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우연적 삶에 관한 문학과 철학의 대화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10점
이유선 지음/라티오


아이러니의 일상

1. 욕망과 환상 / 슬라보예 지젝《삐딱하게 보기》, 이해경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2. 동감 / 막스 셸러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와《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한수영 《공허의 1/4》

3. 인간의 유한성 /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이청준 《벌레 이야기》

4. 삶은 계속된다 / 로버트 브랜덤 《Making it Explicit》, 대니얼 클로즈《고스트 월드》, 나카무라 후미노리《흙 속의 아이》

5. 소시민의 삶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철학자 가다머 현대의학을 말하다》, 마르틴 발저 《도망치는 말》

6. 죽음에 대해 / 마르틴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7. 성(聖)과 속(俗) / 다윈의 진화론,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 문순태《포옹》

8. 절제의 쾌락 /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밀란 쿤데라《느림》


공동체의 삶

9. 사회정의의 요건 / 존 롤스 《정치적 자유주의》,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10.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까 / 버나드 윌리엄스《Truth & Truthfulness》, 조지 오웰《1984》

11.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 리처드 로티《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최인훈《광장》

12. 소비와 자유 / 지그문트 바우만《자유》, 제레미 리프킨《소유의 종말》, 장 보드리야르《소비의 사회》, 정미경 《무언가》

13. 지식인의 역할 / 플라톤《이상국가》, 황현《매천야록》

14. 관용의 문제 / 마이클 왈쩌《관용에 대하여》, 김애란《침이 고인다》

15. 휘트먼과 나라 만들기 / 안토니오 네그리《제국》, 리처드 로티 《미국 만들기》, 월트 휘트먼《북소리》

16. 정치적인 것 / 샹탈 무페《On the Political》, 아베 코보《모래의 여자》

17. 인정 질서 / 프리드리히 헤겔《정신현상학》, 전상국《우상의 눈물》

18. 본다는 것 /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철학이란 무엇인가》, 주제 사라마구《눈먼 자들의 도시》


우연적이고 철학적인 진리

19. 마음의 존재 / 르네 데카르트《방법서설》, 정영문《달에 홀린 광대》

20. 자살하는 인간 / 알베르 까뮈《시지프의 신화》, 김훈《칼의 노래》

21. 텍스트의 바깥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논리철학 논고》, 아멜리 노통브《살인자의 건강법》

22. 소통의 목표 / 위르겐 하버마스《사실성과 타당성》, 파트리크 쥐스킨트《비둘기》

23. 구원 없는 종교 / 김용준《과학과 종교 사이에서》, 심윤경《이현의 연애》

24. 올바른 말 / 언어철학자들, 엠마뉘엘 카레르《콧수염》

25. 이성과 감성의 모호한 경계 / 프리드리히 니체《비극의 탄생》, 토마스 만《베니스에서의 죽음》





26 소설가는 소설이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소설을 계속해서 써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설가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킨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계속 책을 읽고 싶어하는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이미 나의 욕망이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공허 그 자체인 실재가 현실을 넘어올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든다.


