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경: 대승기신론 강해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8. 20.
대승기신론 강해 - 한자경 지음/불광출판사 |
해제: <대승기신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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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대승기신론>의 세계
26 대승불교 유식의 ‘유심(唯心) ’
일체의 법이 모두 공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락을 안겨주며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이 현상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일체가 연기한 것이라면, 그러한 연기를 성립시키는 터전은 무엇인가? 일체가 공이라고 설하는 공사상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유식불교는 바로 이러한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유식불교는 우리의 일상 의식이 실재라고 여기는 현상세계는 사실은 우리의 심층 마음이 그려 놓은 허상일 뿐이며 따라서 가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유식불교가 이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요가수행을 통해 일상적 표층의식(제 6의식)보다 더 심충에서 활동하는 마음(재8아뢰야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상의식에게는 객관적 실재로 여겨지는 눈앞의 세계가 실은 심층 마음의 활동 산물이라는
것을 통찰한 것이다. 유석불교에 따르면 우리가 실재라고 집착하는 자와 세계, 즉 개체적 유근신과 공통적 기세간은 모두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형성해 놓은 대상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 일체 경계가 식의 전변 결과일 뿐이기에 오로지 식만 존재하고 외적 경계는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식무경'을 주장한다.
28 대승불교 기신론의 일심(-心)
유식이 개체적 유근신과 공통적 기세간을 형성하는 아뢰야식의 식전변 과정을 밝힘으로써 우리의 심층 마음의 생멸활동을 강조하고 있다면, 기신론은 그렇게 생멸활동하는 우리의 심층마음 자체는 생멸의 바탕으로서 불생불멸의 심체라는 것을 강조한다. 마음은 생멸활동을 통해 찰나 생멸하면서 변화하는 상으로서 유근신과 기세간을 형성하지만, 그렇게 활동하는 마음 자체는 일체의 생멸상을 여윈 불생불멸의 진여이고 여래장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기신론은 유식에서 심층 아뢰야식이 단지 생멸의 특징만을 갖는 염오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불생불멸의 진여성을 갖는 염정 화합식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아뢰야식은 유위와 무위, 생멸과 불생불멸의 화합식인 것이다. "심의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거하기 때문에 생멸심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불생불멸과 생멸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아뢰야식'(아리야식)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기신론은 현상의 생멸상과 마음 자체의 불생불멸성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상 세계를 형성하는 중생의 생멸심 안에 불생불멸의 진여심이 있다는 것, 진여심이 곧 여래법신이며 그 안에서 일체 중생은 모두 하나라는 것, 모두 일심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이 현상 세계 일체 경계가 모두 하나의 마음, 일심의 표현이라는 것은 곧 우리 각자의 중생심이 표층에서는 모두 각각 별개의 존재처럼 보여도 심층에서는 결국 하나라는 것, 우리 각자의 마음 바탕이 각각의 체가 아니라 하나의 체라는 것, 하나의 일심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해서 기신론은 대승의 불이법문을 완성하며 동체대비의 보살시상을 전개한다.
대승 이전의 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출가승 위주의 해탈 지향적 불교와 보살심 위주의 중생 구제적 불교의 차이로 설명된다. 대승 이전의 불교는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를 이원화하여 중생적 생사를 버리고 깨달음에 의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한다. 반면 대승은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법문에 따라 중생의 생사까지도 긍정하고자 한다. 이는 대승 이전의 불교가 아공에 철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기를 바라는 데 반해, 대승은 아공과 더불어 법공도 함께 강조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대승은 세간이나 출세간, 생사나 열반이 모두 한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경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승에서 중요한 것은 중생 각자가 자신 안의 불생불멸의 진여법신을 자각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일체 중생이 진여로서 모두 하나라는 대자대비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진여법신의 증득을 위해 기신론은 대승에 대한 믿음, 곧 진여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고자 한다.
