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마의 산(하)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9. 2.
마의 산 - 하 -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열린책들 |
<제6장>(계속)
군인으로서 용감하게 7
<제7장>
해변 산책 89
민헤어 페퍼코른 103
21점 내기 카드놀이 120
민헤어 페퍼코른(계속) 157
민헤어 페퍼코른(끝) 241
끔찍한 무감각 266
아름다운 음의 향연 288
너무나 수상쩍은 이야기 325
과도한 흥분 상태 383
청천벽력 432
역자 해설 교양의 연금술사 토마스 만 455
『마의 산』 줄거리 481
토마스 만 연보 487
236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보고 그것에 매혹된 이후부터, 나는 그녀와 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매혹되었다는 것은, 이성을 잃었거나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녀를 위해 난 세템브리니 씨의 충고를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원칙, 즉 병의 천재적인 원칙에 복종하고, 이 위에 남게 되었습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이러한 원칙에 복종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는 내가 이 위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더 이상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으며, 친척, 평지의 직업, 장래의 전망, 이 모든 것과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클라브디아가 이곳을 떠나간 후에는 더더욱 이 위에서 꼼짝 않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평지에서 완전히 사라진 존재가 되었고, 평지의 사람들이 볼 때 죽은 몸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운명〉에 관해 말했던 것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며, 또 현재의 권리관계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을 권리가 나에게도 있지 않은가 하고 감히 암시적으로 말해 본 것입니다. 언젠가 소설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만 ─ 아니, 극장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선량한 청년이 ─ 이 청년도 나의 사촌과 마찬가지로 군인이었습니다 ─ 매력적인 집시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 그녀는 매혹적이었고, 귀 뒤에 꽃을 꽂은 야성적이고 요염하며 치명적인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에게 완전히 반한 청년은 탈선하여,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부대에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437 정말이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시점에는, 그와 평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다. 그는 평지로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고, 평지에서도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다. 마리아 만치니도 더 이상 평지에서 조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위에서 마음에 드는 담배 상표를 발견해, 한때의 여자 친구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여송연에 충성을 바쳤다. 그것은 극지 탐험가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서 겪는 어떠한 고초라도 잊게 해줄 만한 담배로서, 그것만 있으면 해변에 누워 있는 것처럼 어떤 일이라도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443 숨이 막히고 무슨 일이 터질 듯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는 동안, 유럽이 초긴장 상태로 긴박감을 더해 가고 있을 때 한스 카스토르프는 세템브리니 씨를 찾아가지 않았다. 이제 평지에서 배달되어 오는, 피비린내 나는 내용을 담은 신문들이 그의 발코니까지 직접 전달되었으며, 그것은 요양원 전체를 뒤흔들었고, 식당은 물론 중환자와 위독 환자의 방까지 숨이 막히게 하는 유황 냄새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 순간 7년이나 잠에 빠져 있던 한스 카스토르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풀밭에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서는 자리에 앉아 눈을 비비고 있었다…. 자, 그의 마음에 일어난 감정의 동요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들은 이 장면을 끝까지 그려 보기로 하자. 그는 두 다리를 끌어당기고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마법에서 풀려나고, 구원되어, 해방된 것을 알았다 ─ 자기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원초적인 외부의 힘에 의해 내쫓겨 풀려난 셈이지만, 그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외부의 힘에게는, 그가 풀려난 것쯤은 아주 보잘것없는 부차적인 일에 불과했다. 비록 그의 하찮은 운명이 세계의 보편적인 운명에 말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청천벽력에는 그 속에 무언가 그를 개인적으로 생각해 주는 신의 자비와 정의가 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 인생이 이 죄 많은 걱정거리 자식을 다시 품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 쉬운 방법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역시 이렇게 심각하고 준엄한 형태, 즉 청천벽력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벽력은 어쩌면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경우야말로 죄인인 그의 무덤 위에서 세 발의 예포를 쏘아 올리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시련의 형태로 일어날지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무릎을 꿇고,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하늘이지만 더 이상 죄 많은 마의 산의 동굴 천장이 아닌 하늘을 향해, 얼굴과 두 손을 쳐들었다.
