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 인도 불교사 ━ 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 살림지식총서 309


인도 불교사 - 10점
김미숙 지음/살림


불교의 고향, 인도

가우타마 붓다의 생애

붓다의 진리

붓다의 제자들

경전의 결집

불승의 시대

대승의 시대

금강승의 시대

불교의 쇠퇴

불교의 부흥




3 요가는 슈라마나 전통의 핵심적인 수행 방법이다. 슈라마나 전통이란 인도의 문화적 갈래 중 하나로서 가장 오래된 문화와 사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인도 문화의 역사를 크게 이분해 볼 때, 슈라마나 전통은 인더스 문명의 토착 원주민에 그 뿌리를 두고 계승된 문화를 가리키는 반면에, 브라마나 전통은 아리얀족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말한다. 불교는 자이나교와 더불어서 슈라마나 전통에 속하며, 힌두교는 브라마나 전통을 이어 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두 전통은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4 브라마나 전통의 주역은 아리얀족이다. 그들이 인더스 강 유역을 지배하기 전까지 그 지역에 살던 토착 원주민은 드라비다족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4 아리얀족들은 최초에 펀잡 지방에 머물다가 기원전 1000년경부터 서서히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였고, 그들의 생활 방식도 차츰 유목에서 농경으로 변모하였다. 일반적인 민족적 특색을 구분하여 말하자면, 먼저 드라비다족은 짙은 흑색의 피부와 곱슬머리, 낮은 코가 특징적이다. 그에 비해서 아리얀족은 밝은 색의 피부와 직모, 높은 코, 큰 키 등이 평균적인 특징으로 열거된다. 현재 인도의 종족 분포로 볼 때, 서부 인도에 순수 아리얀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은 드라비다족과 아리얀족이 혼혈된 종족이 분포하고 있다.


5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종래의 사회적 계층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브라만교에 따른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도 점차로 약화되었다. 그와 더불어서 많은 자유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이 그 중심적 활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신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하는 브라만교에 대립되는 사상을 설파하면서 곳곳을 떠돌아 다녔으며 삭발과 걸식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들이 바로 슈라마나라 불리는 수행자들이다. 그들은 차츰 집단을 이루어 생활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그 집단을 상가, 즉 승가라고 불렀다.


10 붓다는 슬퍼하는 아난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아난다여, 너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진리를 너의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입멸하는 순간까지 붓다는 거듭 당부하여 말하였다. “모든 것은 덧없다. 쉬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붓다의 유훈이었다. 가우타마 붓다. 그는 진리의 길을 찾아 헤매었고, 그 길을 깨달았으며, 그 길을 가르치다가, 길 위에서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80년의 생애 동안 강조했던 붓다의 가르침, 그 요체는 매우 간결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므로 공한 것이다.” 붓다가 깨달은 이 진리는 고대 인도인들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가슴에도 생생하게 전해져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는 최상의 지혜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6 승가라고 음역되는 상가는 남녀 슈라마나들이 한데 모여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간단히 말하자면, 남녀 출가자들의 집단을 뜻한다. 붓다에게 귀의한 출가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데 모여서 수행하였고 사람들은 그들을 ‘붓다 상가’라고 불렀다. 붓다 상가란 또 다른 슈라마나 교단, 즉 자이나교의 지나 상가와 구분하여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불교 교단은 붓다 당대에 이미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빠른 성장의 이면에 견인차 역할을 했던 요소가 있다. 바로 포교이다. 붓다는 야사를 따라서 그의 친구들 54명이 줄을 이어 출가한 뒤 그들 모두가 아르하트가 되었던 시점, 즉 붓다 스스로 이 세상에는 모두 61명의 아르하트가 있다고 선포한 직후에 제자들에게 전도를 명하였다. 61명의 아르하트란 붓다 자신을 포함하여 5비구와 야사, 54명의 야사 친구들을 모두 합한 수이다.


19 “나는 이렇게 들었다.” 이와 같은 서두로 붓다의 제자들은 불교의 진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본래 붓다는 모든 가르침을 구술로만 전달했다. 그의 전 생애 동안 자신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설법을 들었던 수많은 제자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소망의 결과가 바로 경전으로 모아져 전해지고 있다. 그 과정을 경전의 결집이라 한다.


