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건: 동양철학에 관한 분석적 비판


동양철학에 관한 분석적 비판 - 10점
김영건 지음/라티오


1장 맹자의 성선설

2장 도덕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3장 심외무물(心外無物), 심외무리(心外無理), 심외무사(心外無事)

4장 언어와 도

5장 노자의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장자의 내재적 실재론

6장 동양철학과 글쓰기

7장 노장의 사유 문법과 철학적 분석

8장 유가의 현대화와 지성 주체

9장 모종삼의 도덕적 형이상학과 칸트

10장 모종삼의 '지적 직관'과 칸트의 심미성

11장 유(類)의 자연성과 규약성

12장 보편철학과 한국 성리학




1장 맹자의 성선설

32 도덕의 문제가 바로 실천적 영역에서 성립하는 문제라면 그 실천이 유지되기 위해서 맹자가 생각한 것처럼 반드시 성선설이 요구되는 것인가? 본성적으로 착한 존재이거나 악한 존재이거나에 상관없이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바로 여기에서 지금 도덕적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이 조건 속에 과연 인간의 선한 본성이 논리적으로 포함되는가? 포함된다고 느낄수록 바로 현대의 다양한 경험과학들이 보여주는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에 대해서 불만과 비판의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주장 자체도 바로 과학이 우리 인간에게 가하는 횡포가 된다. 자연과학이 조심스레 추정하는 그 어떠한 사실이나 가설도 이미 인정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미 성선설이 진리이기 때문이고, 그 진리를 부정하면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 영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좋은 동기에서 시작한 성선설의 옹호가 그 동기와 다르게 그것과 대립되는 다양한 주장들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독단적 모습을 여기에서 취하기 시작한다.


33 우리는 왜 성선설로 상징되는 그런 가치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가? 공허하지만 매우 중요한 답변 즉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 어떤 답변이 이 물음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가? 우리의 지성적 한계는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실존적 선택을 요구한다. 비록 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나는 내 행동을 통해 기꺼이 인간의 선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비록 불편하고 고통스럽기조차 하며, 어떤 때는 비 합리적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지 언정. 나는 내 행위를 통해서 나의 선함을 기꺼이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다움을 내 행동을 통해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장 도덕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

41 이러한 윤사순의 설명에 의하면 사단은 인간 본성의 '이성적' 특성을 드러내는 단서로서 정이다. 반면에 칠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현대 한국어를 통해 생각하는 상식적 차원에서 보면, 정은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칠정으로 대표되는 그러한 감정을 지닌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러한 칠정과는 구분되는 '사단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다. 아마 이런 방식으로 사단과 칠정을 이해하는 경우, 감정이라는 동일한 범주로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단과 칠정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또 만약 구분된다면 그것들의 구분이 종류의 차이인지 아니면 단지 정도의 차이인지가 문제될 것이다.


45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퇴계는 바로 인간의 이성적 마음 즉 도덕적 마음과, 감성적 마음 즉 감정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사단칠정론의 문제는 동일한 범주에 속한 두 가지 종류의 감정을 구분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마음과 감성적 마음을 구분하고, 그 구분의 근거 및 원천을 규명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55 우리의 자연적 마음을 적절하게 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적 모습이며, 도덕도 여기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기대승의 입장은 분명히 주자학적 논의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자연적 마음 혹은 감정을 기초로 해서 어떻게 도덕을 해명할 수 있는지 혹은 도덕적 감정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제시해 준다.


3장 심외무물(心外無物), 심외무리(心外無理), 심외무사(心外無事)

74 정인재에 의하면 "마음 밖에 어떤 것도 없다'는 주장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음에 의존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 밖에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따라서 왕양명의 주장은 "우리 마음 밖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우리 의식 활동의 대상이 되며, 의식 활동의 대상이 될 때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이다. 분명히 정인재가 주장하듯이 내가 꽃을 보지 않는 경우에도 존재하는 꽃이 고요하게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왕양명이 주장하는 심외무물의 명제는 마음밖에 실재하는 사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75 최재목에 의하면 왕양명은 바위틈에 있는 꽃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그 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꽃이 이미 거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왕양명의 주장은 내가 경험하지 않는 꽃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과 인식의 대상은 내 주체적 상호 관계성에서 존재한디는 것이다. 따라서 내 주체적 상호 관계성 밖에 경험과 인식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인재나 최재목에 의하면, 심외무물의 명제, 즉 "마음 밖의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사물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명제가 부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인재에 의하면 이 명제가 부정하는 것은 사물의 존재 의미아다.


