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7. 20.
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 앙드레 지드 지음, 동성식 옮김/민음사 |
좁은 문
전원교향곡
배덕자
작품 해설
작가 연보
좁은 문
15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스스로 겪어 내는데 온 힘을 다 쏟았고, 그 탓에 나의 기력은 완전히 쇠진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나의 추억을 아주 단순하게 적어 나가겠다. 이 추억이 여기저기 토막 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꿰매어 맞추거나 연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새로 꾸며 내는 일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추억을 꾸며내는 데 쏟는 노력이 그 추억을 이야기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마지막 즐거움마저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난 열두 살도 채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의사로 계시던 르아브르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아무런 이유도 없게 되자, 어머니는 내 교육을 위해 더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파리에 이사 갈 작정을 하셨다. 어머니는 뤽상부르 공원 근처에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빌리셨고, 애슈버턴 양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가족이 없었던 플로라 애슈버턴 앙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가정교사였다가 나중엔 말벗이 되더니 곧 친한 친구가 되었다. 지금도 나에게는 늘 상복 차림으로 기억되고, 한결같이 온화하고 슬픈 표정인 두 여인 곁에서 나는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상당히 오랜 뒤의 일로 생각되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아침에 쓰는 모자에 겁은 리본 대신 연보랏빛 리본을 단 것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아, 엄마! 그 색깔은 엄마한테는 어울리지 않아요!" 다음 날 어머니는 다시 검은 리본으로 바꿔 다셨다.
29 나는 알리사의 방문 앞에 다다른다. 잠시 기다린다. 웃음소리와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아래충에서 올라온다. 아마도 그 소리가 내 노크 소리를 덮어 버렸는지,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문을 밀자 조용히 열린다. 방 안이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알리사의 모습은 금방 눈에 띄지 않는다. 그녀는 저무는 저녁 햇살이 스며드는 창문을 등진 채 침대 머리에 꿇어앉아 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돌아보기는 했지만,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녀가 이렇게 속삭인다. "아! 제롬이 돌아왔니?" 나는 그녀에게 입 맞추려고 몸을 굽힌다. 그녀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다……. 바로 그 순간이 내 생애를 결정지었다. 지금도 괴로움 없이 그 순간을 회상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알리사가 슬퍼하는 이유를 아주 어렴풋하게만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닥거리는 그 작은 영혼과 흐느낌으로 온통 뒤흔들린 연약한 육신에게 그 슬픔이 너무도 벅차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느꼈다.
33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하고 보티에 목사님은 말씀을 끝내셨다. 그분은 어떻게 하여 그 좁은 문을 찾아낼 것인가 설명하셨다……. "찾는이가 적음이니라." 나도 그 적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 설교가 끝날 무렵 나는 정신적으로 너무나 긴장했기 때문에, 예배가 끝나자 마자 외사촌 누이를 만나려 하지도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벌써 내 결심(이미 나는 결심해 버렸기 때문이다.)을 시험해보려고 마음먹고서, 그리고 당장 그녀로부터 멀어짐으로써 더욱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37 그 당시 내가 아직 어리기는 했지만, 외사촌 누이에 대해 느끼던 감정을 지금 와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해서 잘못된 것일까? 그 후 내가 경험한 어떤 것도 그보다 더 사랑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 욕망으로 인한 불안이 아주 뚜렷한 모습을 띠게 되어 괴로움을 겪는 나이가 되어서도, 나의 이 감정은 별로 성격을 달리하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 나는 오직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만을 바랐고 그 후로도 그녀를 보다 직접적으로 소유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공부, 노력, 경건한 행위, 이 모든 것들을 나는 알리사에게 신비롭게 바쳤으며, 오직 그녀만을 위해 하는 일조차 종종 그녀가 모르게 하는 것이 한층 덕행을 닦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나는 일종의 독한 술 같은 겸양에 도취했으며, 아! 