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오: 좌전을 읽다 ━ 중국 지식인이 읽고 배워야 했던 2천 년의 문장 교본


좌전을 읽다 - 10점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유유



저자 서문_동양고전 읽는 법

1. ‘전’으로 ‘경’을 설명하다

2. 봉건 질서 붕괴의 역사

3. 최후의 예교 질서

4. 힘이 명분보다 중요하다

5. 패업의 형성


역자 후기_양자오 약전





27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중국 최초로 전체로 쓰인 저작입니다. 전의 기능은 경經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춘추좌씨전』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춘추경』春秋經에 딸려 성립된, 『춘추경』을 설명한 전서傳書임을 알려 줍니다. 『춘추경』을 설명한 '전'이 꽤 여러 권이라 '좌씨'라는 이름으로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과 구별했습니다. 춘추는 본래 통칭이지 특정한 책 이름이 아닙니다. 주나라 시대에 국가의 큰일을 기록하는 고정된 형식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시간 순서를 틀로 삼아 우선 연도를 밝히고 그 밑에 시 다시 말해 계절과 월 별로 사건을 세분해 기록하는 형식이었지요. 이런 기록법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원년 봄 정월 3 월, (…) 여름 5 월, (…) 가을 7월 ……"입니다. '원년'은 군주가 즉위한 첫 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정월 앞에는 반드시 계절을 표시하는 춘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각 달마다 그 달이 속한 계절을 붙여 여름 5월, 가을 7월이라고했습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계절을 특히 강조해 춘과 추가 늘 등장했기 때문에 이런 연도별 기록 양식을 '춘추'라고 불렀습니다.


28 우리는 주나라 궁정에서도 춘추라는 양식이 쓰였는지, 이 양식이 주나라 궁정에서 만들어져 퍼진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사료를 통해 동주 시대에 제후국마다 자체적인 연도별 기록이 있었고, 대체로 이 춘추 형식을 택했으며, 그 중 기록이 가장 상세하고 보존이 잘된 것이 노나라의 기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33 그런데 『좌전』에 사용된 그 자료들을 『춘추』의 저자는 왜 못 봤을까요? 혹은 『춘추』의 저자는 왜 그 자료들을 이용해 사건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의 핵심은 아마도 『춘추』의 저술 의도

가 애초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의 기능에 있지 않았다는데 있을 겁니다. 『춘추』가 관심을 쏟은 것은 글을 통해 과거의 시대적 환경과 당대의 사건 그리고 당위적 예의, 질서, 도리, 원칙을 비교하고 대조한 뒤 그 결과를 당시 사람들과 후대가 배우고 참고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춘추』의 포인트는 어떤 사건의 발생을 기록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그 사건의 의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주목해 봉건적 예의 질서 아래에서 그 의의를 펼쳐 보이는 데 있었습니다.


33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해 보면 『춘추』의 핵심 기능은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잡는 것이었습니다. 봉건 예교의 이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당대 사건을 기술해 남기는 것이었지요. 공자가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必也正名平!라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는 가치관은 틀림없이 주나라의 봉건주의, 아니면 적어도 노나라의 문화 전통이 그 배경일 겁니다.


38 오늘날 남아 있는 『노춘추』는 당시 그런 각국의 역사 기록의 기원과 기능을 알려 줍니다. 『춘추』 같은 글을 통해 각국은 자신들과 천자 그리고 다른 나라와 과거에 가까운 친족이었을 때의 기억을 보존했습니다. 아울러 계속 그런 글을 남기면서 다양한 친족 관계 사이의 응대 모범을 정하고 확인했습니다. 바꿔 말해 『춘추』와 기타 유사한 각국의 역사 기록은 그 당시의 봉건 교본이었고, 각국은 그것을 이용해 봉건제를 시행하는 각 분야의 응대 규범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전파했습니다.


39 한 나라 안에서 경卿이나 사대부와 군주 사이에는 봉건 친족 관계에서 비롯된 권리와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각국과 주나라 천자 사이에도 그러한 권리와 의무가 있었지요. 주나라 건립 시기부터 『노춘추』가 시작되는 노은공 원년까지 그런 봉건제도는 이미 최소 3백 년이나 이어져 온 상태였습니다. 그 사이에 친족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게 변화하고 발전했으며, 이에 상응해 그 권리와 의무도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친족 관계가 복잡해져 봉건 질서의 유지가 절실해질 수록 '정명' 즉 이름을 바로잡고자 하는 충동이 강해졌습니다. 주나라 시대에 정명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옳은 정의를 따지는 활동이 아니었지요. 그것은 봉건 질서 아래 친족의 어떤 명칭이 행위 규범상의 어떤 요구와 관계가 있는지, 또 친족의 어떤 명칭을 갖고 있을 때 그 명칭과 실제가 부합하려면 어떤 행위를 해야 옳은지 설명하고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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