 영국과 거래하다 - 아랍국가의 탄생

Scene 08.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무스타파 케말 - 터키공화국의 탄생

Scene 09. 외세에 의해 쫓겨난 레자 샤 - 이란의 도전과 좌절

Scene 10. 유대인 국가를 세우다 - 이스라엘의 건국

Scene 11. 건국과 동시에 시작된 전쟁 -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제1차 중동전쟁)

Scene 12. 아랍 민족주의의 절정 -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통합

Scene 13. 아랍 민족주의의 패배 -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Scene 14. 하산 알 반나, 무슬림형제단을 세우다 - 현대 이슬람주의 운동의 성장

Scene 15. 찢겨진 정체성의 모자이크 - 레바논공화국의 비극

Scene 16. 팔라비 왕정, 무너지다 - 이란의 이슬람혁명

Scene 17. 승자 없는 8년 전쟁 - 이란·이라크 전쟁

Scene 18. 팔레스타인의 저항 - 인티파다

Scene 19. 압둘라 오잘란 체포되다 - 쿠르드노동자당의 투쟁

Scene 20. 지하드, 미국을 습격하다 - 알 카에다와 9·11 테러

Scene 21. 모든 정체성의 충돌 - 시리아 내전





Scene 01. 무함마드, 신의 계시를 받다 - 이슬람 국가의 탄생

25 이슬람이 일어나기 1 세기 전의 중동은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두 초강대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비잔틴 제국의 국교 기독교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교 조로아스터교, 두 세력이 중동 지역의 종교를 양분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영역은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등 레반트 지역과 소아시아(아나톨리아)였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란과 이라크 일부 지역,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을 지배했다. 당시 아라비아 지역에는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뿐 아니라 유대교와 마니교 등을 따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했으며 토착종교인 다신교도 널리 퍼져 있었다.


Scene 02. 누가 예언자의 후계자인가 -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81 수니파는 칼리파가 제국을 안정화 시키고 무슬림들이 안심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며 이슬람 세계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에 충실하다면 칼리파의 신앙이나 도덕성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에 수니파 무슬림들은 <꾸란>과 <하디스>를 해석할 수 있는 종교적 권위가 필요했다. 이 같은 사회적 요구가 이슬람 법학자 울라마를 만들어냈다. 


Scene 03. 술탄 메흐메드 2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다 - 튀르크 전성시대

83 메흐메드 1 세의 손자인 메흐메드 2세는 오늘날까지 터키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술탄이다. 그의 별명은 파티히(정복자)다. 무려 1100 여 년 동안 유럽의 심장 역할을 하며 오리엔트 세력과 맞서 기독교 문명을 수호해온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틴 제국을 정복해서 얻은 별명이다. 콘스탄티노플 공략 당시 메흐메드 2 세는 갓 스무 살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곳만 정복한다면 동서무역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나라가 부유해질테고, 유럽으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어 대대적인 영토확장의 기회가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Scene 04.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강제 개종 정책 - 이란은 왜 시아파가 되었나

113 오늘날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대결은 과거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열하게 된 계기인 칼리파 찬탈이나 이맘 후세인의 비참한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물론 카르발라의 참극은 시아파 무슬림 전체가 가장 비통해 하는 사건이다. 당연히 시아파를 국교로 수용한 이란도 카르발라 참극을 추념하는 아슈라를 공휴일로 지정해서 지킨다. 그러나 이란의 시아파 개종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종교적 배경 때문이 아닌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 과정에서 나온 정치적 판단의 결과다.


113 오늘날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갈등 역시 종교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두 나라는 시아파와 수니파를 대표하는 국가로 중동 지역의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는 중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왕정인 반면, 이란은 공화정을 채택한 것 또한 양측의 갈등을 더해주고 있다. 왕정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에서는 이란의 힘이 강해질 경우 중동 지역에서 공화정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져 그 결과 사우드 왕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으로 여긴다. 한편 이란은 반미 성향의 국가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국가인데, 이 같은 외교적 차이도 양측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Scene 05. 빛바랜 오스만 제국의 개혁 - 탄지마트와 입헌혁명

124 탄지마트의 의도는 훌륭했으나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차별을 없애겠다는 선언은 기득권 세력인 무슬림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꾸란>은 이슬람과 다른 종교를 분명히 구분하며 이슬람이 우월하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는 술탄의 칙령이 <꾸란>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수 이슬람 종교계는 분노했고 오히려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갈등이 한결 더 커졌다.


