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프롬킨: 현대 중동의 탄생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4. 20.
현대 중동의 탄생 -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갈라파고스 |
48 처칠세대의 유럽인들은 술탄과 샤가 다스리는 무기력한 두 제국,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따라서 두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따금씩 벌어지는 아르메니아인 학살도 서구여론이 반짝 들끓는 것으로 그쳤을 뿐 러시아의 유대인 학실처럼 지속적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속물 정치인들은 그렇게 조변석개하는 여론에 편승하여 효과가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술탄에게 즉흥적으로 개혁을 강요하다가 슬그머니 발을 빼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유럽인들 마음 속에서 중동은 언제나 하찮은 궁정 음모나 벌이고, 관료사회는 썩어빠지고, 부족간 동맹은 밥 먹듯 편을 바꾸고, 백성들은 나태하고 무심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런던, 파리, 뉴욕에 사는 평범한사람들이 그들의 삶이나 이해관계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요소는 그 장면 속에 없었다. 베를린만 예외적으로 중동에 철도를 부설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마저도 상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오늘날 군대와 테러분자들을 죽고 죽이는 일에 내몰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광기는 당시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48 그 무렵의 정치 지형도는 오늘날과 달랐다.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만 해도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49 20세기가 끝나가는 작금의 중동 정치는 물론 그때와는 양상이 판이해져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변했다. 이렇게 폭발 직전의 중동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다름 아닌 1차 세계대전 전에는 무슬림 아시아에 별 관심이 없었고, 대중적 인기도는 높았으나 불신도 많이 받았던 영국의 젊은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었다. 이 무슨 야릇한 운명의 장난인지 처칠과 중동은 서로 간의 정치적 삶에 지속적으로 개입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 흔적을 남겼다. 현재 중동을 가로지르는 국경선들이 바로 양자의 충돌이 만들어낸 상처투성이 선들인 것이다.
62 요스만제국은 지리멸렬했다. 지배자들의 인종도 제각각이었다. 언어는 튀르크어를 시용했지만, 지배자 대부분이 발칸과 여타 지역 기독교 노예의 후손이었다. 제국의 백성들도 튀르크어, 셈어, 쿠르드어, 슬라브어, 아르메니아어, 그리스어 등의 언어를 시용히는 각양각색의 종족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간의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고, 많은 경우 서로에 대한 애착도 크지 않았다. 훗날 유럽인들이 '아립인들'로 통칭해 부른 이집트인, 아라비아인, 시리아인만 해도 역사, 인종적 배경,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사람들이다. 이렇듯 오스만 제국은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사람들이 모자이크를 이룬 다민족, 다언어 제국이었다.
77 오스만제국은 제1차 빌칸전쟁(1912~1913)에서도 발칸동맹(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 패해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제2차 발칸전쟁(1913)에서는 아시아 쪽 터키의 맞은편에 위치한 트라케(트라키아)를 용케 회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붕괴가 계속되는 와중에 찾아든 잠깐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권을 잡고 술탄의 각료로 제국을 지배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청년튀르크당은, 제국의 영토가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고 유럽의 포식자들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23 결국 오스만제국을 해체하려고 한 영국의 결정으로 지난 수백 년 동안 유럽인들이 중동에 대해 갖고 있던 가설은 현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몇몇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이후 중동의 정치적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1914년 영국 지도자들이 예견했던 한 가지 사항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오스만제국의 참전이 중동의 개편으로 나아가는 길의 1단계, 아니 현대 중동의 탄생으로 나아가는 길의 1단계가 된 것이다.
