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A.존슨: 키르케고르 사상의 열쇠


키르케고르 사상의 열쇠 - 10점
하워드 A.존슨 지음, 임춘갑 옮김/다산글방


첫 번째 강연: 근대문화의 위기의 예언자로서의 키르케고르

두 번째 강연: 현대 실존주의의 비판자로서의 키르케고르

세 번째 강연: 윤리학자로서의 키르케고르

네 번째 강연: 키르케고르와 부조리한 것

다섯 번째 강연: 부조리한 것의 실존적 귀결

부록 : 키르케고르 소전(小)






첫 번째 강연: 근대문화의 위기의 예언자로서의 키르케고르

18 19세기의 유럽과 미국은,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취급한다는 것이 점점 곤란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리는 미신적이고 모호하고 과학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지성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바가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관하여 온갖 종류의 의혹에 사로잡혔다. 겉으로 볼 때는 그들의 지적인 의혹도 그럴 법 하였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그것보다도 깊은 곳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았다. 어려움은 그리스도교의 비과학적인 성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지식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전혀 아무런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였던 사실에 있다고 본 것이다.


22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자기의 자식들에게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하였다. 아이들이 세례를 받아두지 않으면, 후일에 그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난처해지고 시민으로서도 손해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송장을 어떤 식으로든지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그것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기장 위엄있고 또 편리한 방법을 강구해 준다. 몇몇 괴짜를 예외로 하고는 어떤 사람도 신의 존재를 진정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 단지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 같이 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어른이 되었다. 인간은 이제야 자기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안 것이다.


33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한다고 해도 또 모든 인간이 만장일치로 민주주의적인 결의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한다고 해도 궁극적인 진리에 관한 한 하나님은 절대적인 독재자이시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제거하려고 한 절대자인 것이다. 오히려 현대인은 이성 속에서 자기의 절대자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성'은 영어에서 그 머리글지를 대문자로 서서, 마치 그것이 신이나 여신과도 같은 취급을 받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음미해 보면, 사실은 투표에 의하여 진리를 결정키 위하여 함께 모인 자율적인 이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47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외견상으로는 무신론이지만, 키르케고르는 그것이 본질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주의, 즉 국가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의이고, 자기야 말로 구세주라고 주장하며 군중에게 호소하려는 주의라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강점은 분명히 그 속에 종교적인 요소, 아니 그리스도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 요소를 악마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48 그러므로 닥쳐올 싸움은 서로 경쟁하는 구체적 종교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그리고 역사가 시실상 증명한 바와 같이, 세속적인 인간이나 기계화된 인간이나 비인간화된 인간은, 전체주의 국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전체주의 국가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자율을 희생당하고 만다는 점을 키르케고르가 두려워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두 번째 강연: 현대 실존주의의 비판자로서의 키르케고르

53 만약 완전한 사회라는 것이 진화의 종국적인 결과로서 이루어지게끔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것이 그 연극의 의미라면, 이 세계사라는 희곡은 무슨 까닭에 이다지도 한없이 완만하단 말인가? 느린 진화의 걸음걸이가, 마치 무거운 짐을 끄는 사람들을 그 수레바퀴 밑에 사정없이 짓밟는 쥬가나트와도 같이 천천히 회전하는 동안 어찌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인명이 낭비되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53 만약사람들이 오로지 인류의 진화와 인간의 세대만을 가정한다면, 이 세계사의 과정을 진행시킨다는 단지 그 목적만을 위하여 대(代)에 대를 이어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개인의 무리를 써버리는 신(神)의 낭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헤겔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끌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해겔학파는 영원의 상(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영원의 상 밑에 설 수 있는지를 키르케고르는 알 수 없었다) 역사의 일체와 여러 제국의 흥망을 개관하고 그것을 매우 좋다고 하였다. 실로 그것은 세계에 있어서는 신의 걸음걸이였기 때문이었다.


