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키 외: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 화해와 협력을 위한 역사인식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 10점
와다 하루키 외 지음, 이규태 외 옮김/책과함께


들어가는 글

1장 동아시아의 근대: 19세기

2장 러일전쟁과 한국병합: 19세기 말∼1900년대

3장 1차 세계대전과 개조: 1910년대

4장 사회주의와 내셔널리즘: 1920년대

5장 새로운 질서의 모색: 1930년대

6장 아시아태평양전쟁과 ‘대동아공영권’: 1935~1945년

7장 아시아 전쟁의 시대: 1945~1960년

8장 베트남 전쟁의 시대: 1960~1975년

9장 경제발전과 민주혁명: 1975~1990년

10장 공동 토론 - 화해와 협력의 미래로: 1990년 이후


맺는 글

참고문헌

연표

옮긴이의 글





1장 동아시아의 근대: 19세기

동아시아의 19세기는 근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해당한다. 18세기에는 토지가 적고 인구는 많아 자본이 적게 드는 노동집약적인 발전 형태를 가진 동북아시아에 많은 은이 유입되면서 번영기를 맞았다. 인구가 적고 사회 유동성이 높았던 대륙의 동남아시아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새로운 국가가 형성된 동북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여러 국가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컨대 청에서 아편이 유행했던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사회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 서양의 대표적인 공업국가였던 영국은 중국 시장을 목표로 삼으면서 해협식민지 등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만들어 나갔고, 1840년대 초에 청과 아편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그리고 영국이 세계에 제공하고 있던 교통과 통신, 무역 관리, 역병 관리, 결제 지능 등의 국제 공공재가 동아시아에도 제공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서양 국가들이 식민지를 구축하여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일본과 시암(지금의 태국)이 서양식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하여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석민지 보유국이 되었으며, 근대 모델을 동아시아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적인 요소를 비롯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닌 기층사회의 자장과,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동 등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공통 체험으로서 근대는 각각의 기층사회에 스며들게 되었다.


2장 러일전쟁과 한국병합: 19세기 말∼1900년대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는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했다. 독일, 러시아, 영국 등 삼국은 간섭으로 일본의 힘을 억누르면서 청나라로부터 조차지를 획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국은 필리핀을 획득했다. 위기를 느낀 청 황제는 변법개혁에 나섰지만 좌절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폭발하자, 열강의 군대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했다. 이때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고 남만주 진출을 획책했다. 러시아는 만주를 제압하면서 중립국이 되기를 바라는 조선의 황제를 지지하려고 했다. 러 · 일 양국은 1903년 여름부터 교섭하기 시작했지만, 대립이 여실히 드러났을 뿐이었다.


1904년 2월, 일본은 영일동맹을 배후로 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은 조선의 전시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우선 진해만과 서울을 점령했다. 일본은 뤼순과 펑톈 전투에서 승리했고 동해 해전에서 완승했다.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일본은 조선의 보호국화를 인정받음과 동시에 남만주를 손안에 넣었다. 러일전쟁을 축으로 가쓰라 테프트 협정과 영국 ·프랑스 협상이 맺어졌고, 전후 미국과 대립하는 가운데 러일 · 영러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일본의 지배에 더욱 저항했고, 의병운동이 확대되었다. 마침내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병탄했다. 이로써 동아시아의 제국주의적 분할이 완성되었다.


