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데닛: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대니얼 데닛의 77가지 생각도구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10점
대니얼 데닛 지음, 노승영 옮김, 장대익 해설/동아시아



머리말 직관펌프가 뭘까?


1부. 열두 개의 일반적 생각도구

2부. 의미 또는 내용을 위한 생각도구

3부. 컴퓨터에 대한 막간 설명

4부. 의미를 위한 그 밖의 생각도구

5부. 진화를 위한 생각도구

6부. 의식을 위한 생각도구

7부. 자유의지를 위한 생각도구

8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맺음말. 도구를 사용하라. 더 열심히 노력하라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도구

부록: 레지스터 기계 문제 풀이






1부. 열두 개의 일반적 생각도구

83 도구를 잘만 구사하면 손이나 발처럼 쓸 수도 있다. 생각도구는 더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설명한 간단한 범용 생각도구를 갖추면 한결 날카로운 감각으로 힘든 탐구주제에 접근할 수 있다. 틈새를 보고, 경보음을 듣고,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잘못 디딘 걸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러분이 무기를 휘두르며 용감하게 덤불로 돌진하려 할 때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타이르는지 미니 크리킷처럼 마음속에 새길 격언도 있다. 생각 도구는 무기이기도 하며, 따라서 전투 비유는 적절하다. 경쟁심은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지적 야심과 대담성의 자연스러운 부산물 아니겠는가? 우리는 열띤 전투의 와중에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도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려고 잔꾀를 부릴 수 있으며, 재치를 과시하려는 욕심 때문에 건설적 비판이 조롱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았다.


우리가 이 책에서 맞닥뜨릴 의미, 진화, 의식, 특히 자유의지 등은 모두 뜨거운 쟁점이다. 어떤 주장을 접할 때면 두려움이나 혐오감이 끓어오를 것이다. 괜찮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전문가라도 희망적 사고에 빠질 수 있으며, 이성보다는 정서적 애착에 기댄 확신때문에 진리에 눈감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마음이 어떻게 몸속에 있을 수 있는지, 원자와 분자, 광자, 힉스 입자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어떻게 의미가 존재할 수 있는지 ― 아니, 존재할 수나 있는지 ―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그래야 마땅하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존 재인가?',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발걸음을 신중하게 내디디기 바란다. 바닥은 아슬아슬하고 지도는 미덥지 못하다.



3부. 컴퓨터에 대한 막간 설명

192 수백 년에 걸쳐 우리는 뇌가정신의 보금자리라는 증거를 숱하게 수집했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 중엽 들어서다. 뇌는 좌우 한 쌍으로 이루어진, 저마다 다르고 기묘한 형태의 수많은 기관으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초기 해부학자들은 이 기관들에 모양을 본뜬 이름을 붙였지만 이 부위들이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뇌는 음식물을 소화하지도 혈액을 거르지도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말마따나 혈액을 식히는 일종의 방열기였을까? 이 부위들은 신경섬유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떤 식으로든 서로 소통하는지도 모른다. 데카르트는 일부 신경섬유가 종에 연결된 줄이라고 생각했다. 한 쪽을 잡아당기면 반대 쪽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종을 울린다는 것으로는 뇌를 마음으로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되는 듯했다. 아무도 그 이상의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했다.


그때 튜링이 등장했다. 그는 배비지와 파스칼, 라이프니츠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바탕으로 뇌가 궁극적으로는 (쥐덫, 울리는 종. 열쇠와 자물쇠, 시냅스 같은) 기계에 불과한 단순한부분들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만, 이부분들이 영리하게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조직되었다면 인간이 개입하거나 기계 속 넋이 이끌지 않아도 스스로 지능적 행위를 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했다. 계산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튜링이 '컴퓨터'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전에만 해도, '컴퓨터'는 업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부와 기업에서는 수천 명의 '컴퓨터'를 고용하여 상거래, 항해, 탄도 계산, 금융 등에 쓸 표를 계산하도록 했다. 튜링은 뇌 자체가 (인간) 컴퓨터와 비슷하다고, ('중분'과 '감분' 같은) 매우 단순한 명령의 거대한 목록을 철저하게 따르며 정보를 처리한다고 추측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디어는, 앨런 튜링과 존 폰 노이만,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노버트 위너, 정보 이론의 창시자 클로드 섀넌을 비롯한 초기 인지과학 이론가들이 조리 있게 표현한 뒤에는 심지어 명백히 옳은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이 생각을 왜 못했을까?' 뇌는 감각기관에서 정보를 얻어 모종의 계산을 통해 이를 처리함으로써 귀중한 의미의 광석을 채굴해야 한다. 그러면 추가적인 계산을 통해 이를 분류하고 나중에 뇌에 (에너지와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신체의 행동을 인도하는 데 쓰기 위해 저장할 수 있다. 튜링의 통찰에서 핵심적인 특징은 정보 처리에 대한 이전의 상상에서 여지없이 드러난 꼴불견 요소들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점원이나 번역가나 사서가 필요한 단계,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호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해하는 존재'가 필요한 단계를 드디어 건너뛸 수 있게 된 것이다. 튜링은 어떤 의미에서 이 단계가 불가피함을 간파했다. 지적 과정은 언제나 신호의 어떤 차이를 구별하여 여러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튜링은 이 이해를 조건 분기라는 최소한으로 축소할 수 있었다. 


