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10점
이정철 지음/너머북스


프롤로그

전사前史


1부 사림의 분열 _ 사림의 정치화

1장 선조 8년~10년 : 분열의 시작

2장 선조 11년~13년 : 대립 구도의 성립


2부 이이의 시간 _ 사림의 이상, 정치의 현실

3장 선조 13년 말~15년 : 이이의 분투와 좌절

4장 선조 16년 : 계미삼찬


3부 선조의 시간 _ 나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5장 선조 17년~22년 : 불안한 평화

6장 선조 22년 : 기축옥사 발발


4부 파국

7장 정개청 옥사

8장 최영경 옥사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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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前史

14 어떤시대의상황을이해하려면 대개는그앞시대부터 이해해야한다. 선조 대 당쟁도다르지 않아서 기묘사회{1519)에서 시작하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선조대 당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황, 조식, 이준경 , 백인걸 같은 제일 연장자급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 바로 기묘사화였기때문이다. 그들이 20세 전후에 겪은 기묘사화는 그들 생애 전체를 규정해버린 원초적경험이다.


15 신진사류 언관들의 주요 공격 대상은 반정공신계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집권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신진사류가 주장한 도학정치의 논리는 군자소인론이다. 정치가 올바르게 되려면 임금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여, 소인은 내치고 군자와 정치를 해야 한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군자는 스스로 수양하여 덕이 있는 사람이고, 소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바르게 다스리려면 수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16 중종과 신진사류의 관계는 오래지않아 중종에게도 점차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신진사류의 정치적 요구가 중종이 상정했던 수준을 지나치고 있었다. 신진사류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받던 훈구대신은 그 기회를놓치지 않았다. 결국 중종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 신진사류를 몰아냈다. 그 몰아내는 과정이 격렬했는데, 그것이 기묘사화이다.


25 국가 권력이 공식적으로 천명한 이념과 제도에 따라 정치세력이 구성되고, 그것을 기초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기준에서보면 중종대와 명종대 정치운영은 파행적이었다.국왕의 인척 즉 처갓집 식구들이 권신으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정상적인 관료체제를 무시하고 관권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 권신의 인사 전횡은 관료사회의 기강문란과 부정부패를 가져왔다. 늘그렇듯이 관권을이용한 사적인 이익 추구는 국고를 비게 하고 민생 파탄을 불렀다.


28 선조 초년 조정의 정치적 지형은 선조가 즉위한 시점부터 선조 5년까지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 구신과 신진사림이 갈등한 시기였다. 당상관, 대신, 승정원 등은 구신이 징악했고, 삼사는 신진사림이 장익한 형국이었다. 삼사는 양시에 홍문관을 포함해서 부르는 말이다. 양측을 대표하는 사람은 이준경과 기대승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두 사람은 이황이 선조에게 추천한 인물들이다.


29 선조 5, 6년을 기점으로 구산과 신진사류의 갈등이 종식되었다. 신진사류는 이제야말로 구체제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그렇지 못했다. 비로소 선조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났던 것이다. 선조는 개혁 요구를 조금도 수용하지 않았다. 이이를 비롯한 신진사류가 선조 6년, 7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선조에게 개혁의지를 불어넣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아무런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30 신진사류의 노력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자 선조 7년부터 개혁의 가능성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개혁 방법론을 둘러싸고 신진사류 안에서 의견이 나뉘었다. 일이 잘 안풀리면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법이다. 이이가 현실의 구체적인개혁 사안들에 집중했다면, 다른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했다. 김우옹은 선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심학 공부에 치중할 것을 주장했다. 성혼도 현실 개혁을 서두르는 이이를 우려했다


리더십

33 선조 즉위 전후조정에 진출한 신진사림은 선조 8년(1575)부터 정치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16세기초 사림이 처음 등장한 이래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림 내부의 갈등 때문이었다. '동서분당' 사태를 시작으로 정치적사건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건들은 그 내용이 서로 달라도 그것이 촉발되고 진행되는 방식이 비슷했다. 한번 시작되면 몇 달씩 끌면서 또다른 사건을 파생시켰다. 조정에서 문제를 처리하는 절차가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 밑바탕에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라는 문제가 있었다.


