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명: 원효 ━ 한국불교철학의 선구적 사상가 / 살림지식총서 327



들어가는 말

원효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원효의 저술

원효철학의 추측적 기원

원효, 깨달음을 얻다

일심 : 한 마음

화쟁 : 어울림

여래장 : 여래가 될 씨앗

열반 : 깨달음

원음 : 두루한 소리

무애 : 걸림 없음

원효철학의 영향과 현대적 의의

나가는 말




6 이듬해인 661년(문무왕 원년) 그의 나이 45세에 의상과 함께 제2차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 당주계 근처에서 땅막과 무덤의 차별이 아뢰야식의 차별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유학의 무의미함을 확인한 뒤 신라로 돌아온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650년(진덕여왕 4년) 원효 나이 34세, 첫 번째 고구려를 통한 당나라 유학 시도 후 바로 같은 해 다시 경유지를 돌려 백제 길로 유학을 가던 중 직산의 굴 무덤에서 깨달음을 크게 얻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후 주로 분황사에 있으면서 불교 대중화를 위한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7 불교사적으로 당시 동아시아는 인도에서 10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와 그에 따라 축적된 불교이론들이 왕실이나 귀족 중심으로 한꺼번에 유입되는 시기였다. 불경이 유입되는 시기와 종류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의존하는 경전이 달라진다. 주로 의존하는 경전에 따라 여러 종파가 생기며, 또 종파에 따른 불교이론상의 차이 때문에 종파들이 갈등하게 되고, 어떻게 그 갈등을 풀고 그 이론상 차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문제가 된다. 그래서 원효는 여러 불경과 각각의 논서들에서, 어긋나 보이는 글들이나 주장들이 어긋나지 않음을 보이고 각각이 다 나름대로 진리를 드러내는 바가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수많은 저술을 하였다.


8 『대승기신론』는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키는 논서라는 뜻으로, 일심ㆍ이문ㆍ삼대ㆍ사신ㆍ오행을 다룬다. 원효는 그 해설서인 『대승기신론별기』와 『기신론해동소』를 지어 그 뜻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하고, 『대승기신론』의 일심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심사상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일심이문, 체상용, 삼대 등 원효의 사상적 기초가 들어 있다. 원효의 『기신론해동소』는 옛날부터 혜원(334~416, 동진의 승려), 현수(643~712, 당나라의 승려)의 소와 함께 3대소의 하나로 꼽혀왔다. 이 책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일도의』와 『일도장』와 『이장장』가 언급되고 있다.


14 신라 화백회의는 원시부족연합국가가 성립하면서, 처음에는 경주 부근의 6촌村 사람들이 모여 이 6부의 단합과 결속을 위해 만든다. 원시부족국가인 사로국에서 왕권 국가인 신라로 되면서, 뒤에는 진골 이상의 귀족이나, 벼슬아치의 모임으로 변하여, 점차 일종의 군신 합동회의, 귀족회의, 또는 백관회의의 성격을 띤다. 화백회의에서 왕위 계승이나 국왕의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그 밖에 불교 수용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이 결정되었다. 화백회의는 한 명의 반대자가 있어도 의안이 통과되지 않는, 전원일치로 성립되는 회의체제다.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자 전원의 의견을 수렴해 결정하는 화백회의의 정신은 후일 고려 시대의 도당회의인 도병마사 회의에서도 볼 수 있다.


16 그는 지난 밤 잠자리가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다. 진리는 당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나라에 굳이 가야하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고대 한국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원효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18 원효는 이문일심 혹은 일심이문을 설명하면서, 일一과 이문 그리고 심 모두가 서로서로 연결되어서 일어나 구분되면서도 독립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개념이라 설명한다. 즉 '서로 여의지 않으면서도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불상리불상잡)'고 설명한다. 원효는 일심이 인연의 측면에서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일체를 포괄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심의 이문 즉 진여문과 생멸문이 해석의 측면에서 모두 각각 일체법을 총섭한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두 문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겹쳐져 있어 서로 여의지 않는 개념이다. "(더럽고 깨끗한) 염정의 모든 법이 그 본성이 둘이 없으니 진망의 이문이 다름이 있을 수 없다.” 마음에 비치는 세상사의 경계 일체를 가장 단순화해서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그런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모두 그 본성이 따로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참되다느니 거짓되다느니 하는 이분법적 경계의 두 문이 다른 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一'이라고 한다. 차별적 세계, 이분법적 세계는 이제 동근원적인 세계로 둘일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에 실한지라 허공과 같지 아니하여 본성이 스스로 신해하기 때문에 심이라 이름한다.” 이 둘이 없는 곳, 차별이 없는 곳, 고요와 침묵만이 있는 곳이 어디에나 두루 펼쳐져 있다. 


20 원효의 화쟁은 다양한 종파 불교가 공존하던 동아시아 불교의 시대적 요청이며, 한반도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의 시대적 요청에 대한 보편적이며 고유한 응답이었다. 화쟁은 바로 '불교의 모든 법문들이 다 이치가 있으며, 다 이치가 있으므로 모두 허락되지 않음이 없고, 허락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지혜다. 또 "뭇 경전의 부분을 통합하여 온갖 흐름의 한 맛으로 돌아가게 하고, 부처 뜻의 지극히 공변됨을 열어 다양한 학파의 다른 주장들을 어울리게 한다.”


22 상관적 차이는 A와 A'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공존이 불가능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같이 동거하는 그런 한 쌍의 모습을 가리킨다.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이 다르지만 같이 동시에 성립하는 이중성의 동거고, 삶과 죽음도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양면성으로 같이 성립하는 상관적 차이다. 그러므로 쟁론의 화합으로서의 화쟁은 쟁론을 지양해서 화합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관적 차이가 서로 하나의 이중적 묶음으로서 존재하는 자연적 무위법의 방식을 지시한 것이겠다.?이런 상관적 차이는 차이가 한 단위로 동거하는 이중성의 사실이요, 법칙이므로 부처님이 설파하신 연기법의 다른 이름이다.