슬프게도, 나 자신의 즐거움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나에게 어떤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일에는 만족할 수 없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41 알리사는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도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 나는 떨면서 그녀 손을 잡았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인간이 되든지, 오직 너를 위해서이고 싶어." "하지만 제롬, 나 또한 너를 떠날지 모르잖아?" 나는 나의 영혼을 말 속에 담아 대답했다. "난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거야." 그녀는 어깨를 약간 으쓱했다. "넌 혼자서 걸어갈만한 힘이 없니? 우리는 누구나 오직 혼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해." "하지만 나에게 그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은 바로 너야." "왜 너는 그리스도 말고 다른 인도자를 찾으려 하니 ……? 우리 두 사람이 저마다 서로를 잊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보다 서로에게 더 가까울 때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 우리가 결합되도록 나는 매일 아침저녁마다 하나님께 기도해"하고 나는 그녀 말을 가로막았다. "너는 하나님 안에서 결합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니?" "아니, 마음속 깊이 잘 알아. 같은 예배 대상 안에서, 서로가 상대방을 발견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거야. 네가 어떤 대상에게 예배 드린다는 걸 알고서, 나 역시 그 대상에게 예배를 드리는 건 바로 그 안에서 너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어." "너의 예배는 순수하지가 않구나." "나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지 말아 줘. 비록 그곳이 천국이라 해도, 거기서 너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난 무시할 거야."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다소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140 "성스러움……." 그녀 목소리는 너무도 낮았기에, 나는 그 말을 들었다기 보다 차라리 짐작한 것이었다. 내 모든 행복은 날개를 펼치고, 나에게서 도망쳐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너 없이는 난 거기에 이르지 못해" 나는 그녀 무릎에 이마를 묻고 슬픔 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어린애처럼 울면서 말을 이었다. "너 없이는 난 못해 너 없이는 난 못해!" 그러고서 그날도 다른 날들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그날 저녁 알리사는 그 작은 자수정 보석을 목에 걸지 않고 나타났다. 나는 충실하게 약속을 지켜, 다음 날 새벽 그곳을 떠났다.
156 그러자 그녀는 곧 대답했다. "하지만 제롬,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 지금 넌 환상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아니, 결코 환상이 아니야, 알리사." "상상속인물이지." "아아! 그 인물은 내가 만들어 낸 게 아니야. 그녀는 내 연인이었어. 나는 그녀를 다시 부르고 있어. 알리사! 알리사! 당신은 내가 사랑했던 여자였어.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한 거지?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버린 거야?" 그녀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꽃잎을 뜯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제롬, 왜 그전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고백하지 않니?" 나는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사실이 아니니까! 사실이 아니니까! 내가 지금보다 너를 더 사랑한 적은 없으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면서,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또 그러면서도 지난 날의 나를 그리위하고!" "나는 내사랑을 과거에 묶어 둘 수 없어." 내 발 밑에서 땅이 꺼져 내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에나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랑도 다른 것들과 함께 지나가 버릴 걸." "내사랑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 있을거야." "그 사랑도 서서히 약해져 갈 걸. 네가 아직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알리사는 이제 너의 추억 속에서만 존재해 언젠가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추억만 남는 날이 올거야." "너는 마치 내 마음속에서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대신할 수 있다거나, 또는 이젠 내 마음이 더 이상 사랑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너는 너 자신이 날 사랑했었다는 사실이 이젠 생각나지도 않니?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나를 괴롭히며 즐거워할 수 있니?" 나는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알리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한 건 없어." 하고 나는 그녀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좀 더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한마디면 모든 게 다 설명될 텐데, 왜 그 말을 터놓고 못하니?" "무슨 말?" "난 나이가 많아."