34 이 시기 조정의 주요한 특징은 대신의 권한이 대단히 약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 시대가 정치적으로 파행적이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신진사림은 제 역할을 통해서 존경받고 권위 있는 대신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훈척시대의 부도덕을 비판하면서 조정에 나왔다. 이들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면서 선조 대는 언관의 권한이 비대해졌다. 합리적 리더십이 없는상태에서 사림 당파간 집단주의가 상황을 지배했다. 이러한 상황이 그 속에 있는사람들에게 당쟁과 관련된 개인적 경험들을 제공했다. 이러한 갈등의 경험들이 누적적으로 더 큰 정치적 갈등의 동력이 되었다.


34 '리더십'이라는 말은 얼핏 리더 개인의 인간적 특성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리더십은 그것보다는오히려 그 집단구성원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혹은 더 우선시하는 가치, 그들이 인정하고 받이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특정한 종류의 권위, 편안하고 익숙한 인간관계의 형식, 집단내의 당연시되는 의사결정 방식 같은것들과 더 많이 관련된다. 이것들 모두는 대개 그 집단 구성원들 삶의 누적된 경험에서 나온다. 과거는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프레임

115 동인은 당시의 조정이 '외척세력 서인' 대 '진정한사림 동인'으로 대립한다고 인식했다. 동인은 서인 전부를 외척 심의겸의 당여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동인은 이이까지도 심의겸의 당여로 인식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서인을 '친심'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동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공격방식이었다. 이 구도에 따르면 명종 말에서 선조 초에 걸친 사림의 개혁은 부정되었다. 동인은 그 시기를 심의겸과 그의 당여가 전횡한 구시대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이렇듯 프레임 논쟁은 역사논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동인의 프레임에 따라, 동인과 결합한 구신에게는 자동적으로 정치적 면죄부가 주어졌다.



관점의 현재성

241 사실 선조는 매우 제한된 정치적 자원만을 가지고 자신의 재위를 시작했다. 그는 조선 최초의 군君 출신 왕이다. 즉위 당시 16세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여러 해 전 사망했고, 즉위할 때는 어머니 상중이었다. 아직 결혼도하지 않은 상태였다. 도움받을 수 있는 친인척도 없었다. 세자 교육도 제대로 받지못했고,선왕 명종의 공개적 육성을 통해 즉위한 것도 아니었다. 재위 초기에는 수렴청정까지 거쳐야했다. 재위 8년까지는 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조건에 있지도 못했다. 그를 왕으로만들어 준 인순왕후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분당 후 그는 점차 운신의 폭을 넓히면서 자기 힘을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또 그가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정치구조, 혹은 조정의 세력구도는 어떻게 변형되었을까?


242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계미삼찬'을 통해 정치적으로 분명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선조가 비로소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엄밀하게 보면 그전까지는 그가 정국의 가장 강력한 행위자이기는 했어도, 조정의 정치적 상황 전개 자체를 주도하지는 못했다. 계미삼찬에서 선조가조정 상황을 주도하는 방식이 나타났다. 그것은 특정한 인물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그를 통해서 자기 의도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대리인으로 내세워진 인물이 이이였다. 재위 기간이 쌓이고 나이가 30 세를넘어가면서 그는 드디어 정치제도가 자신에게 부여한 힘을 능숙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기축옥사 과정에서 그는 조정을 완전하게 장악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신하들에게 거의 제한받지 않는 독재에 가까운 권력 구축에 성공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림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책임

365 선조 대에 활약한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 ‘책임’이다. 사실,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가가 바로 그 사람 정체성의 좌표이고, 그가 맺은 사회적 관계의 액면가이다. 유학에서도 책임은 중심주제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성리학만큼 강조한 사유체계도 드물다. '수기치인'에서 치인은 세상에 대한 사대부의 책임감으로 설명된다.


366 개인적 신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과 사회적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은 현실에서 종종 상충한다.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조선사회는 치인보다 수기를 더 강조하는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책임은 흔히 개인적 산념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면에서 조광조와 이이는 주목된다.


366 선조대 조정에서 여러 정치 적 행위자들은 정치적 책임을지 는데 결국은 모두 실패했다. 이이는 개인으로는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 했고, 대간들은 사회적 결과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던 사람은 선조였다.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는것은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 실정에서는 그마저도 소중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치직 책임은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책임은 개인적 감투정신의 문제가 아닌, 책임지는 사회적 방식의 문제, 즉 사회제도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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