조건 분기는 장치가 0이 아니라 1을, B가 아니라 A를, y가아니라 x를 감지하여 ― 감지하는 셈이어서 —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가기로 결정하는 (셈인) 절차로, 마음은 관여하지 않는다. 조건 분기와 연산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러면 가상기계에 가상기계를 쌓고 그 가상기계에 가상기계를 쌓아 어떤 인식 수준의 장치라도 만들 수 있다. 50년 넘도록 이 견해에 솔깃했지만, 우리가 이미 알아차리고 있듯 세부 사항이 쉽게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뇌가 컴퓨터라 해도, 이 컴퓨터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컴퓨터와 그다지 닮지 않았다. 우리는 컴퓨터의 기본적 특징을 염두에 둬야만 통념에 자리 잡은 관료적 구조보다 더 생물학으로 현실적인 대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 막간 설명의 요점은 컴퓨터를 생각도구로 쓸 수 있다는 개념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세부 사항을 채워 넣는 것이었다. 컴퓨터는 우리가 이제 맞닥뜨릴 주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상상력 보조 기구다. 


6부. 의식을 위한 생각도구

426 의식의 과학적 연구에 늘 붙어 다니는 문제점은 '모든 사람'이 전문가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정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의식에 대해 몇 분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의 결론이 최첨단 실험이나 무수한 통계의 결과만큼 권위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과학학술대회의 문답시간에, 자신이 최근에 一경험한 경험했다고 생각하는一것을 들며 발표자의 연구에서 '오류’를 단호하게 '교정'하는 꼴은 완전히 코미디다. 이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듯 우리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본질에 대한 무오류의 재판관이라면, 그들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솔깃하지만 못 미더운 이데올로기에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자신의 가장 직접적 경험조차 잘못 기억하고 잘못 해석하고 잘못 묘사할 수 있다. 집에서 해볼 수 있는 간단한 실험이 있다(결과가 나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자신이 다음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도록 거울 앞에 앉는다. 지시란 주변 상황에 한눈 팔지 말고 자기 눈에 시선을 고정하여 똑바로 쳐다보라는 것이다. 이제 시선을 여전히 자기 눈에 고정한 채, 잘 섞은 카드 다발 한 가운데에서 카드를 한 장 꺼내어 앞면을 얼굴로 향한 채 팔을 쭉뻗는다. 카드는 주변시야 바로 바깥에 위치하도록 한다. 카드를 흔든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만, 물론 볼 수는 없다. 카드를 계속 흔들면서 시야 안으로 이동시킨다. 처음에는 움직임은 보이지만 색깔은 전혀 안보인다! 빨간색인지 검은색인지 그림 카드(잭, 퀸, 킹)인지 알 수 없다. 숫자도 알아보지 못한다. 카드를 점점 시야 가운데로 이동시키다 보면, 얼마나 정면에 가까워져야 색깔과 그림 카드 여부를 식별할 수 있는지 알고 놀랄 것이다. 카드가 주시점에 가까워질수록, 카드를 힐끔 엿보는 속임수를 쓰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마침내 카드를 알아볼 수 있을 때쯤이면 카드가 거의 정면에 와 있을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현상을 처음 경험하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못봤다. 지금껏 시야가 "주변 시야 가장자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똑같이 선명하고 유채색인 줄 알다가, 이것이 '이치에 맞고' 대충 생각하기에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결코 참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차원,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시각) 인식에서 세계가 겉보기에 풍부하고 연속적이고 자세히 표상되더라도 이것이 환각인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교훈은 명백하다. 과학이 최근에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 때까지는 의식 현상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교훈을 무시하는 철 학자들의 탁상공론은 기껏해야 하찮은 이론이며 곧잘 자신과 타인을 깊은 혼란에 빠뜨린다. 의식에 대해서 '내성을 통해' '배우'는 것은 타인 현상학적 바탕을 채택하여 체계적으로 의식을 연 구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나마도 오해의 소지가 크다.