158 내가 서서히 그녀를 실제 그녀 이상으로 높여 세웠고,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으로 장식함으로써 그녀를 나의 우상으로 만들어 왔지만, 그러한 노력에서 피곤함 외에 무엇이 남았나......? 본래의 그녀 자신으로 내던져지자 마자 그녀는 곧 자기 수준, 그 별것 아닌 수준으로 내려와 버렸으며, 나 자신도 그 수준까지 내려와버린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수준에서는 더 이상 그녀를 원하지 않았어. 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그녀를 만나 함께 하려는, 그 미덕에 대한 힘겨운 노력은 얼마나 터무니없고 공상적인 것 같았는지. 조금이라도 자부심이 덜했던 들 우리 사랑은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대상 없는 사랑에 대한 집착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고집을 세우는 것일 뿐, 더 이상 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에 대한 충실이었나? 과오에 대한 충실이었다. 가장 현명한 길은 나 스스로 잘못 생각했음을 인정하는 것 아니었을까……?
165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멈췄다. 나는 거의 적의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왜 네가 직접 주지 않고?" 그녀는 말을 계속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 입술은 흐느껴 우는 아이의 입술처럼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눈빛은 인간을 넘어선 천사 같은 아름다움으로 그녀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알리사! 도대체 내가 누구하고 결혼하겠어? 내가 너 밖에 사랑할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러고는 갑자기 정신없이, 난폭할 정도로 그녀를 껴안으며, 나는 그녀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얼마 동안 나는 내게 기대어 반쯤 몸을 뒤로 젖힌 채, 온몸을 내맡긴 듯한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그녀 눈길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꺼풀이 잠기고, 비할 데 없이 또렷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우리 서로를 불쌍히 여겨 줘, 제롬! 아! 우리 사랑을 다치게 하지마."
170 나의 소중한 제롬, 언니의 죽음이 오빠에게 얼마나 깊은 슬픔을 가져올지 나도 잘 알아. 편지를 쓰는 내 마음도 찢어질것만 같아. 난 이틀 전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지금 이 편지도 간신히 쓰고 있어.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다못해 에두아르나 로베르에게조차도, 오직 우리 둘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알리사의 소식을 전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는 어지간히 나이 든 가정주부가 되었고, 뜨겁게 불타오르던 과거도 쌓인 잿더미에 덮여 버린 지금, 오빠를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어해도 되겠지. 언젠가 볼 일이 있거나 구경 삼아 님에 오거든, 애그비브에 한번 다녀가. 에두아르도 오빠를 알면 기뻐할 거고, 우리 둘이서 알리사 얘기를 할 수도 있겠지. 잘 있어. 나의 소중한 제롬.
206 "오빠는 참 좋은 아버지가 될 거야!" 웃으려고 애를 쓰며 쥘리에트가 말했다. "그래 언제까지 결혼하지 않을거야?" "많은 것들을 잊어버릴 때까지." 그러자 나는 쥘리에트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것을 곧 잊고 싶어?" "언제까지나 잊고 싶지 않아." "이리 와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하며 좀 더 작은방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방 안은 이미 어두웠고, 그 방 문 하나는 그녀 방으로, 다른 하나는 응접실로 나 있었다 "잠시라도 틈이 나면 난 이곳으로 숨어들어 와. 집 안에서 제일 조용한방이지. 난 거의 여기가 삶의 피난처 같은 느낌이 들어." 이 작은 응접실 창문은 다른 방창문들처럼 소란스러운 거리 쪽으로 나지 않았고, 나무들이 서 있는 안마당 같은 곳으로 나 있었다. "같이 앉을까." 그녀는 안락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207 "그렇다면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랑을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래, 줄리에트." "그리고 날마다 삶의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도, 그 사랑이 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 저녁 어스름이 잿빛 밀물처럼 밀려와 사물 하나하나를 어둠에 잠기게 했고, 그 어둠 속에서 사물들은 되살아나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는 알리사의 방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쥘리에트가 그 방 가구들을 모두 이곳에 모아 두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는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그녀의 얼굴 윤곽을 뚜렷이 볼 수 없었기에, 그녀가 눈을 감았는지 어떤 지는 알 수 없었다. "자! 이젠 잠에서 깨어나야 해 ······."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딱 그녀가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내딛더니, 기운이 다 빠진 듯 곁에 있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램프를 들고 하녀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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