82 정인재에 의하면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고 왕양명이 주장할 때. 그 사물은 바로 일 혹은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외적 대상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삶 속에 연관되어 일어난 일"이다. 나아가 이 경우 내 마음이나 우리의 마음은 바로 삶의 세계가 된다. 따라서 심외무물의 명제는"우리의 삶의 세계 밖에 그 어떠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물의 의미, 사물의 이치, 사물의 질서도 모두 우리 삶의 세계에 의존한다. 따라서 사건, 사물의 의미, 질서, 이치를 구성하는 것은 순수 자아의 선험적 주관이 아니라 바로 삶의 세계이다.


95 내가 하는 인간적 행위는 내 주체적 마음에 의존하고 있지만 내가 하는 진정한 인간적 행위 혹은 도덕적 행위는 내 진정한 주체적 마음, 사물과 일체가 되는 사랑하는 마음에 반드시 의존해야만 한다. 나아가 내 진정한 주체적 마음, 즉 사물과 일체가 되어 사랑하는 마음은 내가 실제로 하는 도덕적이며 인간적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4장 언어와 도

107 빅이문의 주장과 유사하게 송항룡은 도를 언어와 사유 이전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성의 세계로서 이해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송항룡은 이러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언어와 사유가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와 사고 기능은 언제나 기존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정한 규칙이란 동일 반복불변과 보편일치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에 따라 체계화되는 방법론을 찾아 들어가는 직업 수행이 언어와 이성이 가지는 기능이다. 이러한 작업수행 속에서는 실질적인 사실과 직접 마주설 수 없다는 것이 노장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실은 언어와 구분되며, 언어는 변화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실을 언제나 고착시키기 마련이다.


109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와 세계 사이에 완벽한 대응성이 확립된다면, 대상, 실체, 논리적 형식 등의 의미론적 개념은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무엇에 대응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결국 무의미한 개념에 불과하게 되고, 따라서 말할 수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즉 대상언어에 대한 메타언어는 결국 말할 수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고통스럽게 내놓은 《논리철학논고》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115 표상적 사유에서 보자면 하나의 무의미한 침묵의 언어일 수 있지만, 비표상적 사유 즉 시적 사유 속에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분명하고 구체적인 언어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만약 노자나 장자가 이러한 주장조차 부정한다면 그들의 실제적인 철학적 작업은 단지 자기파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119 차별과 구분의 원리가 우리 삶에 대해서 함축하는 부정적인 효과는 무엇인가? 분별적 지식과 차별적 지식은 결국 내 것과 네 것을 구분짓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극대 화시킨다고 노자나 장자, 나아가 불교는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는 세계는 이들에 의하면 필연적으로 갈등과 투쟁을 불러 일으키고, 이것으로부터 인간에 게 불안과 고통을 안겨준다. 바로 이 점에서 노자와 장자, 그리고 불교는 일종의 전체론적이며 유기체적인 사유 양식을 대안으로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121 만약 노자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도'가 이런 도덕적 함축을 지닌 것이라면 이것은 적어도 이론적 토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구체적 실천과 수행의 문제이다. 따라서 "도를 도라고 말하면 진정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언급은 하나의 인식론적이며 언어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이며 실천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어적이며 이론적이고 논리적 문맥에서 도에 대해 떠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내 행위와 삶 속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보기를 권유하는 그런 도덕적·실천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말로 떠드는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내 온몸을 통해 드러나는 실천적 도덕 또는 삶의 문제는 아니겠는가? 


5장 노자의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장자의 내재적 실재론

151 장자에 의하면 우리 판단의 진리성이 아니라, "판단이 우리 관점에 상대적이다. 진리는 그러한 관점에 상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 그 어느 것도 진리가 될 수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장자가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은 관점주의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리우의 이러한 지적은 장자의 진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156 항상된 이치, 즉 도를 파악하는 것 자연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칙을 체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명(明)이다. 그것은 분별과 구분의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지식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세계의 진상과 전체성을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러한 명지를 강조하는 점에서 노자와 장자는 아무런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장자는 노자와 다르게 지식, 판단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분명히 장자는 일상적 의미에서 진리나 지식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57 분명한 것은 장자 자신은 심제와 좌망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리우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관점으로부터 초월적인 진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장자는 단순히 판단과 관점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상대주의자나 회의주의자가 아니다.