30 『대승기신론』이 제시하는 대승의 존재론
불교는 일체 존재 또는 일체 존재의 진리를 '법(法)'이라고 부른다. 석가모니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 자신이 깨달은 법은 자신의 깨달음과 상관없이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이 법의 근원 내지 근본을 '법의 기체' 또는 '법 자체'라는 의미에서 '법체'라고 한다. 법체는 곧 우주의 근원 내지 우주적 진리 자체이다. 불교는 이 법체를 다시 '법의 몸'이라는 의미에서 '법신'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죽은 물질과 구분해서 살아 있는 생명체만을 몸이라고 부르듯이, 우주의 근원으로서의 법체는 단순히 죽은 물체 도는 추상적 법칙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법신은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구체화하며 현실화한다. 이러한 법신의 현현 내지 표현을 불교는 응신과 보신으로 구분한다.
응신은 화신이라고도 하며 우리의 일상적인 분별의식 내지 육안에 대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 모습의 몸이다. 기원전 6세기경 이 지구상에 태어나서 80년간의 일생을 살다가 간 석가모니불은 그 본체인 법체 내지 법신이 구체적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 화신불이다. 진리와 하나 되어 진리를 구현한 삶을 살다가 간 예수나 마호메트, 장자나 최제우 등 모든 선각지들은 법신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신은 수행을 통해 법안이 열린 후 그 결과인 보로서 알아차리게 되는 몸, 즉 깨달은 청정한 마음만이 볼 수 있는 몸이다. 수행자가 삼매 중에 보게 되는 부처나 보살의 모습, 기도에 응답하는 신의 모습 등은 보신에 해당한다.
기신론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응신과 보신으로 화하는 우주의 근원 내지 본체인 법신은 일체 중생 바깥 어딘가에 실재하는 외재적 인격신이 아니라 모든 중생 내면의 빛, 내면의 광명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의 몸과 그 몸들이 의거해 시는 우주 세간은 시간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모든 생멸하는 것을 바라보는 중생의 눈, 그 생멸을 느끼고 지각하는 중생의 마음은 생멸 너머의 빛, 불생불멸의 광명, 바로 법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 중생심 안의 불생불멸의 진여심, 여래법신이다. 변화하는 생멸의 지평 너머 일체 중생 안에서 하나로 빛나는 광명, 즉 일심이다. 결국 중생은 불생불멸의 진여심과 인연 따라 생멸하는 생멸심의 양면을 가진다. 이로써 기신론의 '일심(一心) 이문(二門)'이 성립한다.
일체 중생 안의 일심과 그 일심에 대한 이문인 진여문과 생멸문을 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에 비유해 볼 수 있다. 하얀 도화지에 온갖 색깔로 갖가지 모양이 그려진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늘 하얀 도화지에 주목하지 않고 그 위에 그려진 사물만 보게 된다. 도화지 위 그림은 더 그려져 늘어날 수도 있고 일부가 지워져 줄어들 수도 있다. 채색된 사물은 그렇게 생멸한다. 반면 채색된 사물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채색된 사물과 달리 생멸하지 않는 바탕이다. 그리고 채색된 사물은 흰색 도화지에 의거하여서만 존재한다. 즉 그려진 사물은 도화지 같이 실유가 아니라 도화지에 의거하여서만 존재하는 가유이며 따라서 자기 자체가 없고 도화지를 자신의 체로 삼는다.