45 로티는 여기서 유태인을 구해준 이탈리아인이나 덴마크인이 인류애를 발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에라는 단어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하기에는 너무 큰 단어이다. 로티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단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그보다는 그가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 자식의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돕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도덕적 정서의 한계는 우리가 우리라는 범위 안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사실 우리든 그에게 어떤 공감도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솔직한 태도가 남의 자식보다는 자기 자식을 먼저 챙기고, 자신과 무관한 사람보다는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태도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가진 현실적인 모습이다. 우리의 도덕적인 노력은 그것을 무시하고 보편성을 향해 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우리’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데 맞추어 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연대할 이웃과 타도해야 할 원수를 현명하게 가려내야 하고, 타자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전 인류를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73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일상인의 퇴락한 삶의 한 양태를 드러낸다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은 어느 순간 우리를 엄습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 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하나의 존재양식인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죽음을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죽음을 타자의 죽음으로 인식하거나 설사 자신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부재를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 즉 당장의 죽음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나의 죽음은 나중에 온다고 하는 무한한 연장이 주는 위안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일종의 몰이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78 그렇다면 역전되지 않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몇몇 인도주의적인 심리학자와 사회학지들의 주장대로 죽음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그것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도록 하는 것이 과연 ‘자연적인’ 태도일까? 아리에스에 의하면 그런 태도는 기껏해야 18-19세기에 등장한 낭만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할 뿐이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천년 이상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길들이고 죽음과 더불어 잘 살아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78 의학의 발달로 야생 상태의 죽음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착각일 뿐이다. 아리에스는 오히려 중세시대에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져 있었던 죽음이 오늘날 야만적인 것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130 형이상학적인 철학자들은 이 두 영역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이론적으로 밝히고 그런 지적인 탐색을 통해서 어떤 합리적인 실천 방안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면 잔인성은 왜 나쁜가에 대한 어떤 이론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로티는 이런 류의 시도를 플라톤과 기독교를 계승하는 낡은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고문이 왜 나쁜가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고문과 같은 잔인한 행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연대에 도움이 될까? 로티가 자유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러니스트'라는 명칭을 덧붙여 창조하고자 한 새로운 유형의 인물은, 잔인한 행위가 왜 나쁜가에 대한 이론적 합의에 이르지 않더라도 그 행위에 반대하는 연대에 참여함으로써 자유의 폭을 넓혀가려는 실천에 나서는 인물이다. 로티는 폭력과 잔인성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서술이 어떤 근본적인 성찰에 도달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재서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143 리프킨이 말하는 소유의 종말은 마르크스가 없애고자 했던 사적 소유의 종말이 아니라, 물리적인 형태의 재화의 소유가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전에는 돈을 주지 않아도 되었던 것에까지 이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연대와 문화적 체험 같은 소유할 수 없는 무형의 것에 대해서까지도 우리는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돈만 지불하면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르크스의 전인적인 인간은 오늘날에는 '소비하는 인간'이 된 셈이다.


152 여기에는 꽤 서글픈 진실이 가로놓여 있다. 아이들은 불의가 물러간 세상에서 순응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제 큰 악당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남은 자들은 존경받아야 할 승리자들 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더 이상 총칼로 정권을 잡은 살인마들이 아니며, 기업가들은 독재자에게 뇌물을 주고 수혜를 받은 파렴치한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세계무대의 경쟁에서 승리한 영웅들이다.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는 이유는 진리를 밝혀 정의를 실현하기 보다는 경쟁 사회에서 승리하여 질적으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목표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냐 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목표는 다 같으므로) 그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경쟁에서 어떻게 페어플레이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총학생회의 폭력은 그래서 문제가 된다. '니네들이 정치가로 성공하겠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내가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일에 방해는 하지 말아줘'하는 것이 아마도 '일반' 학생들의 생각이 아닐까 한다.


153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세상, 타도할 대상이 없어져서 이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잔인성 같은 것을 정치적 공격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포스트 모던한 세상이 오고야 만 것인가? 아마도 그렇다고 하기에는 출세한 386정치인들조차도 어딘지 낯간지러운 구석이 있을 것이다.