Scene 06.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근본주의 열풍 - 와하비즘과 사우드 가문

148 리야드가 다시 사우드 가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는 소식은 중앙아라비아 전역에 일파만파로 퍼졌다. 이븐 사우드는 리야드의 지배자가 됐고 주변 부족들이 사우드 가문 곁으로 몰려들었다. 1904년 라시드 가문은 오스만 제국 군대와 함께 이븐 사우드를 공격해왔다. 처음에는 라시드-오스만 연합군이 우세했으나 이본 사우드는 정면 대결 대신 게릴라전으로 집요하게 적들을 괴롭혔다. 당시 열강들의 압박에 몰려 있던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에서의 전투에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스만군은 전장 상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퇴각했고 고립된 라시드 가문은 이븐 시우드 군대의 공격을 받고 궤멸됐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벌어진 긴 싸움의 최후 승자는 결국 사우드 가문이었다. 오랜 동안 증오의 대상이었던 튀르크인들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튀르크인들에게 빌붙어서 아라비아의 지배자 노릇을 해온 경쟁자까지 응징한 것이다.


Scene 07. 하심 가문, 영국과 거래하다 - 아랍국가의 탄생

165 샤리프 후세인은 자신이 요구하는 독립왕국의 영역을 아라비아 반도,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대 시리아, 그리고 이라크 지역으로 제안했다. 서아시아의 아랍어 사용 지역 대부분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이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웠다. 동맹국 프랑스가 시리아 연안 지역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시리아 연안 지역의 주민들 중에는 아랍인이 아닌 인구의 비중이 높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곳을 독립 아랍왕국의 영역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샤리프 후세인은 끝까지 대시리아 전 지역을 요구했다. 후세인과 맥마흔 사이의 서신은 이 문제에 대한 결론 없이 나중에 다시 협상하기로 미룬 채 어정쩡한 매듭을 지었다. 맥마흔은 서신을 통해 '대영제국은 메카의 샤리프가 제안한 국경선 내의 모든 지역에서 아랍인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양측은 아랍 반란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Scene 08.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무스타파 케말 - 터키공화국의 탄생

194 1921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21일 간 사카리아 강 인근의 산악 지대에서 한 치의 양보 없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터키 국민군과 그리스군 모두 용맹했지만 이겨야 하는 절실함은 터키 국민군이 앞섰다. 터키인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면 그리스인들은 싸움을 끝내고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더 컸다. 시간이 흐르고 시상자가 많아지면서 그리스군의 사기가 점점 떨어졌고 결국 그리스군이 물러났다. 양측 모두 합쳐 2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포로와 실종자까지 합치면 그리스군의 피해가 더 컸다. 터키 국민군의 경우 장교들의 희생이 컸다. 무스타파 케말은 대국민의회에 전투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사카리아 전투를 일컬어 '장교들의 전투였다'고 말했다.


Scene 09. 외세에 의해 쫓겨난 레자 샤 - 이란의 도전과 좌절

223 비록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란은 끊임없이 외세에 휘둘려 국부를 빼앗기고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이란 국민들의 울분은 점점 더 커졌다. 특히 모사데그를 몰아내는 데 미국이 배후에 있었음이 알려지자 이란 내부에서는 반미 감정이 크게 고조됐다. 이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유발하는 배경이 된다.


Scene 10. 유대인 국가를 세우다 - 이스라엘의 건국

233 많은 이들이 시오니즘을 유대교를 기반으로 한 종교적 운동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은 유대교를 깊이 신봉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 사회는 틸종교와 세속화 바람이 강하게 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아예 종교를 거부하는 이념도 유행했다. 시온주의자들 역시 이러한유럽 풍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다수였다. 유대인들이 탈종교화되면서 그들을 이어주던 유일한 끈인 유대교도 약화됐고 이와 더불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약해지고 있었다. 만약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마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은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247 이제 유엔을 통해 유대인의 국가 건설이 공식화됐다. 유엔의 분할안에 따르면 1,364,330명의 아랍인이 약 6 ,920㎢ 영토 차지한 반면 680,230명의 유대인들은 9,173㎢의 영토를 할당받았다. 양측이 절대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두 지역인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유엔 관할 하에 두기로 했다. 유대인들의 영토가 더 넓었으나 그 영토 안에는 황무지인 네게브 사막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실제로 유용한 토지는 아랍인들에게 더 많이 할당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유엔 총회를 통과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정치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만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Scene 11. 건국과 동시에 시작된 전쟁 -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제1차 중동전쟁)

286 전쟁이 끝난 1950년 6월 5일, 이스라엘 의회는 「귀국법」을 통과시킨다. '모든 유대인은 조국으로 이주할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귀국법」은 전후 이스라엘에서 통과된 법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계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하고 국가 건설에 참여하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Scene 12. 아랍 민족주의의 절정 -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통합

