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경: 실체의 연구 ━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3. 16.
실체의 연구 - 한자경 지음/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지은이의 말
서론: 형이상학의 근본물음
제1부 고대의 실체론
제1장 플라톤: 보편적 이데아와 개별적 실체에의 물음
제2장 아리스토텔레스: 개별적 실체와 순수 이성(신)
제3장 플로티노스: 개별적 실체 너머의 일자(一者)
제2부 중세의 실체론
제4장 아우구스티누스: 무로부터의 창조
제5장 아퀴나스: 개별자의 실체성
제6장 에크하르트: 개별자의 비실체성
제3부 근대의 실체론
제7장 데카르트: 합리주의적 실체 이원론
제8장 로크: 경험주의적 실체 이원론
제9장 라이프니츠: 실체 이원론의 극복
제10장 흄: 실체의 부정
제11장 칸트: 범주로서의 실체(현상)와 그 너머의 무제약자
제4부 현대(탈근대)의 실체론
제12장 니체: 의지의 형이상학
제13장 비트겐슈타인: 언어적 전회
제14장 들뢰즈: 차이와 생성의 철학
지은이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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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고대의 실체론
36 '무엇이 궁극적 실재인가?' '현상세계의 궁극의 바탕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이 세상을 실아가는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물음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물이나 불 둥 자연물을 제시하기도 하고 수(數)와 같은 추상적 관념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이에 답하는 체계적인 철학적 저술을 남긴 첫 철학자는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B.C.427 ~ B.C.347)은 궁극적 존재를 가시적인 현상계 너머 비가시적인 이데아계에서 찾았다. 가시적인 현상계에 속하는 우주만물은 시간 안에서 생겨났다.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는 무상한 것들이지만, 비가시적 이데아는 생성 소멸과 변화를 넘어선 것으로서 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현상계는 감각의 대상이고, 이데아계는 이성적 사유의 대상이다. 이로써 플라톤은 감성보다는 이성, 경험보다는 사유, 신체보다는 정신을 우선시하는 이원론을 확립한다. 그렇게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이원론을 확립한 후 플라톤은 다시 이 둘을 매개할 제3의 류(類)'의 존재를 논한다. 현상 사물의 속성이 이데아의 수용을 통해 얻어진 규정이라면, 그렇게 이데아를 수용하는 사물자체는 이데아도 아니고 이데아의 모사도 아닌 제3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데아적 규정의 수용자로서의 사물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바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기체로서의 사물자체, 개별적 실체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B.C.384 ~ B.C.322)는 초기에는 플라톤과 달리 실체를 구체적 개별자라고 논했다. '존재'의 다양한 의미 중에서 가장 기본적 의미는 10가지 범주 중 첫 번째 범주인 '실체'이고, 이 실체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후기로 와서 개별자의 본질을 이루는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논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의 본질을 질료인 기체(신체)로 논하기도 하고 개별자의 형상으로서의 영혼으로 논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폴라톤과 마찬가지로 질료와 형상,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현상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일체 질료가 배제된 순수 형상 내지 순수 이성으로서의 신(神)으로 간주하며 이를 '부동의 동자'로 설명한다.
플라톤은 선(善)의 이데아에서부터 출발해서 개별자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로부터 출발해서 순수 형상인 부동의 동자(신)로 나아가는 차이를 보이지만, 둘 다 궁극적 존재(신)와 개별자 자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하지 못한 채 이원적으로 분리하고 있다. 개별자는 궁극적 존재인 신을 통해 존재하지만 신은 개별자의 외적인 근거이고 외적 초월에 머무르며, 따라서 개별자는 신과는 다른 독립적 자기 실체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궁극적 존재를 개별자의 내적 초월로 간주하여 궁극의 일과 개별자의 다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즉다다즉일'을 확립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현상세계 만물을 궁극의 일자로부터 설명하여 일과 다가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관을 제시한 사람은 폴로티노스(204-270)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이성적 사유의 대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인 신이 순수 사유의 이성이라면, 플로티노스에서 궁극의 존재는 이데아도 아니고 순수 사유의 이성도 아니다. 사유는 사유자(신)와 사유대상(이데아), 이성과 이성대상이 구분되는 이원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는 궁극적 존재를 일체의 이원성을 넘어선 불이(不二)의 하나인 일자로 규정한다. 일자는 일체 존재를 포괄하는 전체이며, 따라서 우주 만물 일체는 그 일자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일자로부터 만물이 형성되는 것을 '유출'이라고 한다. 일자로부터 이성이 유출되고 다시 영혼이 유출되며, 물리적 현상세계 사물은 영혼에 비친 영혼의 그림자이다. 이렇게 플로티노스는 영혼과 물질, 마음과 몸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물질을 영혼의 그림자로 간주한다. 궁극적 존재인 일자는 일체의 내적 근원이고 내적 초월이며, 우주 만물은 이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으로서 일자 이외의 다른 실체성을 갖지 않는다.