8장 유가의 현대화와 지성 주체

236 채인후의 해명에 의하면 덕성 주체란 바로 도덕심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사물과 감응하고 감통하여 천지만물과 일체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덕성 주체의 도덕심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분법의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에 지성 주체란 사물의 실상을 꼼꼼히 알고자 욕구하는 인식심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기나 중국철학의 일반적 전통에서는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에 근거한 인식심, 장자가 성심 혹은 성견이라고 불렀던 그런 생각에 비판적인데 반하여 채인후는 오히려 유가의 현대화의 문맥 속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채인후는 이 인식심이 바로 덕성 주체의 도덕심으로부터 근거 지워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247 내가 다른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고 그들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일종의 실존적 선택처럼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충서의 도를 실행하는 것은 나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유가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공자가 주장하는 충서의 도를 바로 내 자신이 도덕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 받아들인다. 이것은 바로 도덕적 삶을 위하여 다른 어떤 삶을 포기하겠다는 일종의 실존적 선택이다. 그러나 유가철학은 이러한 실존적 선택을 바로 인간의 내재적 본성 안에 위치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도덕적 존재라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에게 엄격하게 주어진 것이다.


264 내가 도덕적 행위를 한다면 바로 내가 자유의지적 존재임을 행동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유존재라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실천적으로 입증된다. 실제로 내가 도덕적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의 사실이 바로 내가 자유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비록 의지의 자유와 자율이 도덕적 행동이 가능하기 위한 선제조건 혹은 가정이라고 해도, 이것이 모종삼이 주장하는 것처럼 도덕을 공허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칸트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 그 이상을 주장하는 것에 공허한사변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다.


280 생물학의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사유 중에 하나는, 인간의 본성은 철저하게 이기적이며, 이타적인 양상조차도 결국 우리의 생존에 유용하기 때문에 채택하는 전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우주는 비록 우연적인 조건에 많이 의존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과적 질서에 따라 작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음을 분석하는 많은 심리학자 또는 심리철학자들은 실천적 깨달음속에서 우리가 직접 대면하는 양지(良知)의 개념 없이 우리의 마음과 행위를 분석한다. 비록 우리가 도덕적 존재라고 해도, 이러한 시도와 주장들이 도덕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그릇된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 형이상학의 독단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칸트의 도덕철학은 독단적 형이상학에 의존하지 않는 이성적 존재자의 도덕성을 보여주고 있다.


10장 모종삼의 '지적 직관'과 칸트의 심미성

291 모종삼은 칸트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무한한 마음과 지적 직관을 주장한다. 무한심의 지적 직관은 칸트가 알 수 없다고 주장한 물자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물자체는 단순히 현상적 대상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아니라 바로 도덕적 가치이다. 따라서 무한심의 지적 직관은 존재하는 도덕적 가치를 파악한다.


297 이 구절은 《판단력비판》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이 구절을 통해 칸트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장을 하고 있다. (i) 자연의 합목적성의 개념은 통제적 원리로 사용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모종삼이나 중국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이 그 자체 가치를 담지하고 있는 도덕적 자연이거나, 동시에 생명이 가득 찬 유기체적 자연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이념은 우리의 판단력에서만 발견될 수 있고, 또 이 이념은 단지 우리의 판단력과의 연관에 있어서만 자연에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98 왜 우리는 자연 도덕적 가치를 직관할 수 없는가?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이성 개념의, 다시 말해서 이념의 객관적 실재성을 명시할 것을 그것도 이념의 이론적 인식을 위하여 명시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념에 적합한 직관은 절대로 주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310 내가 이념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숭고함을 주는 동시에 나 스스로에게 존경감을 마련해 주는 계기이다. 바로 도덕적 실천은 이러한 감정과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도야와 훈육의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이해는 주어진 어떤 실질적 진리, 형이상학적 진리를 지적 직관이나 무한심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행위는 우리가 그렇게 간주하는 제안을 통해 그에 따라 보편적으로 상상하고 느끼는 행위를 근거로 한다. 마치 세계가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우리가 간주하듯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마치 형제인 것처럼 우리는 간주한다.