62 그가 헤겔적인 관념론에서 마키아벨리적인 정치로의 숙명적인 진전의 가능성을 예견한 사실은, 영원히 그의 공적으로 돌려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신이 주권자의 행세를 못하게 되면, 그때는 인간이 그것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일에 실패할 때, 거기에는 독재자가 나타난다. 이러한 가능성을 저 멀리 내다보면서 키르케고르는 헤겔적인 국가의 신화에 범신론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그의 특유한 불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이 지닌 인간 개인에 대한 외람된 범신론적인 멸시 그것이다.


80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옳은지 어떤 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인간은 항상 불확실 속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 위험에서 피할 길은 없다. 만약 확실성을 얻기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늦는다.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만큼 행동하라. 그것이 인간의 자유인 것이다. 또 그것이 인간의 공포(불안)다. 따라서 인간은 무서운 자유 속에서 자기를 어떠한 존재로 만드느냐 하는 것을 결정해야만 한다. 사르트르가 희망하는 것은, 우리가 인류를 유익하게 하는 정치적 목적에 (그것이 가능할 때) 가담하기로 결단하고 전력을 다하여 (그것이 계속되는 한) 일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권하는 것은, 이렇듯이 낙관적인 고집 - '환경이라는 손아귀 속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고집을 유지하는 일이다.


83 키르케고르의 판단에 의하면,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인 윤리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윤리는 결국에는 기력을 잃고 만다. 호흡을 계속하지 못하게 된다. 생명의 비극감에 압도되고 만다. 일체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무의미할 때 윤리적인 노력은 숨이 끊어지고 만다. '의연한 절망', 즉 불굴의 절망에 얽힌 진정한 난점은 그것이 끝내는 결국 굴복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강연: 윤리학자로서의 키르케고르

97 논의를 통하여 우리들은 신과 자유와 영혼의 불멸성의 존재를 개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의만으로는 의혹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가 없다. 그 의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신잉의 비약을 감행해야만 한다.


97 그러나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어떨까. 과연 그는 헤엄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을까. 그가 자기를 물에 내맡기는 신앙이 없는 한, 결코 헤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빠져 죽을는지도 모를 위험한 처지에 내놓지 않고서는 결코 헤엄을 배울 수가 없다. 깊은 곳으로 뛰어 들어가야만 한다. 모험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없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이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물 속에 뛰어 들어 헤엄을 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절망이라는 심연을 앞에 놓고 선 인간이 있다. 그리고 이 때에 그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죽음의 피안에 있는 영원이라는 영역에는 보상과 형벌이 있을 도덕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과감한 모험을 하라고 요청받고 있다.


99 즉 영원한 나라가 있어, 거기에서는 악은 제거되고 정의만이 있다. 그곳은 죽음의 문 저쪽에 있는 곳으로서 싸움도 없거니와 눈물이나 고통도 없는 새로운 세계다. 그 세계에서 기뻐하고 즐겨라. 거기에 너의 절대적인 선이 있고 거기에 너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이 실행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천국을 얻을 수 있다.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명시되어 있다 ━ 도덕적 율법에 복종하라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너의 생명을 바쳐라. …그러면 율법을 주신 주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무한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은 키르케고르의 온갖 정열을 끓게 하였다. 키르케고르가 골수에 사무치도록 바랐던 것은 이 무위(無爲)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111 이제 여러분께서는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 것이다. 천천히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사이에 키르케고르는 우리를 유신론적인 휴머니즘으로부터 사실상 그와는 반대되는 것에게로 이끌어 온 것이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우리를 그가 말하는 이른바 종교성 A로 끌고 온 것이다. 종교성 A는 인간이 이윽고 신의 표준으로서는 헤아려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고뇌에 넘친 자각에 도달할 때, 즉 인간은 신의 표준에는 부합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망과 더불어 알았을 때 일어난다. 인간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 율법의 요구는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파산한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하고 있다.


