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욱: 문화대혁명 / 살림지식총서 293




오늘날의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길

당내 정풍에서 홍위병 운동까지

문화대혁명의 확대

문화대혁명의 봉합

문화대혁명이 남긴 것

부록: 문혁16조





■ 백승욱: 문화대혁명 ━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 살림지식총서 293

오늘날의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길

당내 정풍에서 홍위병 운동까지

문화대혁명의 확대

문화대혁명의 봉합

문화대혁명이 남긴 것

부록: 문혁16조





오늘날의 문화대혁명

4 권력투쟁설은 그 이해 방식에 따라서 다시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과 더 넓은 의미의 권력투쟁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권력투쟁설은 당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당주석 마오쩌둥이 권력을 재장악하기 위해서 대중을 선동한 것으로 문화대혁명을 해석하는 것이다. 대약진의 실패를 책임지고 정치 실권을 국가주석 류사오치에게 넘긴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정치무대에서 물러나 있었으며, 그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고 있었다. 마오의 말처럼, 수도 베이징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상황이었으며, 이런 상황을 당내의 정상적 통로를 통해 뒤집을 수 없던 마오가 비정상적으로 대중을 부추겨 집권파를 제거하고 다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마오식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실각으로 마오는 이 목표를 달성하였지만, 이후 권력투쟁은 참가자를 바꾸어 다시 린뺘오와 4인방 사이에서 재개되었고, 린빠오 실각 이후에도 마오의 사망과 그 이후까지 지속된다는 것이 이 접근법에서 해석하는 문화대혁명의 과정이다.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길

11 소유제의 개조가 완료된 이후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는 사회주의의 전망을 둘러싼 대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편에서는 소유제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계급이 소멸하였고, 이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과제가 된다고 본 반면,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편에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길 사이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며, 과제는 단순히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혁명을 정치권력과 소유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하게 된다. 이런 두 가지 상이한 전망의 대립에서 마오쩌둥의 견해가 우위를 차지하면서, 1958년부터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라는 ‘삼면홍기’ 노선이 등장하게 된다.


당내 정풍에서 홍위병 운동까지

20 중국에서는 이렇게 문화대혁명 초기 50일에 결성된 홍위병들 또는 그 이후에도 공작조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홍위병을 보통 ‘노홍위병’ 또는 ‘노병’이라 부르고, 그에 대립하고 공작조에 대립해 결성된 홍위병들을 ‘조반파’라고 일반적으로 부른다. ‘노홍위병’은 ‘보황파’ 또는 ‘보수파’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20 초기 홍위병의 타격대상은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보다는 이들 흑오류 분자 및 그 자녀들에 집중되었으며, 그 외에도 과거 혁명과정에서 재산을 몰수당한 공상업자, ‘반동파’로 몰린 적이 있는 구정당 및 관료 세력, 해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 상급당에 의해 ‘반동 학술권위’로 찍힌 지식인들, 여러 차례 정치운동에서 핍박받은 바 있는 문화계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확대

33 문화대혁명은 공장관리와 교육혁명의 영역에서 새로운 모델을 정착시키거나 과거의 문제들을 해결했다기보다는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는 데 멈추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된 질문을 그 이후의 이론적 맥락을 고려해 해석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로 문화대혁명은 상부구조를 넘어 결국 ‘토대’의 문제, 즉 생산과정 내부의 문제로 전개되었는데, 이 생산과정이 자본주의적 생산과정과 질적으로 다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고, 만약 같다면 어떤 변화가 요구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 제기되었다. 둘째로, 토대란 무엇인가의 문제로까지 나아가는데, 이를 좁은 의미의 노동과정 내부에만 한정하지 않고, 그것이 다시 정치적인 과정의 문제로, 주체형성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의 문제와 노동력 재생산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는 점은 이후에 쟁점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로, 교육을 매개로 하는 지식의 위계가 사회적으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위계를 재생산한다는 쟁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이 남긴 것

39 모리스 마이스너는 문화대혁명이 역설로 끝났음을 이야기한 바 있다. 첫째, 문화대혁명은 반관료제 운동이 가장 관료적 국가기구인 인민해방군의 손아래 들어감으로써 끝났다. 둘째, 문화대혁명은 당에 대한 대중의 공격에서 출발하였으나 당을 강화하는 것으로 끝났고, 당 기구 통제를 둘러싼 당 지도부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변질되었다. 셋째, 도시 노동자계급은 1927년 이후 최초로 활성화되어 운동 초기 단계에 진정한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나, 문화대혁명이 끝나기 전에 사실상 조직이 와해되었고, 노동자운동이 다시 억압되었다. 1990년대 ‘신좌파’의 대표인물인 왕후이가 지적한 것처럼, 문화대혁명은 ‘반근대성의 근대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41 문화대혁명은 또한 결국 모든 핵심 문제가 당으로 집약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인민의 당이 문화대혁명의 한복판에서 대중운동의 공격을 받는 대상이 되었고, 대중운동 없이 당의 정풍은 불가능하였지만, 대중운동이 당을 넘어섰을 때 당과 대중운동 사이의 모순은 첨예하게 드러났다. 동요하던 마오쩌둥은 결국 대중운동의 ‘무질서’보다 당의 ‘질서’를 선택하였다. 그럼 당은 어떻게 올바름을 자처할 수 있으며, 당이 대중과 괴리되기 시작할 때 그것을 어떻게 스스로 정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당은 대중적 주도권을 촉진시키는 데 늘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고 장애물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의 문제는 결국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는 문제를 물고 이어졌고,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중단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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