11장 유(類)의 자연성과 규약성

320 고대 중국인의 언어관, 세계관의 이면에는 중국의 독특한 '분류' 이론이 개입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 유란 구분하고 차별하는 작용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런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구분, 차별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언어관과 실재관을 탐구하는 데 있어 이러한 유 개념이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언어가 바로 차별과 구분의 체계이며, 실재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실재에 대한 차별과 구분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봤을 때, 중국의 구성주의적 · 규약주의적 언어관과 실재관은 바로 유개념의 구성적 · 규약적 특성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 있다.


335 인간의 목적과 의도는 바로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전체로서의 자연 혹은 본체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중국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언어와 유의 근거가 바로 실천적이며 도덕적 당위로 이해되지만, 동시에 언어와 유 이론을 통해서는 그 도덕적 의미의 자연과 본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도덕적 의미의 자연과 본체가 언어와 운재 대한 선행 조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노자와 장자는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와 개념에 근거한 차별과 분류, 그리고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자의적이고 규약적인 인간의 의도와 목적은 오히려 진정한 인간의 의도와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세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인위성을 제거할 때 진정한 인간의 자연성이 드러난다고 믿은 것처럼 보인다.


12장 보편철학과 한국 성리학

341 이퇴계나 이율곡이 자리하고 있는 조선 성리학에서 정통이라는 개념은 막강한 위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정치적 상황에서 성리학이 하나의 통치 이념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의존하지만, 성리학이나 이퇴계, 이율곡의 철학적 사유에서도 이 정통의 개념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에서 정통은 이단을 배척하고 배제할 뿐만 아니라, 자기 사유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그 절대적 진리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퇴계와 이율곡에 있어서 이러한 정당성은 바로 주자학에 대한 이해에서 마련되고 있다.


358 리기가 서로 섞일 수 없다, 즉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론적·개념적·의미론적 차원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리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주장은 실재적·사실적·존재적 치원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과 칠정을 각기 리와 기로서 해명하는 경우, 이미 나타난 작용으로서 사단과 칠정에는 리와 기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퇴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단은 리의 발이요, 칠정은 기의 발이라고 주장할 수 없고, 오히려 사단과 칠정 모두 기의 발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을 포함하여 그 모든 작용은 기의 작용을 떠나서 고려될 수 없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에 대한 논증을 리기론의 맥락 안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도덕적 이성의 본성이나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정당화하는 철학적인 일반 문제로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362 정약용이 지적한 것처럼 이퇴계나 이율곡이 사용하는 리와 기라는 용어가 서로 같은 용어이지만, 그 개념이 다르다면 분명히 사단칠정에 대한 이퇴계와 이율곡의 논의는 단지 언어적 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이퇴계에 있어서 리는 도심이고 천리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기는 인심이며, 인욕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단칠정론에서 리와 기는 도덕적 마음과 자연적 마음의 대립을 보여준다. 니아가 이 도덕적 마음이 우리 인간의 본연지성이며, 자연적 감정은 우리 인간의 기질지성이다. 반면에 이율곡에 있어서 리는 형질이 없는 것 비물질적인 것이며, 사물을 사물이게끔 하는 것이다. 반면에 기는 형질이 있는 것 물질적인 것이다.


376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어떤 정통적이며 절대적인 사유가 아니다. 현대철학에 지배적인 상대주의적이며 다원주의적 사유 양태를 거론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지성적 유한성을 지닌 채 근원적인 진리를 찾아 헤매는 도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수정 같이 맑은 하늘이 아니라 거친 대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여러 가지 주어진 제약 속에 살고 있다. 그 제약의 하나가 우리의 감성과 무의식에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의 전통적 사유 양


식일 것이다. 한국철학 전공자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전통적 사유 양식속에서 적어도 주자학은 물론이고 이퇴계와 이율곡이 보여주었던 철학적 사유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러한 무의식적 영향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가 바로 우리의 철학적 과제일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어떤 철학적 사유는 때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은 그 이론적 정당화에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철학의 영역은 바로 우리에게 무의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러한 암시적인 혹은 잠재적인 철학적 사유에 대한 정당화와 부당화의 이론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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