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0. 3. 11.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18 - 전세라/웅진지식하우스 |
책머리에 _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1부 현대 철학의 방향을 돌려놓다
1. 천재를 성장시킨 외로움
2. 철학이라는 구도의 길
3. 《논리철학 논고》 거들떠보기
지식 스위치_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직업들
2부 논리철학 논고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입니다
2. 사실은 사태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 스위치_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닮은 점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입니다
지식 스위치_비트겐슈타인이 남긴 책들
4. 사고란 뜻이 있는 명제를 말합니다
지식 스위치_비트겐슈타인, 포퍼와 맞장을 뜨다!
5.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입니다
6. 논리학의 명제들은 사실상 동어반복입니다
지식 스위치?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3부 《논리철학 논고》 다시 보기
1. 《논리철학 논고》를 버리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 스위치_색채 배제의 문제
지식 체인 _ 비트겐슈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들
1부 현대 철학의 방향을 돌려놓다
12 그는 모든 철학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일종의 철학적 '절대반지'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종의 퍼즐 맞추기처럼 이 세계의 조각들이 작은 퍼즐처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히 맞추기만 하면 거대한 세계의 구조를 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즉, 세계의 구조를 퍼즐처럼 정확히 맞추어 알 수 있다면, 모든 퍼즐 조각의 위치를 잡아 주는 하나의 기준 조각이 있을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통찰력을 통해 '언어'가 바로 그런 힘을 갖는 퍼즐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스타일에도 단점이 있습니다. 한번에 모든 철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조각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설령 어떤 해결책을 찾았다 하더라도 이후에 그 해결책으로는 풀지 못하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경우 그가 생각한 철학의 체계를 통째로 바꿔야 합니다. 즉, 어떤 퍼즐 조각을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퍼즐을 다 맞추었는데, 어딘가에 퍼즐 조각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방식대로 하면, 다 맞춰 놓은 퍼즐 판을 흔들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합니다.
15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2. 일어나는 것(사실)은 사태들의 존재 상태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실이다.
4. 사고는 의미를 지닌 명제이다.
5. 명제는 기본적 명제(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기본적 요소 명제는 그 자체의 진리 함수이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태는 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태이다.
7. 그러므로 발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75쪽짜리의 《논리철학 논고》 안에서 정수로 된 번호가 붙은 문장은 위의 일곱 문장이 전부입니다. 그 밖의 나머지 문장, 즉 74쪽 분량의 소수점이 붙은 다른 문장은 위의 일곱 문장에 대한 설명에 해당하는 것이죠. 결국 위 일곱 문장의 구조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논리철학 논고》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부 논리철학 논고
21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말로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 그렇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생각에 한계를 그으려고 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긋기 위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한계를 통해 생각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세계는 대상이 아니라 사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사태가 연합된 것이고, 사태는 대상이 서로 관계를 맺음에 따라 구성됩니다. 따라서 대상은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대상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시간, 공간을 넘어선 곳에서 시간, 공간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사태와의 연관 속에서만 대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25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고 사실들은 사태의 존립, 즉 발생한 원자 사실들의 결합이며,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입니다. 그리고 대상들은 시간과 공간, 색채와 같은 확고한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대상들이 이런 확고한 형식을 갖고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도 역시 확고한 형식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대상들이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과 달리 대상들의 배열은 매우 유동적입니다. 대상들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한 아주 다양하게 배열될 수 있으며, 이런 다양한 배열이 사태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태들 속에서 대상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을 사태의 구조라고 합니다.