제2부 중세의 실체론
126 서양중세철학은 희랍의 철학사상과 히브리의 종교사상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기독교신학으로 발전된 사상이다. 기독교적 인간관과 세계관 등 기독교철학을 체계적으로 확립한 사람은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그는 우주 만물 존재의 유일한 궁극은 오직 단 하나의 신일뿐이라는 것, 태초에는 신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로부터 우주의 존재를 신에 의한 '무(無)로부터의 창조'로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우주 만물은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주 만물은 신으로부터 존재성을 부여받되 그 본질은 허망한 무에 가까운 '근사무(近似無)'인 순수 질료이며, 그것이 각 개별자의 변화의 기반이 된다고 논한다.
서양 중세 기독교대학에서 가르치는 스콜라철학을 집대성한 사람은 토마스아퀴나스(1224~12:14)이다. 그는 일체 우주만물의 궁극은 바로 신이며, 그 신이 단지 사유 속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신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길을 제시한다. 신은 현상세계에서 운동하는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제1원인으로 또는 자연 질서의 궁극 근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신에 의해 창조된 만물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으로서 질료적 기반을 가지는 각각 별개의 실체라고 논한다. 따라서 그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유비로서 논할 때에도 그 각각의 실체성울 전제한 비례성 유비(수학적 유비)를 주장한다.
기독교사상의 확립자인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및 진리의 내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적 색채를 띠고, 기독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스콜라철학자 아퀴나스는 감각경험 대상으로서의 현상세계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색채를 띤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모두 기본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며 신과 인간의 본질적 다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창조자와 피조물, 신과 인간의 이원성, 성과 속, 진제와 속제의 이원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창조자와 피조물, 신과 인간을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 간주하며, 피조물들의 현상세계에 대해서는 다시 형상과 질료의 이원성, 정신과 물질의 이원성을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실체관은 '무한한 산과 '유한한 영헌과 '유한한 물체'라는 특수형이상학의 3각 구도를 형성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이원성을 비판한 사람이 중세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1260~1328)이다. 그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신이 진정으로 우주 만물의 유일한 궁극 근원이고, 따라서 창조 이전에는 신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렇게 절대무가 성립한다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곧 '신으로부터의 창조'와 다르지 않다고 논한다. 따라서 정통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 대신 '신으로부터의 유출'을 주장한다. 즉 우주 만물은 신의 존재가 넘쳐흘러 형성된 것으로서 모든 생명체는 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은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으며, 따라서 소통을 위해 둘을 매개하는 제3의 존재인 예수가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논한다. 그는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신비적 체험을 위한 수행방법으로서 마음을 비우는 무심법(無心法)을 제시한다.