23 여래는 '그렇게 오는' 자의 뜻이다. 여래장은 여래가 될 수 있는 씨앗이다. 여래장을 최초로 논한 『여래장경』는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라고 선언하며, 번뇌에 둘러싸인 중생 중에 여래지ㆍ여래안을 갖춘 여래가 단좌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부증불감경』에서는 중생계와 법계에는 증감이 없으며, 이 양자는 동일한 세계라고 한다. 단지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은 사견을 가지게 되고 생사윤회의 바다에 침몰하고 있다고 하여, 여래장은 밖으로는 번뇌로 가려 있지만 안으로는 여래의 청정법, 상주불변의 법성이라고 한다.


26 원효에 따르면, 열반은 우리 삶에 구체적인 어떤 길을 제시해 주지 않는 것 같지만 열반의 길 아닌 것이 없다. 이 길은 한편 길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지극히 멀기 때문에 가르침만 따라가면 천겁이 지나도 이르지 못한다. 또 한편으론 길 아닌 것이 없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이 없고 지극히 가까워서 말을 잊고 찾으면 바로 스스로 깨닫는다. 한 생각도 지나지 않아 깨우치는 길과 가도 가도 이르지 못하는 이 길은 두 길이 아니다.


26 열반의 길은 드러남과 감춤의 두 길이 맞물려 있지만 모순이 없는 하나의 길이다. 두 길을 나누어 살펴보면 감춤의 측면과 드러남의 측면이 있다. 감춤의 측면은 아주 고요하기 때문에 온갖 모습을 여의고 진제에 합하여 담연하다. 드러남의 측면은 아주 시끄럽기 때문에 온갖 소리가 쉼 없다.


26 열반의 가르침은 '말씀'과 '고요함'이라는 이중성이 있다. 모든 부처님은 고요하고 오묘한 뜻을 증득하고 이에 머물지 않아 응하지 않는 바가 없고 설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말씀이 많다. 열반의 지극한 가르침은 고요함이며 그 고요함을 드러내는 말씀 속에 고요함을 담으면서 모든 것에 응하며 모든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일찍이 고요한 적이 없다'고 하고, 내적으로는 '일찍이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고요함을 담는 열반의 말씀은 이중적이다.


26 언어의 세계는 분별의 세계고 현상의 세계고, 고요함의 세계는 분별이 없는 세계고 본질의 세계다. 한 마음이 움직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멸문'에 서면 모든 말들이 생겨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가 사라진다. 또 이 한 마음의 움직임은 늘 그러한 문이 있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진여문'과 짝한다. 열반의 오묘한 뜻은 언어의 세계와 고요함의 세계를 원융하여 둘이 없는 참 성품이며 진ㆍ망이 혼융한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자기 내면의 눈이 기울지 않아 괴로움을 만들지 않게 되므로 이제 대상이 되는 바깥의 사물들과 사람들에 대해서도 기울지 않아 평등한 눈을 갖게 된다.


28 원효는 "원음이 곧 일음”이라 한다.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둥근 소리가 어떻게 하나의 소리가 되는가? 모든 중생들이 자신들의 부름에 따라 울려 나와 듣는 그 메아리는 자신 소리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 각각의 메아리들은 하나의 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각각의 메아리들을 하나의 소리로 알아듣고 다른 소리는 듣지 않고 혼란 없이 각각 하나씩 알아듣기에 이런 특징으로 일음이라 한다. 그래서 중생의 측면에서, 부처님의 측면에서 각각 일음이라 풀이하고 이해하고 있으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부처님의 측면에서 하나의 소리는 소리 없음으로써 하나의 소리이고, 중생의 측면에서 하나의 소리는 모든 중생들이 각각 알아듣는, 그러나 모든 소리들이 섞이거나 어지럽지 않게 하나로 알아듣는 일음이다. 원효의 설명은 중생의 측면에서도 부처님의 측면에서도 일음이라 하지만, 이 두 소리가 어떻게 하나의 소리인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34 화쟁사상의 궁극 목적은 일승불교의 구현에 있다고 본다. 그 일승불교의 이념이 바로 통불교다. 이 통불교의 이론체계가 곧 화쟁사상이다. 보조 지눌(1158~1210)의 정혜쌍수, 청허당 서산(1520~ 1604)의 선교일치, 유ㆍ불ㆍ도 삼교 통합론 등은 원효의 일심과 화쟁을 그 시대정신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또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1446, 세종28) 동기나 소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제자 원리도 그 지혜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34  이 화쟁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적용해 말하면, 총화통일의 사상이요, 평등 평화 건설의 원리면서, 남북 공존의 원리다. 원효의 화쟁해석학에서는 유물론과 유심론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이 진여법성으로 평등일여다. 오온과 육대가 인연 따라 중생과 국토, 정신계, 물질계에 구현된 것이듯이 남북의 분단 상황도 인연 따라 구현된 것이다. 본래 이원이 아닌데 정치ㆍ경제적인 면에서 20세기를 이원의 세계로 구분하여 20세기에는 민주주의ㆍ사회주의로, 혹은 자본주의ㆍ공산주의로 두 이념의 세계로 갈라놓았다. 그러므로 화쟁사상을 좀 더 현대적으로 풀면, 물질과 정신이 하나이며, 보편과 특수가 둘이 아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다르지만 그 속에 함께 속해 하나로 꿰뚫고 모아지는 바가 있으므로 모두 조화를 이루며 각자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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