446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저것은 무엇일까? 꿈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간 것일까? 어스름, 비, 더러운 진창, 흐린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불꽃, 쉴 새 없이 하늘을 울리는 포성, 축축한 공기를 채우는 묵직한 포성. 날카로운 노래에 갈기갈기 찢긴 듯한 소리, 지옥문을 지키는 개처럼 미친 듯이 날뛰며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 소리들은 갈라지고, 뿜어져 나오며, 터지고, 불타오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뒤에는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 터질 듯이 요란하게 울리는 나팔 소리, 점점 빠른 속도로 두들겨 대는 북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저기에 숲이 있다. 숲에서는 색깔 없는 무리들이 쏟아져 나오며, 달리고, 넘어지고, 튀어 오른다. 저기에는 언덕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그 뒤로 멀리 화염이 피어오른다. 그 화염은 바람에 나부끼고, 때때로 하나의 불길로 뭉쳐져 활활 타오르기도 한다. 우리들 주위에는 물결처럼 출렁이는 밭이랑들이 포탄에 파헤쳐져 푸석해져 있다. 국도는 이미 진흙투성이로, 부러진 나뭇가지로 뒤덮여, 마치 숲과 같다. 깊이 패여 흙탕 구덩이가 되어 버린 한 줄기 들길은 국도에서 갈라져 활 모양을 그리며, 언덕 쪽으로 사라져 간다.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꺾인 나무 그루터기들이 쓸쓸히 찬비를 맞으며 서 있다…. 여기에 도로 표지판이 있다 ─ 읽어 보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어스름한 저녁때라 글씨를 알아볼 수도 없거니와, 표지판도 포격으로 들쭉날쭉 날카롭게 찢겨 있다. 여기가 동쪽인가, 아니면 서쪽인가? 여기는 평지이다. 그리고 전쟁터이다. 우리는 겁을 먹고 길가에 서 있는 그림자들이다.
451 그는 쓰러진다. 아니, 몸을 납작 엎드린 것이다. 지옥문을 지키는 개가 으르렁거리듯, 대형 폭열탄과 무시무시한 지옥의 원추형 포탄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그는 차가운 진흙탕에 얼굴을 파묻고 두 다리를 벌리고서, 두 발을 돌려 발꿈치를 땅에 대고 엎드린다. 포악해진 과학의 산물인 포탄이 가공할 힘을 싣고 날아와서, 그의 앞에서 비스듬히 30보쯤 떨어진 지점에 악마의 화신처럼 땅속 깊숙이 들이박히며, 그곳에서 엄청난 힘으로 폭발하여, 흙덩이와 불과 철과 납, 그리고 산산조각이 난 인체를 집채만큼 높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게 한다. 거기에는 두 명의 젊은이가 엎드려 있었다 ─ 이들은 친구였으며, 위급한 나머지 함께 나란히 엎드린 것이었다. 이제 포탄에 맞아 서로 뒤죽박죽되어 사라져 버렸다.
451 아, 우리들이 안전하게 그림자 상태로 지켜보는 것이 무척 부끄럽구나! 퇴장하자! 이제 이야기를 그만하기로 하자! 우리들의 친구, 저 한스 카스토르프는 포탄에 맞은 것일까? 그는 순간 당했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흙덩이가 그의 정강이를 때리는 순간 엄청난 아픔을 느꼈지만, 그 정도야 씨익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털고 일어나서, 흙이 달라붙어 무거운 군화를 질질 끌고 다리를 절면서, 비틀비틀 계속 걸어가며,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가지가 살랑거리네,
내게 소리쳐 알리듯이 ─
이리하여 그는 야단법석의 소동 속으로, 빗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우리들의 눈에서 사라져 간다.
452 잘 가게나, 한스 카스토르프, 인생의 진실한 걱정거리 녀석! 자네의 이야기는 끝났네. 우리는 자네 이야기를 끝마친 걸세.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연금술적인 이야기였지. 우리는 이야기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에 자네 이야기를 한 것이지, 자네를 위해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네. 자넨 단순한 청년이었기 때문일세.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결국 이건 자네의 이야기였어. 이런 이야기가 자네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 자네도 보기와는 달리 보통내기가 아니었음이 분명하구먼.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자네에게 다분히 교육자적인 애착을 느낀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네. 그리고 이러한 애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앞으로 자네를 볼 수도 없고 자네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으리라 생각하니,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네.
452 잘 가게나 ─ 자네가 살아 있든,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그대로 머물러 있든 간에 말일세! 자네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을 것이네. 자네가 말려 들어간 사악한 무도회에서 아직도 여러 해에 걸쳐 죄 많은 춤을 계속 출 것이기 때문이네. 자네가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겠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 둘 걸세. 자네의 단순성을 높여 준 육체와 정신의 모험은, 육체 속에서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게 한 것을 정신 속에서는 오래도록 살게 해주었네. 자네는 예감으로 충만해 〈술래잡기〉 방법으로 죽음과 육체의 방종에서 사랑의 꿈이 생겨나는 순간들을 체험했네. 이 세계를 뒤덮은 죽음의 축제에서도, 사방에서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불태우고 있는 저 끔찍한 열병과도 같은 불길 속에서도, 언젠가는 사랑이 솟아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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