정통 기독교가 존재와 무, 신과 인간, 성과 속을 분리하고 분별하는 이원성의 사유라면, 에크하르트가 보여주는 신비주의는 신과 인간, 성과 속을 불이(不二)로 여기면서 존재의 궁극을 개별자 안에서 발견하는 내적 초월주의의 사유, 불이(不二)의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과 인간, 일과다, 존재의 궁극과 개별적 존재자, 그 둘을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 보지 않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성과 속, 신과 인간을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정통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부정되었다. 서양특유의 이원성의 논리와 달리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불이를 논하면서 그 불이의 근원에 이르는 무심의 수행법까지 함께 논한다는 점에서 동양적 사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제3부 근대의 실체론
194 근대철학자들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중심개념은 관념,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원래 플라톤 철학의 핵심개념인데, 플라톤에서 이데아는 구체적 개별자들 너머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보편적 형상(eidos)으로서, 감각하거나 사유하는 우리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반면 근대철학자들에게 이데아, 즉 관념은 그 존재론적 위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들에게 관념은 감각이나 사유의 마음 활동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표상 내지 심상으로서 오직 우리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주관적인 심적 존재이다.
이처럼 고대와 근대에서는 이데아의 존재론적 위상이 서로 다르며, 이데아를 둘러싼 물음 또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기된다. 플라톤 철학에서 주요 물음은 '우리의 감각대상이 되는 현상세계 사물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 안의 개별적 심적 표상의 근거는 무엇인가?'이며, 이 물음의 답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우리 마음 바깥의 객관적 실재인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현상세계의 존재 및 인식의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반면 근대철학자들은 우리 마음안의 개별적 심적 표상을 관념이라고 부르므로 여기서의 물음은 '이러한 개별적 심적 표상인 관념의 근거는 무엇인가?', '관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등이 된다. 한마디로 고대에는 이데아가 우리 마음 바깥의 객관적인 보편적 실재로 간주된 데 반해, 근대에는 이데아가 우리 마음 안의 주관적인 심리적 표상으로 간주된 것이다.
근대에 들어 관념이 플라톤적인 객관적 이데아에서 인간주관의 심리적 관념 내지 표상으로 바뀌게 된 것은 중세의 추상관념 내지 보편자에 대한 '실재론-유명론' 논쟁이 한몫을 담당한다. 플라톤에서 이데아는 개별적 현상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자이다. 그런데 유명론자들은 그런 보편자는 개별자 바깥에도 안에도 따로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단지 추상적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개별적인 심리적 표상이 보편자로부터가 아니라면 그럼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가? 이것이 바로 '심적 표상인 관념의 근거는 무엇인가?' '관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의 물음이다.
근대철학자 중 합리론자는 관념의 기원을 신적 이성 내지 보편적 정신으로 간주하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영혼에 그런 신적 이성으로부터 부여된 본유 관념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험론자는 관념의 기원을 오직 개별적 대상 사물과의 경험에 두며, 신적 이성이나 본유관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근대철학에서의 본유 관념 논쟁은 우리의 심적 표상인 관념의 근거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서양중세가 신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다면, 근대는 신학과 철학이 둘로 분리된 시기이다. 이것은 곧 무한과 유한, 절대와 상대, 성과 속이 이원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현상세계를 설명할 때 더 이상 초월적 근원 내지 절대의 궁극을 추구하지 않고 일체를 경험적 원리를 갖고 경험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제4부 현대(탈근대)의 실체론
340 현대사상의 주된 흐름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또는 '포스트 구조주의(post-structualism)'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는 앞 사조와의 연관성을 함축하는 '후기'의 의미보다는 단절을 함축하는 '탈'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또한 '해체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존의 의미체계와 가치체계를 해체(deconstruction)한다는 뜻이다. 해체는 구축(construction)의 반대 개념인데, 구축의 또 다른 반대인 파괴(destruction)와는 구분된다. 파괴가 구축물을 완전히 부정하여 그냥 없애 버리는 것이라면, 해체는 구축물의 구조를 분석하고 분해하여 단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파괴는 테러리스트의 전략에, 해체는 무정부주의자의 전략에 비유될 수 있다. 파괴가 외적 붕괴의 시도라면, 해체는 구축물에 잠입하여 내부로부터의 잠식을 꾀하는 내적붕괴의 시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하고자 하는 것, 따라서 그들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분석하며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서양의 근대성인 모더니즘이다. 그리고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서양의 근대성은 바로 그리스로부터 시작되는 서양전통형이상학의 결실이다. 비록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신본(神本)에서 인본(人本)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기본 사고방식에 있어서 절대적 근원과 기준, 절대적 의미와 진리 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의 신체적 욕망이나 감성보다는 보편적 이성이나 합리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점에서 근대는 여전히 고대와 중세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모더니즘의 비판은 곧 서양전통 형이상학의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이성중심주의가 함축하는 동일성의 철학은 자기동일적으로 존재하는 것 만을 실재로 간주하고, 자기동일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바뀌는 것들은 참된 실재가 아닌 가상으로 간주한다. 현상을 실재하는 것의 움직임에 따라 산출되는 외적 모습, 허상, 비진실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기동일성의 강조는 곧 불변하는 것과 가변적인 것,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 실재와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낳는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는 이러한 이분법이 서양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강화되었다는 것이 탈근대철학자들의 주장이다.