151 서방과 중동은 20세기 거의 내내 서로를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오해의 많은 부분은 1차 세계대전의 초기 국면을 키치너가 주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묘한 성격, 이슬람권에 대한 몰이해, 키이로와 하르툼의 부관들이 보내준 부정확한정보, 교섭에 필요한 아랍 정치인들의 선정, 이 모든 요소가 향후 정치 판세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215 독일과 전쟁이 터지고 오스만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100일간, 오스만제국 영토를 보전해야 한다는 기존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1세기 넘게 유지해온 영국 외교정책의 근간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었다. 그리하여 튀르크와 전쟁이 발발한 지 150일째 되는 날, 애스퀴스 정보는 마침내 오스만제국의 해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영국도 영토분할에 참여하는 것이 이롭다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288 양측은 이런 식으로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결국은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사이크스 쪽에서 보면 프랑스가 확대된 레바논을 지배하고 여타 시리아 지역에 대한 독점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구너한을 갖게 되었으니, 모술까지 이어지는 세력권을 프랑스에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이고, 피코는 피코대로 그것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메소타미아의 두 지방 바스라와 바그다드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333 헤자즈 봉기가 일어난 직후에 발간된 《아랍 보고서》(1916년 6월 6일자) 창간호에 실린 로렌스의 글을 보면, 아랍인들은 심지어 봉기의 목적 면에서도 일치단결이 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로렌스는 대규모 부족 모임이 열리기만 하면 아랍인들은 어김없이 분쟁을 일으켰으며, 튀르크도 아랍인들의 그런 기질을 알기에 뒤로 물러 앉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라고 썼다. 튀르크가 조치를 미룬 것은 “부족 간 투쟁으로 그들이 조만간 공중분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384 겔판트의 예상대로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의 핀랸츠키역(핀란드역)에 도착해 그를 마중나온 사람들을 퉁명스레 대한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파를 즉각적 종전을 지지하는 러시아의 유일한 정치세력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임시정부가 좌파 정치인들로 구성되었으니 이제는 러시아를 지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 그의 지지자들 생각도 그는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전쟁으로 자본주의는, 레닌 스스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 규정한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고, 따라서 지금이야말 로 전 유럽의 사회주의 정파들이 혁명을 일으키기에 적기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385 아니나 다를까 1917년 가을 독일이 보내준 추가 보조금의 도움으로 권력을 작악하고 산산조각 난 러시아의 독재자가 되자마자 레닌은 즉각 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러고는 1918년 3월 독일의 요구사항이 반영된 강화조약 체결함으로써 러시아의 패배를 인정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베를린 양쪽을 도와주고자 한 겔판트의 바람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레닌에 대한 지원이 결국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발을 빼는데 일조한 것이다.
386 러시아의 붕괴 가능성은 1914년 9월 이래 줄곧 영국의 악몽이었다. 반면에 엔베르 파샤에게는 그것이 꿈이었으며, 오스만제국을 동맹국 편에 가담시킨 것도 그래서였다. 그 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은 한쪽의 악몽과 다른 쪽의 꿈이 실현된 사건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917년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뺀 것이 영국과 연합국에는 심대한 타격이었고, 독일과 오스만제국에는 쾌거였다는 사실이다.