3장 1차 세계대전과 개조: 1910년대

일본은 '한국병합'으로 대륙국가화에 성공하자,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그 사이 중국에 21 개조 요구를 내밀었다. 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했다. 일본의 자만심은 여기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일본은 3·1운동에서 조선 민중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게 된다. 시대는 기만적으로 민족 자결주의를 외치고 있었다. "안으로 입헌주의, 밖으로 제국주의"를 표방한 다이쇼 데모크라시 중에도 3 · 1운동을 이해하는 논조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중화민국키 탄생했다. 위안스카이의 제정 운동이 있긴 했지만, 공화국 창설의 흐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5·4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3·1운동과 같은 내셔널리즘의 분출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변경 지역이 독립 상태가 되었으며, 성 지역에서도 쑨원의 대한민족주의와 연성자치 운동이 대립했고, 또 군벌의 지배가 심각해져갔다. 1차 세계대전기는 열강이 유럽에서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틈새를 비집고, 아시아의 민족산업이 발전을 이룬 시대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중산층이 크게 성장했으며, 그들의 움직임은 민족운동으로 각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이들 지역은 종주국의 전쟁에 협력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세계대전 후에는 종주국도 민족자립의 움직임에 어떠한 형태로든 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는 다시 각지역의 민족운동을 활성화했다.


4장 사회주의와 내셔널리즘: 1920년대

1차 세계대전 뒤에 맞이한 1920년대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민족자결주의, 내셔널리즘, 민주주의. 평화주의 이후의 시대에 깊이 관계된 현상과 사상이 나타났으며, 전쟁에 대한 반성으로 국제연맹이 조직되었다. 또 대량생산 방식에 기초한 대중 소비사회 모델이 미국에서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1920년 대야말로 20세기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정치 면에서도 1차 세계대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유럽을 대신하여 점차 미국과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영향력을 강화했다. 동아시아에서는 남양에 위임통치령을 갖고 동남아시아에도 경제적으로 진출한 일본의 발언력이 높아졌다. 일본, 중국, 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서양 국가 또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동아시아는 자유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사상, 코민테른의 활동 등으로 각지에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문명과 근대의 척도가 종주국과 식민지를 포섭하는 논리인가 아니면 양자를 구분하는 논리인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1920년대에 형성된 다양한 사상의 흐름과 정치의 움직임은 서로 연쇄 교차하면서 다양한 모순과 한계를 드러냈고, 대공황을 거친 1930년대에는 조정과 타협이 불가능하게 되고 각각의 논리가 마찰을 일으켜 동아시아는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5장 새로운 질서의 모색: 1930년대

세계공황으로 막을 연 1930년대에는 만주사변 (1931년 9월)과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7월)이 일어났고,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9월)으로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는 위기의 시대가 되었다. 이는 공황 타개책으로 추진한 블록경제권의 형성에 대해 '가지지 못한 나라'인 일본과 독일 등이 베르사유체제와 워싱턴체제를 타파하는 것을 '신질서'의 수립으로 정당화하여 국제질서의 재편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 세계공황의 타격을 받은 아시아 세계에서는 버마의 농민 반란과 인도의 '소금 행진'으로 상징되는 비폭력운동 베트남의 옹에띤 소비에트수립, 필리핀의 삭달 봉기 둥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더욱이 자본주의 체제와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일상생활의 '개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 개조, 동아시아 광역질서 구상, 국제정치·경제체제의 재편 등 다양한 차원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생활의 '개신'은 점차 총력전 수행을 향해 여성을 포함한 총동원체제의 편성으로 변화했고, 조선과 타이완의 황민화 운동에서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보장의 정비를 추진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전면화되는 가운데 항일을 둘러싼 경쟁과 국경의 인적 교류 사이에 새로운 정치 공간이 만들어졌다.


