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수레바퀴 아래서 - 10점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민음사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7 요제프 기벤라트 씨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에 견주어 볼 때, 그에게는 장점이나 특성이랄 것이 없었다. 여느 사람처럼 그는 넓은 어깨에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어지간한 장사 수완을 지닌 그는 황금을 숭배하는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정원이 딸린 아담한 저택에다가 선조들이 대대로 묻힌 가족 묘가 있었다. 그의 종교 의식은 약간 개방적이기는 했지만,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신과 관료주의에 대해서는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였고, 시민적인 예의범절의 확고한 불문율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맹목적인 복종심을 보였다. 그는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한 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47 한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눈망울을 번뜩이며 즐거운 기분으로 낚싯대를 다듬었다. 그 일은 낚시질 그 자체에 못지 않은 즐거움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오후 내내, 그리고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한스는 그 일에 매달렸다. 헝클어진 흰색과 갈색, 녹색의 실을 나누어 꼼꼼하게 살핀 뒤, 끊겨진 실을 잇기도 하고, 서로 뒤엉켜진 매듭을 풀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의 코르크 마개와 깃축을 살펴보기도 하고, 새로 깎기도 했다. 망치질을 해서는 무겁거나 가벼운 자그마한 납덩이들을 틈새를 갖춘 둥근 형태로 만들었다. 그 틈새에 낚싯줄을 끼워 무게를 붙이게 되어 있었다. 다음으로는 낚싯바늘 차례였다. 한스는 서너 개의 낚싯바늘을 보관해 두었었다. 그것들을 네 겹의 검은 재봉실이나 장막현, 그리고 꼬아 엮은 말총끈에 단단히 동여매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작업이 모두 끝났다. 이제 한스는 7주나 되는 기나긴 방학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낚싯대가 전부였다. 그것만 손에 들고 있으면, 혼자서 강가에 앉아 얼마든지 하루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80 「그래, 다행이구나. 너한테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영혼을 더럽힐 바에야 차라리 열 번이라도 육신을 썩히는 게 낫단다. 넌 나중에 목사님이 될 거잖니. 그건 근사하면서도 힘든 일이지. 올바른 일꾼이 되기 위해선 네 또래인 대부분의 젊은 애들과는 달라야 하는 거란다. 아마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너도 영혼을 구제하고 교육하는 일꾼이 되겠지.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게」

구둣방 아저씨는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잘 가거라, 한스! 언제나 바른 길에 서도록 해라! 주님께서 널 축복하시 고, 보호해 주시길 빈다. 아멘!」

아저씨의 엄숙한 태도와 기도, 그리고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짤막한 작별 인사가 소년 한스에게는 어쩐지 답답하고 곤혹스러웠다. 마을 목사는 헤어지면서 아저씨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스는 신학교에 갈 준비를 서둘렀다. 주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다보니 불안스러웠던 며칠이 숨가쁘게 흘러가 버렸다. 이불이며 옷가지며 책을 담은 상자는 이미 차편을 통해 수도원으로 보낸 뒤였다. 가지고 갈 여행가방도 다 챙겨놓았다. 어느 서늘한 아침 아버지와 아들은 마울브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향과 부모님의 집을 떠나 낯선 학교에 가는 것은 여간 흥분되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20 마을 사람들은 한스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몸이 너무 야위고, 얼굴이 너무 창백해 보인다고 말했다. 수도원의 식사가 그렇게 형편없는지 묻기도 했다. 한스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잘 지내는데 가끔 머리가 아플 뿐이라고 했다. 그러자 마을 목사는 자기도 젊었을 때 그랬었다며 한스를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강물이 매끄럽게 얼어붙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축제일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톰도 없이 붐볐다. 한스는 거의 하루 온종일 밖으로 나돌아다녔다. 새 옷을 차려 입고 녹색의 신학교 모자를 쓰고서. 그는 예전에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아주 높은 세계에 우뚝 올라선 것이었다.