282 많은 아랍인들이 '전 아랍세계의 연대'라는 나세르의 메시지에 공감했지만 유독 시리아인들의 공감은 더 컸다. 앞서 설명했듯이 시리아는 계속된 정치적 혼란 탓에 국민들이 지쳐 있었다. 나라를 안정시켜줄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던 중 나세르가 이집트에서 등장해 제국주의 세력을 상대로 나라를 지켜냈다. 시리아 국민들은 나세르에게 환호했다. 심지어 시리아의 정치지도자들까지 나세르에게 매료됐다. 그들은 나세르가 전하는 '전 아랍세계의 연대'야말로 시리아가 진정으로 추구

해야 할 가치라고 여겼다. 


Scene 13. 아랍 민족주의의 패배 -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309 그들이 실제로 목격한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게 패한 이집트와 아랍 군대였다. 지금까지 아랍 민족주의에 열광했던 아랍인들은 6일 전쟁을 보면서 다시 묻기 시작했다. '아랍 민족주의가 아랍국가들이 처한 위기를 해결해줄 올바른 해답인가?' 많은 아랍인들이 다른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세르와 많은 지도자들이 역설해온 아랍 민족주의는 허울일 뿐 실제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평가가 제기됐다. 자연스레 나세르의 위신도 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아랍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제 나세르는 이집트 내에서도 반대세력의 저항에 고민하는 일개 독재자에 불과했다. 6일 전쟁의 패배로 나세르와 아랍 민족주의가 함께 몰락한 것이다.


Scene 14. 하산 알 반나, 무슬림형제단을 세우다 - 현대 이슬람주의 운동의 성장

324 사이드 쿠톱의 제자들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인 와하비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나세르의 탄압 후 추방된 이슬람주의 사상가들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줄곧 사우드 왕가는 공화정을 표방하는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랍 지역에서 공화정이 확산될 경우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왕정의 존속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우드 왕가로서는 나세르에게 저항하는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를 후대하는 것이 곧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입국한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청년들에게 이슬람주의 사상을 주입했다. 이때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 중 한 명 이 훗날 알 카에다의 지도자로 '글로벌 지하드'를 펼친 오사마 빈 라덴이다.


Scene 15. 찢겨진 정체성의 모자이크 - 레바논공화국의 비극

347 1946년 프랑스가 레바논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 프랑스 망명정부는 레바논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새로 들어선 프랑스 드골 정부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미 레바논 독립국가가 선포된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1945년 프랑스는 위임통치를 지속하기 위해 레바논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레바논인들의 분위기는 처음 프랑스 위임통치 정부가 들어섰을 때와 사뭇 달랐다. 무슬림뿐 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 합세해 독립 레바논공화국을 지키고자 프랑스와 싸웠다. 최초로 '레바논 민족주의'라고 할 만한 정서가 내부 구성원들을 단합시켰다. 결국 대내외 비난 여론 속에서 프랑스가 물러갔고 레바논은 명실상부한 독립국가가 됐다.


352 민족국가로서 레바논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국가를 구성하는 주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중동국가들이 다양한 정체성 간의 갈등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레바논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그 나라를 구성하는 주류세력이 비주류를 억압하거나 동화시킴으로써 국가를 유지해 나간다. 반면 레바논은 확고히 다른 집단을 압도하는 주류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여러 세력들 간에 불완전한 타협으로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하지만 갈등이 분출되면 국가가 이런 갈등을 힘으로 누르거나 조정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가 인위적으로 짜 맞춘 모자이크 국가 레바논은 오늘날 중동의 가장 실패한 민족국가라는 표본이 됐다.


Scene 16. 팔라비 왕정, 무너지다 - 이란의 이슬람혁명

371 이란은 전혀 새로운 국가가 됐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이슬람주의 공화정 이슬람 법학지들이 국가 권력의 최상층에 존재하면서 통치의 핵심을 장악해 역할을 하는 구조였다. 종교가 사실상 국가기관이 된 것이었다. 이는 종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시켰으나 반대로 훗날 종교가 세속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Scene 17. 승자 없는 8년 전쟁 - 이란·이라크 전쟁

378 신생 이라크 왕국은 공동의 정체성을 갖춘 민족국가 구성이 힘든 이질적 집단의 조합이었다. 게다가 수니파인 파이잘 국왕을 중심으로 이라크 정부가 수립되자 시아파 부족들은 건국에 참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인구가 더 적은 수니파가 이라크의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하지만 국가 구성원들은 이라크 왕국에 애국심이 없었다. 사실 '이라크'라는 나라 이름조차 이들에게는 낯선 단어였다.