이 비유에서 도화지 위에 그려진 사물은 바로 우리 눈 앞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 즉 돌과 별, 나무와 새 그리고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물아 의거하는 바탕, 불생불멸의 도화지는 무엇인가? 그려진 사물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그 위에 채색된 사물에 의해 가려지므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림에서 사물만 보지 바탕인 도화지를 보지 않는다. 그렇듯 우리는 세계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사물만 바라볼 뿐 그 바탕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바탕(사물의 근거)을 찾고자 하면, 우리는 그 바탕을 사물과 다른 별개의 것으로 여김으로써 사물 바깥에 신을 세우는 외재신론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그 바탕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게 된다. 근거는 사물 바깥에 있거나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에 따르면 바탕은 그 위에 그려진 사물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생멸하는 사물과 불일불이의 이 바탕을 기신론은 생멸하는 중생 안의 불생불멸의 진여심이라고 부른다. 우주 세간 일체 제법은 도화지 위의 그림처럼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마음의 상이며, 따라서 그림의 바탕인 도화지는 바로 그런 상을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화지와 그림, 바탕과 사물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양면이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이지만, 문은 두 영역을 모두 포괄한다. 바탕의 도화지에서 그 도화지 위에 그려진 생멸하는 현상세계로 나아가는 문이 심생멸문이고, 그려진 그림에서 그 그림의 바탕이 되는 불생불멸의 진여심으로 나아가는 문이 심진여문이다. 그렇지만 문은 두 영역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은 방향만 다를 뿐 두 영역을 모두 포괄한다. 기신론에서 심진여문은 일체 생멸 경계를 공으로 포괄하고서 그 바탕이 되는 불생불멸의 진여만을 논할 뿐이다. 따라서 불생불멸의 진여심과 변화하는 현상세계의 생멸상을 함께 논하는 것은 심생멸문의 과제가 된다. 심생멸문은 불생불멸의 심 자체가 어떻게 인연 화합하여 현상의 생별상을 형성해 내는지를 설명한다. 생멸문을 통해 기신론이 강조하는 것은 현상세계 생멸상의 바탕이 바로 불생불멸의 심체라는 것, 생멸변화 안에 불생불멸의 진여 내지 여래장이 심체로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멸과 불생불멸, 그림과 도화지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
34 기신론은 일체 제법이 의거하는 것이 대승의 유일한 법인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른바 (대승)법은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섭한다." 이는 곧 우리가 대상화해서 객관 세계로 인식하는 일체 제법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만든 그림, 마음의 경계라는 말이다. 하나의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의 차별상은 마음이 허망분별의 생각, 념(念)을 따라 그린 상이다. "일체제법은 오직 허망한 생각(망념)에 의거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도화지 위에 그림은 왜 그려지는가? 허망한 념은 왜 일어나는가? 중생이 이미 진여인데도 진여를 자기 자신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여가 일체를 포괄하는 전체이며 한계가 없는 무한이기에, 그 무한의 전체를 자기 자신으로 자긱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밝게 알지 못하는 어둠을 '무명'이라고 한다. 이 무명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여 망념을 일으킨다. 무명으로 인해 념이 일어나는 모습이 '무명업상'이고, 마음이 자신을 찾아 바라보려고 하여 능히 보는 모습이 '능견성'이다. 그리고 그 눈에 보여지게끔 경계로서 나타난 모습, 일심의 바탕 위에 그려진 그림, 펼쳐진 현상세계가 '경계성'이다.
이와 같이 무명업상과 능견상과 경계상을 형성하는 식이 아뢰야식이며, 그 아뢰야식에 의해 형성된 경계상이 곧 도화지 위에 그려진 일체 제법, 현상세계(기세간)이다. 그런데 세계를 그리는 무수한 나, 무수한 아뢰야식은 세계를 그릴 때 그 그려진 세계 안에 각자 자기 자신을 그려 넣는다. 그것이 바로 각각의 개별적 몸(유근신)이다. 이렇게 해서 나를 포함한 세계의 모습이 완성되면, 그 세계(그림)를 바라보는 나(진여)는 그리는 자로서의 자신을 망각하고 자신을 세계(그림) 속의 나인 개별적 유근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는 나는 보이지 않고, 그려진 나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를 개별 자아로 잘못 아는 모습이 바로 '지상'’이고, 그렇게 잘못된 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상속상'이다. 이러한 지상과 상속상을 형성하는 식이 곧 자아식 또는 자기의식인 제7말나식이다.
이러한 자아식에 근거해서 유근신의 나는 자신과 자신 밖의 세계를 자와 타, 주와 객으로 이원화하여 집착하니 이것이 '집취상'이고, 이러한 분별에 시용된 언어에 매인 모습이 '계명자상'이다. 주객의 이원 분별 위의 집취상과 계명자상을 형성하는 식이 바로 우리의 일상의식인 제 6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의 분별 집착에 따라 업을 짓는 모습이 '기업상'이고, 그 업에 따라 고통의 보를 받는 모습이 '업계고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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