169 하일너는 수도원의 평화를 깨뜨릴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 한스가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보았지만, 하일너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하일너는 떠났고, 또 사라져버렸다. 이 인물과 탈주 사건은 차츰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어 갔고, 급기야는 하나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이 열정적인 소년은 천재다운 시도와 방황을 거듭한 끝에 삶의 고뇌를 거쳐 엄격하고 정숙한 규율을 몸에 익혔으리라. 그래서 비록 위대한 인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어엿한 인물이 되었으리라. 뒤에 남은 한스에게는 하일너의 도주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의혹의 눈초리가 따라다녔다. 이로 인하여 한스에 대한 선생들의 호의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 어느 선생은 한스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자넨 왜 그 잘난 친구 하일너 와 함께 가지 않았나?」

교장 선생은 한스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마치 바리새인이 세리에게 그러했듯이 경멸에 가득 찬 동정심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기벤라트는 더 이상 학생들의 무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는 문둥병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197 어느 날 저녁, 한스는 안채로 이르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습기에 찬 들을 지나 피혁공장으로 가보았다. 마치 이 커다란 낡은 집에 이미 사라져버린 수많은 즐거운 추억과 더불어 자신의 어린 시절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듯이. 굽어진 층계와 돌을 깐 문어귀를 지나 어두컴컴한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가죽이 널려 있는 다듬이터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거기서 그는 코를 찌르는 가죽 냄새와 더불어 갑자기 솟구치는 추억의 뭉게구름을 들이마셨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뒤뜰로 가보았다. 거기에는 무두질을 하는 굴과 가죽의 찌꺼기를 말리는 건조대가 있었다. 높이 세워진 그 건조대 위에는 좁은 지붕이 덮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벽 앞의 의자에는 리제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감자 바구니를 앞에 놓고는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귀를 기울이며 둘러앉아 있었다.


197 한스는 어두컴컴한 문턱에 서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늑한 평화가 저물어가는 피혁 공장의 뜰에 가득 차 있었다. 뜰의 담장 너머로 흐르는 강물의 가냘픈 속삭임 이외에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그녀의 칼 소리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아이들은 거의 꼼짝하지도 않고 얌전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한밤 중에 어린 아이의 음성이 강 건너편에서 들려왔다고 진해지는 성 크리스토포루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스는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어두컴컴한 현관을 살그머니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저녁 무렵 피혁 공장의 뜰에서 리제 곁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두 번 다시 피혁공장이나 〈매의 거리〉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230 다리 위에서 한스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나도 피곤한 나머지 어쩌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난간에 걸터앉아 강물이 다리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와 둑에서 거품이 이는 소리, 그리고 물레방아가 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손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가슴과 목구멍에서는 피가 막혀 있다가 갑자기 터져 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피가 다시 심장을 향해 용솟음칠 때는 어지러웠다.


230 한스는 집에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눕자마자 곧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그는 어마어마한 공간을 넘나들며 심연에서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한밤중에는 괴로움에 지친 나머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아침까지 꿈과 현실 가운데 몽롱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목이 마르게 애닮은 그리움에 지쳐 억누를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진 채. 이른 새벽이 되어 그의 고통과 번민이 끝없는 흐느낌으로 터져나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눈물에 흠뻑 젖은 이불 위에서 다시 잠이 들었다. 


260 마침내 아버지도 그의 분노도 잠에 굴복하고 말았다. 같은 시각, 아버지 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꾸짖던 한스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조용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이나 부끄러움이나 괴로움도 모두 그에게서 떠나버렸다. 어둠 속에서 흘러내려가는 한스의 메마른 몸뚱이 위로 푸른 빛을 띤 차가운 가을밤의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시꺼먼 강물은 그의 손과 머리, 그리고 창백한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먹이를 구하려고 나선 겁많은 수달이 교활한 눈초리를 번뜩이며 그의 곁을 소리없이 지나갔을 뿐, 어느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길을 잃고, 가파른 언덕에서 발을 헛디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다가 몸의 중심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혹시나 아름다운 강물에 이끌려 그 위로 몸을 굽혔는지도 모른다. 평화와 깊은 안식이 가득한 밤, 그리고 창백한 달빛이 그를 향해 비추었기 때문에 피곤함과 두려움에 지친 나머지 어찌할 수 없이 죽음의 그립자에 휘말려 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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