392 1988년 8월 20일 이란과 이라크는 휴전에 돌입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거의 8년 만이었다. 호메이니로서는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국민들에게 '이맘'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던 그의 위신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메이니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경제는 황폐화됐다.


393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호메이니와 사담 후세인 모두 야망이 꺾이고 말았다. 혁명을 수출하려던 호메이니의 야심은 그의 체면이 구겨지면서 막히고 말았다. 이란은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당할 위기에 처했고 시아파 이슬람혁명도 빛을 잃었다. 이란으로서는 혁명의 수출이 아니라 피폐해진 국내 상황을 수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사담 후세인 역시 아랍권의 리더가 되겠다는 포부를 접어야 했다.


Scene 18. 팔레스타인의 저항 - 인티파다

407 UNLU의 영향력은 가자지구에 미치지 못했다. 가자지구에서 뿌리를 내린 이슬람주의 운동 조직들 일부가 연합지도부 구성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티파다가 진행되면서 가자지구에서 급성장한 조직이 하마스였다. 하마스는 원래 무슬림형제단 팔레스타인 지부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다. 


408 인티파다가 수그러들 기색이 없이 계속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전례 없이 강력한 진압정책을 폈다.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에 전기와 통신선을 끊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시위를 주동한 인물의 경우 수배령을 내렸고 나아가 아예 그의 집을 철거해버리는 강력한 보복정책을 병행했다. 시위대가 매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로수를 모두 뽑아버리기도 했는데, 심지어 과수원 전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Scene 19. 압둘라 오잘란 체포되다 - 쿠르드노동자당의 투쟁

402 현재 쿠르드족은 중동에만 약 3,000만 명 이상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많은 쿠르드 인구가 사는 나라는 터키이며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 각각 수백만 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그러나 국경을 지우고 보면 결국 이들이 사는 지역은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이른바 '쿠르디스탄’'로 불리는 곳으로 터키 동남쪽, 이

라크와 시리아 북부, 그리고 이란 북서부에 걸친 지역이다.


Scene 20. 지하드, 미국을 습격하다 - 알 카에다와 9·11 테러

454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었다. 원래 이라크는 시아파 아랍인, 수니파 아랍인, 쿠르드족이라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 세 집단을 인위적으로 묶어 놓은 국가였다. 이라크에서는 장기간 수니파의 독재가 이어졌으나 사담 후세인이 축출된 후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새롭게 권력을 장악했고 이에 수니파가 저항하는 구도가 됐다. 


Scene 21. 모든 정체성의 충돌 - 시리아 내전

458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시리아내전에는 중동에서 벌어지는 온갖 정체성의 투쟁이 모두 등장한다는 점이다. 처음 시리아 사태는 세속 독재정부에 맞서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독재 대 민주주의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곧 알라위파인 아사드 대통령을 위시한 시아파 집권세력에 저항하는 다수 수니파의 싸움으로 변질됐다. 시아파의 맹주 이란이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전쟁에 개입하자 종파 간 분쟁의 성격이 더욱 명확해졌다. 여기에 쿠르드족이 독립국가 건설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전쟁에 참여하면서는 소수민족 독립전쟁의 성격도 가미됐다. 이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 IS 가 발호하면서 전쟁이 크게 달라졌다. 이슬람 근본주의 대 세속주의의 전쟁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두 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으로까지 치달아 전쟁의 관계망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489 100여 년 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중동에 신생국가의 경계선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유럽식 국민국가(Nation State) 라는 외피를 입었으나 실제로 그 안에 국민 (Nation)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이란 공통의 정체성을 가진 국가 구성원을 의미한다. 국민들 간에는 자신들이 국가로부터 동등하게 법적 대우를 받으며 공통의 역사 · 언어 · 문화를 가졌다는 관념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는 이 같은 국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시아파와 수니파는 서로를 적대하고 쿠르드족은 따로 나라를 만들고자 하며 이슬람주의자들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기촌 국경을 무시한 채 독자적인 영토를 가진 새 나라를 선포했다 그들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영토 안에 살고 있었지만 진정한 '국민'은 아니었다. 이런 문제점들은 중동의 다른 아랍 국가들에서도 나타난다. 이라크는 물론이고 레바논도 처참한 내전을 겪으며 아직까지 통합된 국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갈등 중인 이스라엘도 그렇고 부족 간 내전이 벌어지는 예멘 또한 처지가 비슷하다. 중동에서의 정체성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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