실재와 기상, 불변하는 것과 변화하는 것, 동일성과 차이의 이분법은 변화하는 현상 너머 불변의 실재를 상정함으로써 오히려 현상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변하지 않는 이성적인 것만이 실재하는 중심으로 간주되고, 변화하는 현상적인 것들은 주변적인 것, 중요하지 않은 것, 없어도 되는 것, 오히려 없어지고 부정되어야 할 것들로 간주된다. 그렇게 해서 중심 바깥의 주변적인 것들은 경시되고 억압되며 말살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근대성을 비판하는 탈근대는 이성 중심을 비판하면서 탈이성화, 탈중심화, 탈영토화를 꾀한다. 현상의 유동성과 생동성, 다양성과 평등성을 억압하는 중심의 벽을 허물고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한한 발산의 힘, 변화의 생동성, 생명의 에너지를 긍정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특징은 독일과 프랑스를 위시한 대륙에서 뿐 아니라 영미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시자로는 흔히 독일 철학자 니체(1844~1900)가 주목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1788~1860)와 마찬가지로 이 현실을 고통 가득한 세계로 보지만, 그렇다고 생의 의지를 부정하는 소극적이고 허약한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변화하고 사멸하는 것을 예찬하면서 생의 의지를 긍정하는 적극적이고 강한 염세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자기동일적 실체를 고집하는 서양 전통 형이상학의 이성중심주의를 추상적 사유 및 언어의 틀에 매인 언어 형이상학, 표층적 의식에 머무르는 의식형 이상학이라고 비판하며, 의식이나 이성보다 더 심충에서 작용하는 생의 의지를 우리의 삶 나아가 현상세계의 근원으로 설명한다.
우리의 사유뿐 아니라 우리의 지각까지도 언어의 틀 내지 언어의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사람은 영국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그는 초기에는 세계의 존재형식과 우리의 언어형식이 일대일 대응한다는 그림이론을 제시하며, 따라서 구문법의 논리를 따르는 명제만이 의미 있는 명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후기에는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단어의 사용에 있다는 것, 우리의 언어사용을 규정하는 것은 단일한 구문법적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는 삶의 양식이라는 것을 논했다. 그는 한 단어나 한 개념이 지시하는 자기동일적 본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사한 경우들의 다양한 중첩이 있을 뿐이라는 '가족유사성' 개념을 통해 과거 형이상학의 플라톤적 본질주의를 비판한다. 서양철학에서 '언어적 전회'로 불리는 그의 사상은 이후 영미 분석철학에 지대한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적 본질주의의 전복을 꾀하는 또 다른 철학자는 바로 최근까지 활동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1925~1995)이다. 그에 따르면 서양 전통 형이상학은 동일성을 내세워 차이를 배제하고 따라서 차이에 근거한 변화와 생성을 부정하는 본질주의이고 이성주의이며 결국 플라톤주의이다. 그는 플라톤 형이상학을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일성 내지 유사성에 앞선 차이 자체를 일체 현상의 존재 및 인식 근거로 설명하면서 새로운 형이상학, 즉 차이와 생성의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본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리오타르로부터 시작해서 푸코, 데리다, 라캉 등에 이르는 다수의 탈근대철학자들이 활동한 프랑스이다. 들뢰즈의 사상은 프랑스를 넘어 한국에서도 철학과 문학, 문화와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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