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9. 14.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민음사 |
노르웨이의 숲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
9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기체가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려는 참이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적시고, 비옷을 입은 정비사들, 밋밋한 공항 건물 위에 걸린 깃발, BMW 광고판, 그 모든 것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 배경처럼 보였다. 이런, 또 독일이군.
비행기가 멈춰 서자 금연 사인이 꺼지고 천장 스피커에서 나지막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 (Norwegian Wood) 」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듯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니, 그 어느때보다 격렬하게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아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독일인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몸이 안좋으냐고 영어로 물었다. 괜찮다고, 좀 어지러울 뿐이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요. 고마워요."
스튜어디스가 방긋 웃으며 자리를 뜨고, 음악이 빌리 조엘의 곡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북해 상공을 덮은 검은 구름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거나 떠나간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선 후 사람들이 안전벨트를 풀고 짐 칸에서 가방이니 윗도리 따위를 꺼내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줄 곧 그 초원에 있었다. 풀 냄새를 맡고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들었다. 1969년 가을, 나는 곧 스무 살이 될참이었다.
아까 그 스튜어디스가 내 곁으로 다가와 옆자리에 앉더니 이제 괜찮으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조금 슬퍼져서 그랬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미소 지었다.
"네, 저도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요. 잘 알아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주 멋진 미소를 내게 던져 주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안녕!"
"안녕!"
열여덟 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며칠 계속된 부드러운 빗줄기로 여름 내내 덮어썼던 먼지를 깔끔히 씻어 내린 산 능선은 깊고 선명한 파랑을 띠고, 억새 꽃을 흔들며 불어 가는 10 월의 바람 속에서 길고 가느다란 구름이 파란 하늘에 차갑게 달라붙어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노라면 눈이 아릴 만큼 높은 하늘이었다. 바람은 초원을 가로질러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고 숲으로 달려갔다. 우듬지의 잎이 사락사락 소리 내며 흔들리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다른 세계의 입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작고 쉰 듯한 소리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어떤 다른 소리도 우리 귀에 닿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 곁을 지나가지 않았다. 새빨간 새 두 마리가 초원에서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 듯 황망히 날아올라 숲 쪽으로 날아갔을 뿐이었다. 걸으면서 나오코는 나에게 우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 나는 풍경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딱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열여덟 해나 지난 뒤에 풍경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는 풍경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때 내 곁에서 걷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뭘 보고 뭘 느끼고 뭘 생각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나이였다. 게다가 나는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나를 몹시 혼란스러운 장소로 이끌어 갔다. 주변 풍경에 관심을 기울일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아예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그 초원의 풍경이다. 풀 냄새, 살짝 차가운 기운을 띤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맨 먼저 떠오른다. 아주 또렷이. 너무도 선명해서 손을 뻗으면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 모습은 없다.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 뿐이다.
물론 오래오래 생각하면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작고 차가운 손, 사르르 미끄러져 내리는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 부드럽고 둥그런 귓불과 그 바로 아래 자그만 검은 점, 겨울이면 즐겨 입는 우아한 캐멀색 코트, 언제나 상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묻는 버릇, 때로 떨리듯 울리는 목소리(꼭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언덕 위에서 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모으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얼굴이 불쑥 떠오른다. 먼저 옆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나오코와 늘 나란히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맨 처음 떠올리는 것은 옆에서 본 얼굴이다. 그런 다음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서 방긋 웃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말을 하며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 본다. 마치 맑은 시냇물 바닥을 재빠르게 가로지르는 작은 물고기의 그림자를 좇듯이.
그렇지만 나오코의 얼굴이 내 머릿 속에서 떠오르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린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처음에는 오초면 충분했지만 그것이 십 초가 되고 삼십 초가 되고 일 분이 되었다. 마치 저녁나절의 그림자처럼 점점 길어진다. 그러다 이윽고 저녁 어스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렇다. 내 기억은 나오코가 선 그 자리에서 확실히 멀어져 가고 있다. 마치 내가
예전에 선 그 자리에서 확실히 멀어져 가듯이. 그리고 그 풍경만이, 10월의 초원만이 마치 영화에 나오는 상징적 장면처럼 거듭해서 뇌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풍경이 끊임없이 내 머릿속 어느 부분을 집요하게 걷어찬다. 어이, 일어나, 나 아직 여기 있다니까, 일어나, 일어나서 알아내라고, 내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그 이유를 아픔은 없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 발길질을 당할 때마다 울적한 울림이 일어날 따름이다. 그 울림마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끝내 사라져 버렸듯이. 그러나 함부르크 공항의 루프트한자 비행기 속에서 그들은 평소보다 더 세차고 길게 내 머리를 걷어찼다. 일어나, 알아내, 하면서.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484 나는 비행기로 가는 것이 빠르고 편하다고 했지만 레이코씨는 기차로 가겠노라고 했다.
"나, 세이칸 연락선을 좋아하거든. 하늘 같은 데 날기 싫다고." 나는 그녀를 우에노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기타 케이스를 들고 나는 여행 가방을 들고 둘이서 플랫폼 벤치에 나란히 앉아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도쿄에 왔을 때와 같은 트위드 재킷을 걸치고 하얀 바지를 입었다.
"아사히카와, 정말로 괜찮은 동네일까?"
"좋은 동네예요. 곧 한번 갈게요."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할게요."
"자기 편지는 정말 좋아. 나오코는 전부 불태워 버렸지만. 그렇게 좋은 편지를."
"편지 같은 건 그냥 종잇조각이잖아요. 불태워도 마음에 남을 건 남고, 새겨 둬도 사라질 건 사라져 가는 거죠."
"솔직히 말해, 나 정말 무서워 혼자서 아사히카와에 가는거. 그러니까 꼭 편지해 줘. 자기 편지를 읽으면 늘 자기가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니까"
"내 편지가 위안이 된다면 얼마든지 쓸게요.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레이코씨라면 어디서든 잘해낼 테니까요."
"그리고 내 몸속에 뭔 가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거 착각일까?"
"잔존 기억입니다, 그거." 말하면서 나는 웃었다. 레이코씨도 웃었다.
"낱잊지 마."
"안잊을거예요, 언제까지나."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겠지만, 난 어디를 가든 자기와 나오코를 기억할 거야."
나는 레이코 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우리를 힐끗힐끗 바라보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행복해야 해" 헤어질 때 레이코씨가 말했다. "나, 자기한테 충고할 수 있는 건 모두 했으니까 더는 할 말이 없어. 행복해지라는 말밖에. 내 몫과 나오코 몫까지 행복해져야 한다고 밖에."
우리는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다.
486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 마나 많은지 몰 라.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
미도리는 오래도록 수화기 저편에서 침묵을 지켰다. 마치 온 세상의 가느다란 빗줄기가 온 세상의 잔디밭 위에 내리는 듯한 그런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동안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획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 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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