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 과르디니: 우울한 마음의 의미


우울한 마음의 의미 - 10점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진태 옮김/가톨릭대학교출판부



1. 우울한 마음의 의미

2. 키르케고르 사유 여정의 출발점


- 옮기고 나서





9 우울한 마음이 겪는 시련은 아주 지독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깊이 우리 인간 삶의 뿌리에까지 파고들어 있어서, 이 문제를 정산과 의사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여기서 우울한 마음의 의미에 대해 물을 때 심리학적 문제나 의학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적인 문제로만 다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제가 깊은 인간 내면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34 그 이름은 우울감, 곧 무거운 심정입니다. 심정의 무거움. 인간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이 짐이 사람을 자기 자신 안에 와르르 몰락해 버리게 합니다. 이 짐이 사지와 오장육부의 팽팽한 활력을 맥 빠지게 만들어 축 늘어지게 합니다; 이 짐이 감각과 상상력과 생각을 마비시킵니다; 의지는 느슨해지고, 뛰어들고 싶어하고 일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관심은 맛을 잃습니다. 그러한 감정에서 옮아매는 내적 사슬이 나오게 되고, 그런 감정만 없었다면 자유로이 용솟음치고 움직이고 작용했을 모든 것에, 이 사슬이 채워집니다. 결단 내리는 신선한 활력, 명확하고 예리하게 윤곽을 그려 낼 수 있는 힘, 과감하게 손대어 꾸며 나가는 정열―이 모든 것이 피곤해지고 관심 밖의 일이 됩니다; 더 이상 인간은 삶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밀어내는 생명의 힘을 같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리저리 꼬입니다; 더 이상 사태를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크는 한 가지 일도 끝까지 해내지 못합니다. 해야 할 과제들은 차곡차곡 쌓여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산이 되어 버립니다.


61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존재의 뿌리가 우울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구김살 없이 명랑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울감이라는 또 다른 영역에 대해 아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저 깊이에 대한 감을 가진 사람, 저 깊이에 대한 감각을 가진 생각하고만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큰 삶, 진정 위대한 삶은 저 압박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압박이야말로 모든 사물에 전체적인 무게를 부여해 주고, 본래 있어야 할 긴장감이 생생히 살아 있도록 힘을 제공해 줍니다.


66 우울감의 궁극적 본질은 사랑을 동경하는 데 있습니다. 가장 초보적인 감각적 사랑으로부터 정신적이고 영적인 최상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 모든 단계를 다 망라한 사랑에 대한 동경입니다. 우울해하는 마음의 힘은 에로스입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 깊은 갈망. 이 깊은 갈망이 자기 본질의 그냥 한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중심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그냥 특정 관계나 특정 시기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우울감에 빠진 전 존재가 에로스에 온통 젖어 있습니다: 에로스는 이 특정 성격, 곧 사랑을 갈망하고 동시에 아름다움을 갈망한다는 성격을 가집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 아름다움 자체가 깊이 위태로움에 처해 있고, 이 아름다움이 등장하는 곳에서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위기감도 동시에 나타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한 바 있는 상처받을 가능성의 근거입니다. 살아 있는 자연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자연은 자산을 건네주고 남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줄 자세, 받을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연은 산뢰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살아있는 자연은 자기 방어에 급급하지 않습니다.


67 살아 있는 자연은 덧없이 지나가는 존재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는 날이 온다는 것; 살아 숨쉬는 아름다움은 항상 흘러가는 가운데 있다는 것; 아름다움의 이웃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73 저는 온갖 종류의 의학적, 교육학적 설명을 넘어 이러한 현상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무한이 마음속에서 자기 자산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울감은 우리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데 대한 표현이고, 우리가 一 이제부터는 여태껏 사용한, 너무 조심스럽고 추상적인 단어 "절대자"를 버리고, 그 대신 실제로 적절한 단어인 "하느님"을 사용합시다一하느님과 벽을 맞대고 아주 가까이 살고 있다는 데 대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부르신 사람이라는 사실, 당신을 우리 삶 안에 모셔들이도록 부르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86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미는, 살아있는 한계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런 한계의 삶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끝까지 짊어지는 것이라고.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삶의 터를 현실 속에 가지게 되고, 신과 직접적으로 합일을 이룬다거나 자연과 직접적으로 동화를 이룬다는 속임수 마법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86 양방향 모두에 어떤 심연, 어떤 단절이 있습니다. 자연으로 가는 길의 단절은 인간이 하느님께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데서 옵니다. 인간이 자연과 가지는 모든 관계는 영의 시선 아래서, 품위가 요구하는 의무감 아래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책임감의 내용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의 단절은 인간이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라는 사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인간은 분리이자 동시에 결합인 저 행위, 곧 경배와 순명으로만 하느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데서 옵니다. 경배 행위 속에 수렴될 수 없는 어떠한 진술도 하느님께 대해서는 거짓입니다; 또한 순명의 형태에 수렴될 수 없는 어떠한 태도도 하느님께 대해서는 거짓입니다. 이 안에서, 바로 이러한 묵상 속에서, 인간 본연의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납니다. 그것은 한계를 지닌 사람의 생활 태도,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 태도입니다. 그러한 생활 태도는 진실, 용기, 인내입니다. 무엇보다 인내가 중요합니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로소 나옵니다.


68 이는 인간의 추구와 사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 그 안에서 추적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현상입니다; 유한에 대한 유난히 강한 불만입니다. 절대자를 향유하고 싶어하는 방식에 있어 특별한 종류, 특별한 강도를 원하는 의지입니다. 그 사람은 이 절대자를 그냥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 절대자를 윤리적으로 염원하면서 행동 속에 그냥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합일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와 존재가 서로 접촉하고 싶은 갈망; 잠기고, 마시고, 뱃속 가득히 채우고 싶은 갈망입니다. 존재하며 하나 되고 싶은 갈망입니다.


68 여기, 우울감에 빠져 있는 사람 안에 특별한 색채를 띠면서 그토록 괴로운 모순으로 마주 서 있는 인생의 두 근본 충동이 밀어닥칩니다; 충만에 대한 충동과 몰락에 대한 충동입니다. 궁색하고 인간적 현세적일 뿐인 실존 형태가 몰락하여 저 하나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가운데 인생의 충만이 최고 상태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역주: 갈라 2,20) 하고 말씀하시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저 마음 상태가 지닌, 그리고 우울감 속에서 값을 치르게 되는 내면 깊숙한 동경을 한 차원 높은 그리스도교적 차원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갈망은 이 절대자가 선이시고, 고귀한 분이시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분은 당신의 본질상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시라는 데서 나옵니다. 우울감에 허덕이는 사람은 절대자와 만나기를 갈망하는데, 그분은 사랑이시고 아름다움이신 절대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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