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을 읽다 -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유유 |
저자 서문_동양고전 읽는 법
1. 3천 년의 민가
2. 귀족의 기본 교재
3. 서민 생활의 단편들
역자 후기_양자오의 역사적 독법과 문학적 독법
31 마찬가지로 갑골문도 주나라 사람이 쓰면서부터 기본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주나라 사람은 문자의 신비로운 성질을 남겨 두긴 했지만, 그들이 더 중시한 것은 문자의 항구적인 성질이었습니다. 문자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정보를 고정하고 오래 보존하도록 해 줍니다. 주나라 사람의 손에서 문자는 초월적 세계의 정보를 기록하고 보존하던 것에서 인간 세상의 현세적 정보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으로 그 기능이 전환되었습니다.
31 아마도 주나라가 계승하고 바꾸는 과정에서 문자와 언어의 관계가 확정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말해 주나라는 상나라가 발명한 기호를 채택하는 한편, 본래는 언어를 위해 기능하지 않았던 그 기호를 이용해 언어를 기록하고 보존했던 겁니다. 전 세계의 대다수 문자와 달리 중국 문자는 표음문자가 아니어서 문자 기호를 쉽게 익힐 수 있는 음성 규칙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문자와 음성 사이의 대웅 관계를 수립하느냐가 문명의 거대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33 표음문자 체계에서는 언어가 중심이고 문자는 그 뒤를 따르며 본뜰 뿐입니다. 언어가 바뀌면 문자도 따라서 바뀌지요. 그래서 문자는 언어의 불완전한 대체물로 간주됩니다. 문자는 복제품이고 언어야말로 진품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문자 체계에서는 거꾸로 문자의 지위가 언어보다 높습니다. 언어는 잠시 존재했다 사라지는 것으로, 문자에 의지해야만 고정적인 성질을 얻어 시간에 저항하고 더 변하거나 사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9 『시경』은 노래이자 가사입니다. 오늘날 유행가의 가사에는 요즘사람들의 삶과 보편적인 가치관이 딱히 정확하고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역시 『시경』을 통해 주나라 사람의 삶과 생각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시경』에 비교적 효과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은 주나라 사람이 노래를 부른 상황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어떤 상황에서 노래를 불렀고, 노래에 어떤 정서와 내용을 담아 표현했을까요? 또 그들에게 노래에 담기에 적당한 사건과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런 것이 우리가 『시경』을 읽으며 탐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41 우리는 그 작품들이 '경', 즉 경전이 되기 전에 우선 주나라사람이 대대로 불러온 시이자 노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시와 노래를 불렀던 이들은 미래의 어느 날엔가 그 내용이 경전으로 바뀌어 높은 지위를 얻고 거기에 방대한 의미가 덧붙여 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경은 옛 성현의 지혜와 진리가 담긴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반드시 『시경』에서 옛 성현에게 어울리는 내용을 읽어 내려고 했습니다. 경은 큰 이치를 기록한 책인데, 『시경』도 경이라 역시 대단한 이치가 담겨야만 했습니다. 이런 논리는 시대 순서의 심각한 전도인데, 훗날의 정의로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하고 과거의 작품에 훗날에 규정된 내용을 억지로 집어넣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도를 제거하고 최대한 『시경』을 그것이 탄생한 시대적 환경에 되돌려 놓고서 읽어야 합니다.
42 『서』는고대사로서 주나라건립 과정에 있었던 중대한 사건과 그 사건들에 대한 선현의 검토와 교훈을 기록한 것입니다. 주나라는 자신들도 예상하지 못한상황에서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강대해 보였던 대읍상, 즉 상나라를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았으며, 이긴 과정과 이유 그리고 상나라 사람이 미신을 믿고 음주에 탐닉했다는 비판과 무상함을 경계하는 우환 의식 등을 『서』에 수록했습니다. 『서』를 통해 주나라사람의 특수한 정신적 가치관이 후대의 귀족에게 전달되었지요.
42 『서』에 대응하는 것이 『춘추』였습니다. 『춘추』는 당대의 역사이자 국별 역사였습니다.
43 『예』는 행위 규범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봉건 질서에 필요한 규칙과 의식을 모아 놓은 총화였지요. '예'는 맨 처음에는 문자와 경서의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제적인 훈련으로 전해졌을 겁니다. 그래서 공자 시대에는 아직 ‘예의 시연'에 대한 견해가 보편적으로 존재했지요.
43 『역』은 당시 귀족 교육에서 철학 교육에 해당했습니다. 주나라 사람은 줄곧 ‘천'天의 문제를 사유했습니다. '천'은 인간이 좌우할 수도 도모할 수도 없는 초월적 힘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서 ‘인’人은 일부였고 나머지 더 큰 부분이 '천'이었습니다. 우연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천'이었으며, 되돌릴 수 없는 운명도 '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좌우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변수와 힘을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에 대웅해야 하는지가 철학 교육의 포인트 중 하나였습니다.
43 이제 남은 것은 '시'와 '악'입니다. '시'와 '악'이 과연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꼭 정설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46 봉건영주와 봉건귀족은 봉국에서 편안히 거주하며 효과적으로 봉국의 백성을 관리하기 위해 당연히 그곳 사람들이 본래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야했습니다. 아울러 그 중요한 자료를 대대손손 이어서 봉국을 다스리기 위한 참고자료로서 보존하려 했습니다.
86 귀족 신분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시경』을 읽고 『시경』의 시구를 줄줄 암송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구들은 그들이 서로 소통하는 일종의 코드화된 언어가 되어, 직접적으로 말하기 불편하거나 부적합한 의미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했습니다.
87 한 걸음 더 나아가, 춘추시대 이후 갈수록 복잡해진 국가 간의 관계에서 코드화된 언어는 자연히 외교에까지 이용되었습니다. 당시 봉건 예법은 서주 시대만큼 정연하고 안정되지는 못했습니다. 점차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전국시대만큼 그렇게 노골적인 '힘'과 '이익'의 추구가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법이 일반 귀족의 행위를 고도로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했지요. 그래서 외교 현장에서 힘이 약한 나라가 봉건 예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강국의 침탈을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야심만만한 대국도 봉건적 유대 관계를 이용해 연맹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87 외교적 절충에 관여한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귀족 교육의 수혜자였습니다 그래서 『시경』의 갖가지 내용을 이용할 수 있었고, 예의를 지키면서 암암리에 힘을 겨루고 관계를 맺었습니다. 가끔씩 『상서』와 『역경』을 끌어와 인용하기도 했지만 범위와 빈도면에서 『시경』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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