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누키 다카시: 성경읽는 법 ━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위한 짧고 쉬운 성경 안내서


성경읽는 법 - 10점
오누키 다카시 지음, 최연희 옮김/따비



들어가며 | 성경을 어떻게 다시 읽을까


1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성경 읽기

1. 정전과 고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숙명

2. 제멋대로 배열된 이야기들

3. 이질적인 고대의 세계상

4. 이해할 수 없는 신의 행동


2부. 자신 있게 성경 있는 법

1. 그리스도교라는 전차에서 내릴 용기와 오를 용기

2. 목차를 무시하고 문서별로 읽기

3. 이질적인 것을 존중하고 그 마음을 읽기

4. 당사자의 노고와 경험에 다가서기

5. 즉답을 구하지 않기


3부. 성경 문서 해설

1. 구약성경

2. 신약성경

3. 그노시스주의 문서


글을 마치며




들어가며 | 성경을 어떻게 다시 읽을까

12 난생 처음 성경을 읽으려는 학생도 적지 않을 텐데, 나는 지금 강의실에서 너무 성급하게 너무 일방적으로, 전문적 연구를 통해 느껴 온 성경의 재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들과 같은 나이에 내가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 그 망연자실과 방향 상실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강의를 듣는 학생만이 아니라 성경을 처음 읽으려는 사람이 느낄 법한 괴로움을 좀 더 친절하게 풀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런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성경은 그토록 읽기가 힘든 것일까?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성경 읽기는 당연히 어렵다


첫째, 무엇보다 성경은 혼자서 통독하며 이해하려는 독자에게 너무 불친절한 책이다.

구약성경은 우선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열왕기까지, 유대교의 조상인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걸었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 다음은 욥기와 시편 등을 거쳐 여러 예언자 각각의 이름이 붙은 문서(예언서)가 이어지며, 전체 39개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유대교가 최종적으로 그 39개 문서로 한정하여 자신들의 표준적인 성문서, 즉 '정전'으로 삼은 것은 기원후 1세기 말의 일이었다.


그리스도교는 그 후 4세기 중엽까지 거의 같은 범위의 문서를 《구약성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배열순은 유대교의 정전과는 게 다른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대교든 그리스도교든 정전의 39개 문서를 저마다 생각하는 배열순으로 공적인 예배의 장에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신약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에서 시작하여 사도행전, 그리고 〈~의 편지〉라고 불리는 21개 문서를 거쳐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으로 끝난다. 이처럼 총 27개 문서로 정전 《신약성경》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때는 구약성경이 받아들여진 것과 같은 시대였다. 다만, 정전 문서의 배열순은 당시에도 확정되지 못했다. 역시, 문서의 배열순은 그리스도교회의 예배 시 봉독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읽는 이가 서재에 틀어박혀 혼자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는 일은 예상도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어지간한 규모의 서점이라면 어디서든 성경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선의의 독자들은 당연히 인쇄된 목차에 따라 읽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통독해도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예전의 나처럼 망연자실과 방향상실을 맛보게 된다.


둘째, 성경은 언제나 "주 하나님"을 주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이야기에는 반드시 말하는 이가 있다. 그 말하는 이는 인간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하는 이는 대체로 이야기의 배후에 숨은 채 겉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위해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이야기의 표면만 더듬어 나간다. 하나님의 행동이 이치에 맞을 때는 그나마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언행이 자기모순을 일으킨다. 선의의 독자는 '하나님은 제멋대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며 '아무래도 나와는 잘 맞지 않겠구나.'하는 선입견을 가질지도 모른다.


이런 인상은 특히 구약성경을 읽을 때 강하게 들 텐데,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구약성경의 39개 문서가 정전으로 확정된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기원후 1세기의 일이지만, 각각의 문서는 기원전 수백 년에 걸쳐 이스라엘 민족 및 유대교의 변화무쌍한 역사의 여러 국면에서 쓰인 것이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선사 시대의 암혹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역사 시대의 빛 아래로 나타나기 시작한 무렵부터의 태곳적 전설(아브라함 이삭, 야곱 전설 등)도 담겨 있다. 그처럼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 혹은 인간이 신을 경험하는 방식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는 구약성경을 통독할 수도, 독해할 수도 없다.


이런 사정은 원칙적으로 신약성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문서에서도 말하는 이가 자신을 주어로 내세워 자기 경험에 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로 삼아 양쪽의 행동에 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마가복음서 제8장에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는 장면이 있다.(33 절) 자기 일행이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즈음, 그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 데 베드로가 항의하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예수가 그렇게 꾸짖은 것이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처럼 두려워한 베드로의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관점이다. 그런 식으로 읽으면, '예수께서 꾸짖지 않을까?'하는 걱정부터 하지 않아도 된다.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표면의 이야기에만 질질 끌려다니지 말고, 이야기의 배후에 숨은 화자가 인간으로 겪어 온 다양한 경험을 음미하는 것, 말 그대로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그러나 초심자에게 이런 시도는 전문적인 연구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셋째, 그리스도교회에서 하는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읽기가 일반 독자에게까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미치는 구속 때문이다.


이미 신약성경이 쓰인 때부터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 해석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해석에 따르면,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각각의 언동,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이미 구약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그대로 실현하였던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야기되는 사건은 '예표'(혹은 예형)이며,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사건으로서 도래할 본체를 선취하는 것이었다는 해석도 이루어졌다.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 방식은 신약성경에 무수히 나타난다.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읽기도 당연히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그 자체로 읽는다는 의식이 쉬이 밀려나 버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구약성경은 원래 유대교의 정전이었다. 유대교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교회의 그러한 읽기는 너무도 제멋대로의 읽기라는 것이 독자에게 의식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읽기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아니, 각각의 구절이 영감에 의해 쓰였다고 생각하는 입장(축어영감설)에서는 성경 전체를 무오류의 책이라고 여긴다. 이미 언급했듯이, 신의 언행이 지닌 자기모순('하나님은 제멋대로이다.')도 갖가지 논리를 통해 온전하고 수미일관한 신의 행동계획으로 수렴되어 버린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읽기의 경우에도(상세한 것은 해당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일정한 사고의 틀이 하나의 '기본 문법'으로 존재하여 성경 전체가 끝까지 그 기본 문법에 따라 해석된다. 거기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각 문서는 다소간 서로 조화롭게 읽힌다.


오늘날 이러한 전통적이고 규범적인 읽기가 그리스도교는 물론이고 그 밖의 독자에게까지 끼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큰 편이다. 성경을 자기 책임으로 자주적으로 읽으려 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성경은 교회의 것이고 멋대로 읽을 수 없고 무엇보다도 교회에서의 읽기를 알아야 한다는 식의 자기 규제가 작동해 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교회 안에도 실로 다종다양한 교파가 있어, 외부인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개중에는 보기에도 수상쩍어,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곳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 대체적인 심정이 아닐까 싶다. 그런 상황에서는 은근히 반발이 생기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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