19 결집은 산스크리트 어 상기티를 번역한 말이며, 합송, 합주, 집회라고도 한다. 어원상으로는,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각자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일제히 입을 모아 읊어 냄으로써 전혀 이의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여 불설이라는 것을 확정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뜻에서 ‘성전의 편집’을 의미하는 동시에 ‘경전의 편찬을 위한 집회’가 곧 결집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한 결집을 통해서 편찬된 경전은 큰 바구니에 담아서 보관하던 관습에 따라 세 종류의 바구니, 삼장이라 부른다. 즉 경장, 율장, 논장을 합해서 삼장이라 하는데, 이러한 형식으로 불교 경전이 완성되기까지는 기나긴 세월이 걸렸다.


19 가장 최초의 결집은 붓다의 열반 직후에 이루어졌다. 붓다가 입멸한 뒤, 교단 내에서는 몇 가지 우려들이 제기되었다. 즉 붓다의 가르침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소멸되어 간다든지 잘못 전해진다든지, 혹은 해석상의 이론이 제기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등의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각기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을 거친 뒤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모임, 즉 결집을 단행했다. 결집을 통해서 붓다가 없는 채로 구심점을 잃어가던 불교 교단은 붓다가 남겼던 유훈과도 같이 오로지 ‘진리’에만 의지하는 상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제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그래서 500결집, 또는 500집법이라고도 부른다. 


21 불법을 널리 펴던 아쇼카 왕이 즉위 17년째 되던 해,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에서 목갈리풋타팃사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를 가리켜 1000인 결집, 또는 화씨성 결집, 1000인 집법 등으로 부른다.


21 제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 정통 교의를 전하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삼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27 대승 불교란 일반적으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발흥한 새로운 불교 운동을 가리킨다. 대승 경전을 신봉하고 그 교의에 따라 실천하는 불교 수행의 한 체계로서, 현재 남방 불교권을 제외한 중국, 우리나라, 일본 등의 한역 문화권과 티베트계 문화권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대승 불교의 발원과 시기, 그 직접적인 동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료한 정설이 없다. 수많은 설명 중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한 것은 없다.


28 대승의 불신론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붓다, 즉 법신과 중생 제도를 위한 붓다의 시현, 즉 색신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에 수많은 붓다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특히 삼신불이라 하여 불신을 3종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내용은 경우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써 설명된다.


30 굽타 왕조는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고 사회 질서의 토대가 되는 브라만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에 따라 브라만교, 즉 힌두교는 급속히 세력을 펼쳐 갔으며, 동시에 불교의 사회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불교 교단에서 중관, 유식 학파와 불교 논리 학파 등의 학문적 성과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미 힌두교가 중심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힌두교의 지배적 위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대승 불교 교단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대승을 따르던 재가자들도 인도 일반의 민간 신앙과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다라니와 무드라, 만다라 등을 신앙 방식으로 채용하여 여러 의식을 통해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 불교의 또 다른 발전 양상, 즉 금강승 불교를 성립시키기에 이른다. 인도 불교가 국경을 넘어서 드넓게 포교되었던 것과 반비례하여 인도 내에서는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내용면에서도 변용될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 대해서 갖가지 요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첫째로 꼽는 이유는 대승의 교의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보살 수행보다는 불법에 대한 논의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재가자 중심에서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또한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사실상 민중의 생활과 괴리되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인도 국경을 넘어 전파된 대승의 교의는 각 나라의 사상과 결합하여 발전적 수용을 가져왔으나, 정작 인도에서는 소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승 또한 쇠멸의 길로 접어들고야 말았다.


31 마우리야 왕조 때 아쇼카 왕의 두터운 보호를 받고 성장하기 시작했던 불교 교단은 인도 내외로 크게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의 토착적인 민속 전통과 힌두교 등과 혼합되어 새로운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금강승 불교이다.


31 마우리야 왕조에 버금가는 통일 국가를 이루었던 굽타 왕조 때부터 지배층의 종교로서 확고하게 자리 매김한 힌두교는 사회 전반의 기본 질서로 그 골격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8세기 중엽에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하여 번성했던 팔라 왕조의 여러 왕들은 특히 불교를 보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시 동인도와 벵갈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융성했던 불교는 기존의 대승 불교와는 차별화된 교의 내용으로 보다 더 힌두교에 근접한 탄트라 불교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와 같이 힌두교와 습합된 탄트라 불교를 대승과 구별하여 금강승이라 한다.