네 번째 강연: 키르케고르와 부조리한 것

119 자기를 구제할 수 있다는 환상이 윤리의 실존적인 예비학교 안에서 분쇄되기까지는 속죄주에 관한 종교성 B의 사신은 단지 허무맹랑한 부조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만 생각된다. 왜냐하면 종교성 B는 이중의 역설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부조리한 이 역설의 첫째가는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본성에 있어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바로 그 본성과는 정반대의 존재, 즉 시간적인 존재로서 나타나셨다. 둘째가는 역설의 뜻은 다음과 같다. 그 본성에 있어서 시간적인 인간은 첫째 번의 역설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 본성과는 정반대의 존재, 즉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135 키르케고르는 신약성서 속에서 다시 더 저항할 수 없는 사랑에 부닥쳤던 것이다. 이 사랑은 키르케고르로부터, 이에 응답하는 사랑과 신뢰를 이끌어 내는 사랑이고, 그로 하여금 그렇듯이 은혜로운 하나님을 따르고 그 하니님에게 봉사하려고 작심케 한 사랑이었다.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종언이고, 키르케고르의 신앙의 탄생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완성은 교의 혹은 율법 혹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격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인간으로서 존재하였다고 하는 주장이다. 신앙의 대상은 이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 이신 실재이다. 즉 그분이 참으로 존재하셨다는 사실이다.


135 신앙의 답은 따라서 무조건적인 예가 아니면 아니오 중의 어느 하나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리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장되고 있는 하나의 사실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이다. 당신은 그가 참으로 존재하였다고 생각하는가, 생각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예수는 자신이 그렇다고 주장한 바로 그런 존재였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는 광기의 천재였던가, 어느 한 쪽이다.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신앙을 가지든가 아니면 그에게 실족하든가, 어느 한 쪽이다. 오로지 신앙이냐 실족아니냐가 있을 뿐이다. 제3의 길은 없다. 예수는 제3의 길을 남기시지 않으셨다. 남기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선택하라! 당신은 결정을 해야 한다. 그것도 이제 곧, 당장에! 왜냐하면 죽음이 임박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어물 어물하고 있노라면, 궐석재판을 통하여 죽음이 당신 대신으로 그 결정을 내릴 것이다.


다섯 번째 강연: 부조리한 것의 실존적 귀결

154 철학적으로 실존주의자인 키르케고르는 신학에 있어서도 실존주의자이다. 그는 현실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랑의 활동에 인격 전체가 투입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한낱 지성적 명제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실제로 실험할 수 있는 실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이 응접실의 아늑한 기분 속에 안주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교는 일련의 교리의 명제집이고, 사람들은 단지 그 교리를 학문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뿐인 종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하여 증명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사상을 희롱하고 있음에 불과할 따름인 것이고, 실존적으로는 사람들이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른다.


155 자신의 가르침의 진리를 증명하려고 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가르침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결코 밝히기를 원치 않았던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증명만을 사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요한복음 7장 17절)라고 하는 증명이다. 이것은 인간이 신앙의 결단이 어떤 심각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긴장된 장면에 부닥치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즉 그것은 대담한 모험이다.


157 아마도 이제는, 즉 다섯 차례의 강연을 끝낸 지금, 우리는 키르케고르의 지극히 교묘하고 간결한 그리스도교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정의란, '인간의 심각하고도 비참한 경험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노력, 이 세 가지가 그리스도교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

165 키르케고르의 영감과 사상방향 및 최후의 목적은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교에 특유한 실존형식'의 근본을 찾아내서 그것을 기술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71 그러나우리가 앞서 했던 첫 번째 강연을 잠깐 되돌아본다면, 키르게고르의 두 번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도 역시 분명해질것이다. 그는, 고도로 개인화된 종교의 수단으로써 그가 '군중'이라고 부론 것, 그리고 하이데거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분쇄해 버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확신하였다. 만약 개개인 각자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 대하여 엄격히 책임을 느끼는 동시에 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기는 하나님에게는 비할 바 없을 만큼 개인으로서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는 비인격적인 것은 소실되고 말 것이다. 이름도 없고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한 군중 대신에,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개인이 존재할 것이다.


172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들은 국가에 대하여 비판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시민이 될 망정 결코 국가에 대한 광신자는 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군중'이라고 부르는 저 무책임한 것이 되어 아무런 뉘우침의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 안에, 아무리 많은 혼란과 사악과 가능한 것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 개개인을 붙들고 볼 때에는 그 사람들 속에는 반대로 많은 진리와 선과 사랑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 나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진정한 인간성이라고 그는 말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