391 중동에 품고 있던 로이드 조지의 제국주의 야망에 미국의 그림자가 처음 드리우기 시작한것은 1916~1917년 사이였다. 1916년의 마지막 분기에 들어서는 연합국이 보급품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합국의 자금이 바닥을 드러냈다. 1916년 말엽에는 당시 재무부 관리였던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마저, "미국 행정부는 물론이고 미국민들까지도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내각에 경고할 만큼 상황이 자못
심각했다. 1916년 12월에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이 영국에 자금을 융자해주던 J. P. 모건사에 개입하여, 연합국의 자금 융자 시장을 붕괴시켜 영국과 프랑스를 파산 상태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음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419 시온주의는 새로운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역사는 바빌로니아에 의해 독립을 잃고 서기 2세기에는 로마의 지배에 항거해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뒤 수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추방되었던 고대 유대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랑할 때도 그들 고유의 법률, 관습, 종교를 고수하여, 이주한 곳의 원주민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열등한 지위, 박해, 빈번한 학살, 되풀이되는 추방도 유대인 특유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그들은 언젠가는 하느님이 자신들을 시온으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믿고, 유월절 행사 때마다 “이듬해에는 예루살렘에서!”의 기도문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이렇듯 메시아적 꿈으로 남아 있던 시온으로의 복귀는 19세기 유럽에 등장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시대의 정치 현안으로 탈바꿈했다. 프랑스 혁명군이 도처에 이식하여 만개한, 모든 민족은 그들만의 독립국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그 시대의 대표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535 전쟁도 이제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단계로 접어들어 오스만제국과 영국제국은 기진맥진 녹초가 된 채 사막과 내해에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일련의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교전국들이 군사작전과 정치공작을 벌이는 사이 20세기의 앞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새로운 사태는 전개되고 있었다. 서방 군대가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석유가 중동의 전쟁에서 주요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629 중동지역은 종전무렵 영국군이 점령할때만 해도 저항의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이윽고 분란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 시작된 독립의 요구가 1919년에 들어서는 소요로 발전해간 이집트를 시작으로, 표면상 이집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인도 변경지에서도 1919년 전쟁이 발발했다. 아라비아의 영국 정책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와해되는 조짐을 보였다. 불행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당시 중동의 영국 당국에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형국이었다. 트란스요르단만 해도 부족 간 투쟁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서팔레스타인에서도 1920년 봄 유대인을 향한 아랍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며, 1920년 여름에는 이라크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마도 종전 뒤 중동에 주둔한 영국군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들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31 전후 영국이 중동에서 갖고 있던 입지에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곳은 수십 년간 영국이 ‘임시’보호령으로 통치했고, 그곳의 영국 통치자들이 처음부터 아랍어권 사람들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영국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이집트였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이집트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한 점에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 정치인들이 그 약속을 믿고, 1차 세계대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영국도 이제는 이집트에 독립의 일정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고 해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최소한 일군의 정치인들은 영국의 그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고 행동에 나섰다.
647 1920년 1월 중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원이 소집되고 1920년 1 월 28일에는 하원이 비밀회의를 열어 민족계약의 채택을 의결한 뒤 2월 17일 대중에 그 사실을 공표했다. 프랑스와 영국 정상들이 평회조약의 최종 타결을 위해 유럽에서 회동할 때 오스만 하원은 자신들이 받아들일 최소한의 조약 조건을 임의로 결정한 것이다. 20세기의 정치적 논제가 유럽 주변 대륙들에 대한 유럽 지배의 종식에 있었다면, 오스만 의회의 독립선언이야말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만했다.
672 1917~1918년 앨런비 장군의 점령에 이어 괄레스타인에는 군정이 수립되었다. 그와 더불어 평판 나쁘고 수행하기 힘든 짐을 떠맡은 것에 대한 영국정부의 고난도 함께 시작되었다. 밸푸어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조국을 창설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 당사자들끼리 군정 기간 내내 실랑이를 벌인 탓이다. 앨런비 장군의 정치 고문관이던 길버트 클레이턴과 예루살렘 총독 로널드 스토스는 비공식적으로는 시온주의의 존재를 믿는다는 공언을 해놓고도, 처음부터 그정책을지지한 적이 없는 듯 시치미를 뚝 떼는 행동을 했다. 그러나 시온주의를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이 인정한 시온주의는 가장 좁은 의미의 시온주의였다.
795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역은 이렇게 정치적 재편이 이루어져 튀르크의 지배를 더는 받지 않게 되었다.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라비아 왕자(파이살)가 지배하고 쿠르드족,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유대인 인구가 뒤섞인 신생국가 이라크가 세워졌다. 독립국의 외양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이라크에 접한 시리아와 크게 확대된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팔레스타인도 요르단 강 동안에는 앞으로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신생 아랍국이 수립되고, 요르단 강 서안은 유대민족의 조국이 들어설 때까지 당분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따라서 처칠이 원했던 오스만제국의 재건된 모습과는 상당이 거리가 있는 재편이었다.