31 첫째, 교주인 가우타마 붓다의 역사적 실체가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부파 시대와 대승 불교를 거치면서 성립된 다불 사상, 삼신불 사상 등은 가우타마 붓다를 역사적인 인물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불보살들의 등장함으로써 인도 전래의 다양한 신들에게 접근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급기야 힌두교의 만신전 속으로 가우타마 붓다가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힌두교의 비슈누 파에서 발달한 화신 사상 중에서 10대 비슈누 화신들 중 아홉 번째 화신이 붓다라는 사실이 그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32 이와 같은 복합적인 배경과 시대적인 영향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금강승에서는 ‘여래의 비밀스런 힘’이 밀교로서 드러난 것이라고 강조하였고, 그들의 경전을 일반적인 ‘수트라’가 아닌 ‘탄트라’라는 이름으로 구별하여 부르게 되었다 탄트라(tantra)는 ‘규정하다, 집행하다, 유지하다, 부양하다’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 어 ‘탄트리’에서 파생된 말로서, ‘의식, 의례, 원칙, 밀교, 자손, 가족, 의류, 주문, 약, 통치 방법, 군대’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 용례에 따르면, 수트라가 직물을 짤 때의 세로 방향의 실, 즉 날실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탄트라는 가로 방향의 실, 즉 씨실을 가리킨다. 베틀에서 날실의 너비인 폭이 고정되어 있고 씨실을 넣음에 따라 천의 길이가 늘어나듯이, 수트라는 불변의 고정 상태를 뜻하고 탄트라는 유동적인 변화 가능성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뜻은 수트라와 탄트라의 문헌적 의미 해석에도 적용할 수 있다. 수트라는 고정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는 반면에, 탄트라는 구체적인 의례와 의식 등 지나치게 다양한 내용으로 인해서 잡다할 만큼 비체계적으로 확장되어 있는 문헌들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나 자이나교 등에서도 밀교적인 색채, 즉 비의적이고 의례적인 경향이 강한 교의가 담겨 있는 문헌을 가리켜 탄트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35 7세기 즈음은 힌두 교단에 새로운 기풍이 거세지고, 불교는 점차 그 영향을 받아 탄트라적 경향이 짙어져만 가던 시기이다. 게다가 힌두교에서 전무후무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철학자 샹카라의 등장은 힌두교의 융성에 기폭제로 작용한 동시에, 불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도 전역에서 불교 교단은 쇠약해지고 점차 그 세력은 미미해진 가운데 이슬람 세력의 진입을 대응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인 외호가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교단의 결집력도 느슨해진 상태였다.


37 초기 불교가 브라만교 또는 힌두교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제사 의식을 철저히 거부했다는 점이다. 붓다는 전법의 초기부터 해탈을 성취하는 데 어떠한 의식이나 제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은 불승 시대까지만 해도 교단 내부에서 행해지는 최소한의 의식 외에 특별한 제의를 행하지 않음으로써 잘 지켜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승을 거쳐서 금강승에 이르면서 불교에서도 의식은 매우 중시되었고, 힌두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양상을 띠고 말았다. 또한 초기 불교에서 부정되었던 유신론적 신앙에 점차 영향을 받아 각종 신격들이 불교 신앙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구나 대승의 보살 신앙과 다불 사상은 자력 신앙을 중시하던 불교를 타력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붓다가 최후까지 오로지 강조했던 것은 각자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자신을 구원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구세주였던 붓다는, 세월의 변용을 거치면서 붓다 그 자신만이 중생을 구원해 주는 궁극적인 최상의 구원자로 등극하고 말았다.


38 불교 학파 간의 치열한 논쟁은 사상적 발전 측면보다는 그 수명을 단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말았다. 단적으로, 논장에 포함된 문헌의 특징은 자파를 제외한 다른 학파를 논파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초기 경장에서는 교단 밖의 외도를 겨냥하는 논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과 대비된다. 더 나아가서 교단 내 학파 간의 논쟁은 불교도와 외도 간의 논쟁보다 훨씬 더 신랄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일단 분열을 시작한 교단은 갈수록 구심력을 잃고 조직이 느슨해져서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결국 이러한 분열은 교단이 쇠약해지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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