7부. 자유의지를 위한 생각도구     

792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자유의지가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오해하는 듯하다(색이나 의식에 대한 오해처럼). 우리의 결정은 신체 과정을 설명하는 물리학과 화학법칙을 위배하는 뇌 속의 작은 신비가 아니다. 결정이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자유의지가 없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된다. 이 헛소리 개념이 자유의지의 유일한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률에서는 一 상식에 부합하여 ― '자의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협박 하에 또는 환각이나 기타정신착란의 영향 하에 계약을 체결하는 것과 구분한다. 이것이야 말로 완벽하게 친숙한 의미의 자유의지다. 우리의 현시적 상을 구성하는 실천과 태도의 상당수가 이 구분을 전제한다. 현시적 상이 헛소리 같은 자유의지의 의미에 의존한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어떤 철학자들은 이 친숙한 의미의 자유의지가 중요하다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자유의지는 결정론, 유물론, 물리학, 화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7부의 직관펌프와 생각도구는 이 '양립 가능론'에 대한 이해를 뒷받침하고 발전시키도록 설계되었다. 양립가능론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유형으로 제시되었으며 철학자뿐 아니라 판사와 변호사, 그리고 누가 무엇에 책임이 있는가와 누가 행동할 때 자유의지가 없었다는 이유로 용서받는가를 구분해야 하는 사람들이 양립 가능론에 합의하는 듯하다. 현재 일부 과학자들이 이 합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물론 그럴 권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논변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급진적인, 심지어 혁명적인 무언가를 가르치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자신이 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으며,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과 비난 받아 마땅한 행동을 구별하는 타당한 토대가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혁명적 결론은 지금껏 이를 주장한 과학자들이 받은 것보다 훨씬 면밀한 검토를 받아야 한다. 악독한 신경외과 의사는 한낱 착각을 동원하여 환자를 무력화했다. 영향력 있는 과학자가 전파하는 잘못된 견해는 타당하고도 삶의 질을 높이는 유형의 자유의지를 사람들에게서 앗아간다. 모든 면에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양립가능론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늘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임마누엘 칸트는 양립 가능론을 '가련한 미봉책'이라고 불렀으며 요즘 저술가들은 양립 가능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에 곧잘 의문을 표한다. 이런 태도는 사실 바람직하다. 과학은 희망적 사고를 특히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과학적 탐구의 규칙 중에는 우리가 증거를 바탕으로 확신한다고 생각할 때 희망에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하려고 만든 것이 많다.


맺음말 도구를 사용하라, 더 열심히 노력하라

518 "상상도 못할 일이야!" 의식의 '신비'를 맞닥뜨리거나 이 행성에서 30억 년도 더 전에 (이를테면) 지적 설계자의 도움 없이도 생명이 탄생했다는 주장을 맞닥뜨렸을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 늘 이렇게 대꾸하고 싶어진다. "물론 당신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 생각도구를 챙기지도 않았고 노력도 거의 안 하잖아."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던 윌리엄 베이트슨의 호언장담을 떠올려보라. 오늘날에는 초등학생들까지도 DNA를 어렵지 않게 상상한다. 그들이 베이트슨보다 똑똑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지난 세기에 우리가 효과적인 생각도구들을 고안하고 다듬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들을 정말로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심지어 설명하려는 시도로부터도 신비를 보호하고 싶어 한다. 설명해버리면 귀한 보물이 흔한 돌이 될 까봐 두려운 것이다.


딴 사람들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면 "신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일하십니다"라는 말을 편리한 반생각도구로 써먹는다. 질문한사람이 오만하고 깐깐하다는 인상을 주면 호기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이 방법은 지금껏 잘 먹혔으며, 과학의 무지를 (미덕까지는 아니더라도) '눈감아줄 수 있는 결함'으로 간주하는 집단에서는 아직도 효과를 발휘한다. 이 '경건한' 주장을 지혜로 취급하는 일을 중단하고 명백히 방어적 인 선전으로 ― 사실이 그 다— 여겨야 한다. 긍정적인 반응으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잘됐네요! 저 미스터리 좋아해요. 이 미스터리도 풀 수 있는지 보자고요. 좋은 생각 있으세요?"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개념의 얼개를 잡고 대충 훑어본 뒤에 승인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연구를 더 하면 분명히 상상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무언가가 진정으로 불가능하다고一가장 큰 소수나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큰 삼각형, 기혼 총각 ― 자신있게 단언할 때, 이것은 이런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구성요소가 너무 정확히, 너무 살살이 상상되어서 그 조합의 불가능성을 그 자체로 똑똑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적 세계에서 의미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생명이 어떻게 생기고 진화했는지, 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유의지가 우리의 타고난 재능일 수 있는지 온전히 상상하는 일에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발전은 있었다. 지금 제기하고 다루는 질문은 예전의 질문보다 나아졌다. 답이 코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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