823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19세기 영국은 어느 나라도 중동을 침략하지 못하게 수시로 상호협정을 체결하여 유럽 국가들의 갈등이 분출되지 않게 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안정을 기여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안정을 기여하는 데는 협정 체결 못지 않게 협정에 이르기까지 과정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들 간의 제휴, 거기서 싹 튼 다각적 협의와 협력의 습성을 익혀가는 과정에서 세계정치가 세련미를 더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중동문제는 본래 가지고 있던 분열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화합에 기여한 면이 있었다.
823 유럽 국가들의 동맹이 와해되는 조짐을 보인 것은 종전 무렵이었다. 전전에 영국과 국제 협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나라들이 세계정치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도 와해를 부추긴 요인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영국의 이전 동맹국들 一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이 처음으로 충돌하게 된 주요인은 역시 종전 무렵의 중동문제 있었다. 중동정책으로 야기된 불만이 세계 다른 지역의 정책도 동맹국들과 공통의 기반을 조성하여 펴나가려고 한 영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고, 그것이 동맹이 외해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856 유럽인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최소한 100년 전부터 시기상의 문제일 뿐 중동이 언젠가는 열강의 몇몇 나라들에 점령되리라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최대 고민거리도 영토분할 과정에서 행여 자기들끼리 파멸적인자중지란을 벌이게 되는 것이었다.
857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 원정을 실시한 이래 줄곧 세계정치의 난제로 남아 잠재적 폭발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성가신 중동문제는 이렇게 1922년 무렵에 성립된 전후의 협약들로 무난히 해결되었다. 러시아가 중동에서 정치적 국경을 정하는, 그간 미결로 남아 있던 문제도 터키에서 이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수십 년간 고수한 노선에 따른 정략으로 러시아와 서방 모두로부터 교묘하게 독립을 유지한 나라들)으로 이어지는 나라들의 북쪽 방면을 경계로 삼기로 히여 1922년 무렵 해결되었다. 나폴레옹 시대부터 세계정치에 계속 존재해 온 또 다른 문제, 오스만제국의 처리도 술탄 체제가 종식되고 오스만령 중동이 터키, 프랑스, 영국 사이에 분할되는 것으로 1922년 해결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1922년의 중동문제 타결이다.
858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가 종식되고 터키 민족국가(해체된 오스만제국의 터키어권 지역에 한정되었다)가 창설된 것 또한 1922년 11월 1일과 2일 양일 간 진행된 대국민의회 투표에서 만장일치의 표결로 만들어진 결과였으며, 터키의 최종적 국경 역시 1922년 가을 무다니아에서 연합국과 체결한 휴전협정 및 이듬해 세브르 조약을 파기하고 연합국과 새로 체결한 로잔 조약(1923.7.24)으로 얼추 결정되었다.
858 오스만령 중동 지역도,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1922), 트란스요르단이 포함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 (1922)이 되고, 신생국 이라크는 위임통치령이라는 문구만 빠졌을 뿐, 사실상 그와 다를바없이 영국이 지배하는 내용의 영국-이라크 조약으로 정리되었다.
863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전시와 종전 뒤 영국과 연합국은 중동의 구질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숴놓았다. 아랍어권 지역에서의 오스만 체제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시킨 뒤 그 자리에 나라들을 세우고, 지배자들을 임명하며, 국경선을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시스템 비슷한 것을 도입했으나, 그것에 반발하는 현지인들의 저항까지 죄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1914~1922년 사이 영국과 연합국이 취한 조치는 유럽의 중동문제만 종식시켰을 뿐, 중동의 중동문제는 오히려 새로 불거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867 1922년의 타결은 이렇듯 전적으로나 대체적으로나,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닌 현재 진행 중인 중동의 전쟁, 분쟁, 정치의 중심에 놓여 있다. 베이루트의 황폐한 거리, 유속이 느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변, 성서에도 자주 언급되는 요르단 강변에서는 지금도 키치너,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이 만들어놓은 문제들 때문에 해마다 무력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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