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 예수가 상상한 그리스도 / 살림지식총서 281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5. 8.
예수가 상상한 그리스도 - 김호경 지음/살림 |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
사물과 도구
나라 없는 이스라엘
로마 제국
하나님 나라
권력에 대한 도전
저항하는 상상력
공간의 파괴
시간의 발견
무력한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6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는 예수라는 역사 속 인물과 그에게 부여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묶어 그리스도인 예수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일차로 만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즉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이해된 예수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은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 드러난 예수는 마치 세잔의 사과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7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을 쓴 저자들의 상상에 초대되는 일이며,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을 쓴 저자들의 상상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넘어섬으로써 예수라는 땅과 그리스도라는 하늘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상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이를 신학적 상상력이라 부르고자 한다.
7 신학적 상상력은 우리 눈앞에 제시된 예수에 대한 자료들의 행간을 읽어가며 성경을 쓴 사람들의 상상력에 동참하는 일이다. 신학적 상상력은 자료를 비껴가는 상상력이 아닌 자료를 재구성해 예수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자료와 자료 사이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과거의 예수와 현재의 독자를 만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상상은 예수라는 현실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비현실이 어떻게 하나로 만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열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3 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대항해서 오합지졸처럼 형성한 무리들이, 오랫동안 이방인들에게 내주었던 그들의 성전을 되찾았다. 성전을 되찾은 것은 이스라엘의 종교 독립을 가능하게 했고 결국은 헬레니즘에 대항할 수 있는 독립 왕조를 형성하게 했다. 마카비 왕조나 하스몬 왕조라 부르는 이것은, 기원전 6세기 이후 힘을 잃은 채 수백 년을 지내온 이스라엘이 천신만고 끝에 얻은 왕조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왕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왕조를 둘러싸고 권력을 위한 암투들이 일어났으며, 결국은 그것이 왕조의 생명을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왕과 제사장의 결탁, 세도가들의 음모,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지는 끝없는 살육과 반란 등 어느 역사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 이곳에서도 일어났다.
17 예수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전복적 가능성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그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도 과연 그렇게 혁명적일까? 예수의 혁명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가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염원을 하나님 나라에 투사했고 혁명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혁명 질서와 그것을 일구어낸 방법의 차이를 지나쳤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혁명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여기서 혁명이란 사회 질서를 뒤집는 무력 행위를 포함한다.
17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견디면서 기다릴 것을 요구한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그들이 만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주된 특징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뿐이며 그에 합당한 삶을 요구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전복 행위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만들어나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길갈을 만드는 것 밖에는 안 된다.
18 예수의 칭호와 정체의 이러한 불균형으로 인해,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보다 ‘어떤’ 그리스도인지 중요해진다. 신약성경에 있는 예수의 칭호는 확실히 보통 의미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의 죽음에 대한 고지가 따라오며,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한 베드로가 비난받은 것은 이와 같은 이유이다. 예수는 그의 삶을 통해서 그가 받는 칭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칭호와 예수의 정체 사이에 있는 괴리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18 그것은 권력 혹은 힘에 대한 이해이다. 예수에게 붙인 다양한 칭호는 그가 권력을 가진 자라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경은 ‘엑수시아eksousia’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것을 드러낸다. 엑수시아는 권세, 힘, 능력 등을 뜻하는 헬라어로 ‘하나님에게서 받은 초월적 능력’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호칭을 사용해 예수를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호칭들의 공통점은 그가 권력을 가진 자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는 그의 권력이 그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이 권력이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20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가치인 ‘거룩함’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이를 반영한다. 거룩함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며 나라 없는 백성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지켜준 중요한 사회 가치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다양한 조건들을 갖추었다. 그 조건들을 통해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윗부분을 차지하는 반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공동체가 요구하는 거룩함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공동체의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20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조건들을 폐기함으로써 그들의 사회 가치에 도전한다. 예수는 거룩함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거룩함은 예수에게도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방법에 있어서 예수는 거룩함을 유지하는 유대적인 모든 관습들을 무효화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거룩함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이로써 기존의 질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29 시간을 나타내는 몇 개의 그리스어 가운데 크로노스와 달리,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의 시간이 있다. 카이로스는 ‘적절한 순간, 기회, 올바른 척도’ 등을 뜻한다. 적합한 순간을 나타내는 그리스의 신 카이로스는 발이나 어깨에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단어인 호라hora는 하루의 때를 나타낸다. 호라의 복수인 호라이horai는 계절의 변화를 담당하는 신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호라이가 언제나 곡물과 수확과 관계된 신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호라이는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다른 세계에서 온 신적인 전령의 역할을 한다. 호라이로 표현된 시간은 인간에게 마치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호라는 인간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시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호라에서 나온 호라이오스horaios라는 형용사는 아름답다는 의미인 칼로스kalos와 동일하게 쓰인다. 카이로스로 표현한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30 성전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력을 이루지만, 성전 안의 공간의 구분도 이스라엘의 권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성전의 가장 은밀한 곳부터 성전의 뜰에 이르기까지 각각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강도의 굴혈과 같은 성전을 비난하며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으로서 성전의 기능을 강조한다. 성전에 대한 공격은 성전의 공간을 중심으로 형성한 권력에 대한 비난이다
30 이로써 기독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공간적 특성을 벗어난다. 공간을 벗어난 예수의 강조점은 시간에 놓인다. 예수는 하나님의 ‘때’, 즉 카이로스를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 새로운 시간의 선포는 시간의 균질성과 권력의 고정성을 파괴한다. 그것은 잡을 수 없는 시간의 특성을 드러내며 시간과 권력의 연관성을 파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시간을 경험하는 것의 지루함과 잔인함을 넘어서는 카이로스나 호라는 크로노스가 지배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인다.
30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발견한 것도 시간의 비밀이다. 그의 죽음은 시간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시간의 경험이 예수에게는 삶 속에서 겪는 죽음의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죽음을 생을 마감하는 한 순간의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고 삶 속에 죽음을 앞당김으로써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35 신약성경에서 부활을 말할 경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임을 강조하는 것은 이것을 배경으로 한다. 내어줌은 예수 자신의 결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은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킨다. 예수는 부활을 계산하고 죽음에 뛰어들지 않는다. 그런 속셈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은 위험하고 오만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행동을 계산하는 것은 땅 위에 있는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속물로서 예수의 죽음이 아가페 사랑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36 예수의 유일성은 예수가 살던 1세기 팔레스틴의 중층의 구조를 바탕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한 시대의 특징과 배경 속에서 예수는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에 유일성을 보장받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유일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무의미하다.
38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일종의 표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요구한다. 이 고난과 죽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걸려 넘어지고 예수를 불편한 존재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그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다시 한 번 골똘히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다양한 답이 나와 다양한 상상력으로 성경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렇다면, 예수의 숨겨진 여러 모습이 드러나 우리의 삶이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을 예수에 대한 물음의 답으로 여기는 사람보다, 예수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으로 읽어주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책 밑줄긋기 > 책 2012-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0) | 2020.05.22 |
---|---|
매튜 D.커크패트릭: 쇠얀 키에르케고어 ━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0) | 2020.05.19 |
강유원: 책 읽기의 끝과 시작 ━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 (0) | 2020.05.15 |
이재숙: 인도의 경전들 ━ 베다 본집에서 마누 법전까지 / 살림지식총서 311 (0) | 2020.05.14 |
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0) | 2020.05.04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0) | 2020.04.27 |
데이비드 프롬킨: 현대 중동의 탄생 (0) | 2020.04.20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0) | 2020.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