32 언어를 통해 알 수 없는 세계는 머릿속으로 그려 볼 수 없는 세계입니다. 둥근 사각형과 같은 비논리적인 것을 떠올려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2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세계와 사고의 구조적 동일성 안에서 파악함으로써 언어와 세계와 사고가 일치 관계를 유지한다고 보았습니다. 사실들은 명제에 대응하는 것이며, 사실들이 사태들로 구성되고 다시 사태들이 대상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명제는 원자 명제들로 구성되고, 원자 명제는 다시 사물을 대표하는 이름들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의 단어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과'라는 단어가 명제 안에서가 아니라 단독으로 사용되면 사과의 의미를 담아 낼 만한 그림을 그려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단어는 사물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명제의 일부일 때만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의미를 지니는 언어의 최소 단위는 단어가 아니라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42 명제는 현실과 비교될 때 비로소 참과 거짓을 결정할 기준을 가지게 됩니다. 즉 명제가 사실과 일치할 때 그 명제는 참이 되고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 거짓이 되는 것이죠.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생각은 기존 철학이 이야기하는 개념이 현실에 대응하는 그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반면, 자연과학은 실재 세계를 설명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주장만을 받아들여 과학적인 명제만 의미 있는 명제이며, 모든 언어는 과학적인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47 명제의 본질은 명제가 갖고 있는 형식 속에 있습니다. 명제가 세계를 그리고 있고, 명제의 본질이 곧 세계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명제의 형식은 또한 세계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의 본질은 그 대상과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사과의 본질은 사과 안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에 사과를 생각하는 순간 이미 파악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명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명제의 형식, 그리고 그 형식을 이루는 언어의 논리는 경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선천적인 방식으로 명제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49 비트겐슈타인은 보이는 것을 보는 그 누군가를 가리켜 자아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자아는 일종의 철학적 자아로서 이 세계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구조 또는 형식을 보기 위해서는 이 세계 안에 있을 수 없고, 이 세계와 형식을 공유하는 언어에 대해서도 그 한계를 넘어 존재하는 그 무엇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철학적 자아는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철학적 자아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영혼도 아니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도 아닙니다. 철학적 자아는 세계 안에 있지도 않고 오히려 세계와 언어의 한계에 맞닿아 있습니다.
51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계의 내적인 관계나 구조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언어의 구조를 다시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려는 순간, 언어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의 구조를 이용하는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논리적 필연성이라는 구조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되는 세계입니다. 논리적 필연성은 세계를 이루는 탄탄한 골격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적 필연성의 구조를 눈으로 확인하거나 만져 볼 수 없습니다. 논리적 필연성이라는 이 세계의 내적인 구조는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볼 때 이미 세계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형식은 그저 우리 앞에 드러나고 깨닫는 것이지 관찰하고 탐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논리학은 세계의 진리를 설명하는 학문이어서는 안 되며, 그야말로 세계를 비추어서 내적 구조를 드러내 줄 수 있는 거울상과 같아야 합니다.
55 이제 정말 중요한 말을 해야 할 순간입니다. 내가 이 책에서 담아 내고 있는 명제와 내용은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해설일 뿐, 이 책에 담긴 명제 그 자체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나의 이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나의 명제들을 넘어 설 수 있다면, 그래서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 그 사다리를 던져 버리듯 나의 이론을 버려야 합니다. 즉,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의 명제들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56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납니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뜻이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같은 이유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도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어야 합니다.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이 세계 너머에 있고, 따라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수수께끼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또한 이 세계에는 사실상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드러나는 아름다움, 선한 느낌,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56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거의 모든 철학적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세계를 초월한 것, 언어를 초월한 것에 관해 말하는 순간, 그것은 무의미한 헛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과 윤리학, 종교, 예술은 말로 할 수는 없고 단지 보여 줄 수 있는 영역에 존재합니다.
3부 《논리철학 논고》 다시 보기
65 언어와 세계가 비트겐슈타인의 도식화처럼 정확하게 대응 관계를 맺고 있다면, 언어를 통해 얼마든지 세계를 정보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언어의 기본 단위가 되는 명제를 수학 기호로 나타낼 수 있으면 됩니다. 다시 말해 명제를 함수로 보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기호화할 수 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원자 명제를 얼마든지 수학 기호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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