208 '본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들은 눈앞에 놓여 있는 객관적인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봄' 과 '앎'의 이러한 연관성은 경험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인식에 있어서 감각 경험의 역할을 부정했던 근대의 이성주의지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시각을 위시한 모든 감각경험의 불확실성 때문에 주관적인 반성 영역으로 되돌아 갔던 데카르트 역시 외부의 정보를 종합해서 판단하는 중심으로서의 이성을 말할 때 여전히 시각적인 은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의 심리철학자인 데넷이 데카르트의 이성을 일컬어 '데카르트 극장'이라고 부른 것은 거기에 여전히 '본다는 것'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208 실증주의는 특히 '본다는 것'의 가치중립적인 성격에 근거하고 있다. 실증주의자들은 보이는 것이 곧 실재하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은 우리가 잘못 보는 것이 아닌 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볼 수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둔 학문이다. 실증주의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여기서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이 확보된다. 과학적 탐구의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선입견, 가치관, 도덕적 정서, 미적 취미를 배제하는 한 우리는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14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사람답게 사는 것'과 관련된다. 눈이 멀게 된 상황에서 창조해야 할 개념은 '본다는 것'의 부재를 채워 줄 개념만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사라마구가 그리고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은 그러한 개념에 대한 모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37 희망을 가질 수도 없고, 자살을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면,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우리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대답은 간단하고 진부하다. 살 만한 가치가 없다면 가치를 만들면 된다. 어떤 광고의 카피처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실존주의자들의 대안이다. 실존이란 부조리를 의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따라서 습관적인 삶을 반복하는 일상인에 비하면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철학적인 사유에 한걸음 더 다가간 셈이다. 실존적인 상황이란 부조리로 기득 찬 세상을 자신이 감내하고 살아가야 할 세상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 인생의 덧없음을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긍정함으로써 그 덧없음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실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251 그런데 세계 자체에 대해 직접 접근해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논리적 구조가 반영되어 있는 언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할 때 언어 안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 세계 내 사물의 질서라는 것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세계 내 사물의 질서는 우리의 말 속에서 그저 '드러날(zeigen)' 뿐이다. 우리는 사실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실들을 구성하는 세계 내 사물의 질서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과거에 형이상학자들이 해 왔던 일이다. 언어의 한계가 우리의 세계의 한계이며, 그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를 구성하는 무의미의 영역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270 그런데 인간의 기도는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낸 이후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인간이 처한 고통의 상황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구원을 갈구하는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묻고 가는 것이 지적인 피조물로서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다윈이 등장해 인간이 그다지 특별한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꽤 설득력 있게 주장한 다음에는 소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피안의 어떤 것에 마음 편히 의존할 수 있는 상황은 끝이 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종교에 승리를 거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종교적인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간절한 기도가 없이는 현실의 고통을 버티기 힘들다. 과학이 아무리 종교를 대신하고 있고 과학자가 성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종교적 심성을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의 물음은 다윈 이후의 종교, 즉 과학기술 시대의 종교는 어떤 내용을 갖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92 고결함과 천박함의 구분은 혈통에 의해 신분이 나뉘었던 시절, 천상의 진리와 지상의 비진리가 나뉘었던 시절에나 통할 이야기가 아닐까? 정신적인 가치의 고결함을 말하는 것은 그런 지대에 대한 향수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정신적인 도야가 사람을 고결하게 만든다면 배고픈 인문학 박사 실업자들이야 말로 고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상아탑의 노예' 취급을 받으며 밥벌이를 위해 길바닥을 헤매고 다니면서 인생의 낙오자라고 손가락질당할 뿐이다.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고결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이제 더 이상 귀족적인 것과 천박한 것이 명확히 구분되는 시대가 아니다. 세속적인 천함이 정신적인 고결함의 징표가 되었다면 상황을 좀 과장한 것일까? 자신의 삶을 아무리 고결한 모양으로 포장해 세상에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삶의 완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규범에 의해 지배받고 세상의 평가에 의해 만족감을 얻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느끼는 존재이다.


293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플라톤의 본질과 현상의 이분법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은 매우 편리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물을 둘로 나누어 보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둘의 우열을 가리는 일을 하게 된다. 둘 다를 동시에 고려하면 될 텐데 그런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인생의 가치를 고결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구분하는 관점도 그런 이분법에서 비롯된다. 물론 플라톤의 전통에서 고결한 것은 언제나 정신적인 것 이성적인 것이었다. 귀족의 삶이란 육체적인 노동과는 무관한 것이었으므로 신분제 사회에서 이런 구분법에 반대할 귀족은 없었다. 또한 천박한 인간은 살기 위해 육체노동을 하느라 그것을 논박할 여유가 없었다. 니체가 근대 이후 각광받는 이유는 이러한 관점을 뒤엎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것에 억눌려 온 인간의 모든 비합리성에 숨통을 열어 줌으로써 니체는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고찰될 수 있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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