6장 아시아태평양전쟁과 ‘대동아공영권’: 1935~1945년

1937년 여름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일본군은 그해 말에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 당초 일본의 낙관적 예측과 달리 전쟁은 수렁에 빠졌다. 유럽에서는 1939년 가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1941년 말에는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개의 전쟁이 연결되었다. 일본은 삼국동맹을 배경으로 장제스가 이끈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이른바 원장 루트를 차단할 목적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함과 동시에 석유 등의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협상의 결렬을 ABCD 포위망의 결과라고 인식한 일본은 군사력에 의한 남진정책을 본격화하여 열강을 대신한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대동아공영권' 수립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와 점령 지역도 총동원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중국 전선은 뜻대로 진전되지 않았고, 중국 민중은 일본에 굴복하지 않았다. '내선일체'와 '내대일여에 내몰렸던 조선과 타이완에서도 같은 양상이었다. 인적 · 물적 수탈을 강요한 총력전체제는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는 민중의 면종복배의 모습은 차츰 제국 일본의 근간을 동요시켰다. 유럽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내걸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던 동남아시아의 유력한 지도자들도 점차 '남방공영권'의 허구성을 깨닫고서는 각지에서 연합국 및 구종주국과 연계한 반일운동, 공산당 지도하의 게릴라 활동 등을 전개했다.


1945년 8월 대일본제국은 붕괴되어 구식민지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는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의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었고, 마침내 본격화된 냉전의 영향도 있어 탈식민지화는 착종된 과정을 거치게 된다.


7장 아시아 전쟁의 시대: 1945~1960년

2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일본제국은 해체되고 동아시아는 급격한 변동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변동의 최대 요인은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들의 연이은 독립, 즉 탈식민지화의 움직임이었다. 유럽 열강이 지배력의 회복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에서는. 독립을 둘러싼 전쟁이 일어났지만, 열강에 의한 제국주의적인 국제 질서의 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공산당 세력과 국민당 세력 사이의 대립이 내전으로 비화하여 1949년 가을 공산당 측의 승리로 종결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에서 시작된 동서 양 진영 사이의 냉전은 중국혁명을 계기로 아시아에서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중국까지 개입하면서 아시아에서의 냉전은 '뜨거운 전쟁'의 양상을 보였다.


탈식민지화와 냉전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독립한 국가들에서는 제국주의 지배하에서 만들어진 기존의 국제질서에 대신한 아시아의 모습을 창출하려는 모색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기운은 1955년 반둥회의에서도 제시되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의 탈식민지화의 움직임과 거리를 두는 형태로 전후 부흥을 도모했다. 미국에 의해 냉전체제의 서방 측 진영에 포섭된 것은 아시아에서 진행하던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려는 움직·임과 일본의 태도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냈다.


8장 베트남 전쟁의 시대: 1960~1975년

냉전과 탈식민지화가 뿌리내리는 '아시아 전쟁의 시대'는 미국·사이공 정권과 (북)베트남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베트콩)이 대결한 베트남전쟁에서 최종 국면을 맞이했다. 그것은 또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전환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싶은 미국의 의도와도 맞물리면서 1965년에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에서는 같은 해 일어난 9·30사건으로 친중국 노선의 수카르노 체제가 붕괴하고, 1967년에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발족하여 '베트남 후'의 탈냉전질서의 담당자로 성장해간다.


1968년의 '테트' 공세는 반전운동으로 흔들리는 미국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어, 교섭에 의한 해결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한편 '대약진' 파탄의 책임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으로 흔들리던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마오주의와 문화대혁명의 고양은 학생운동이나 혁명 호동에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해가는데, 중국 국내에서는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다. 나아가 1969년 중소대립이 무력충돌로 발전하자, 자국의 안전보장에 심각한 우려를 느낀 중국과 베트남 전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미국의 의도가 일치하여,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라는 '외교혁명'이 실현되면서, 동아시아의 냉전구도는 전환되어 간다. 1975년 사이공 정권이 붕괴하고 베트남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동안 동아시아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구조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9장 경제발전과 민주혁명: 1975~1990년

1975년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이것은 '아시아 전쟁의 시대'의 끝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승리는 전쟁에 가담하고 있던 나라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아세안을 강화하여 자립하려고 했다. 중국은 미국과의 무승부에 만족하고 베트남에 대해 반발했다. 그 결과 1978년에는 중일 평화우호조약과 미중 국교수립에 의해 미국, 중국, 일본의 삼국동맹이 형성되고,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한 소련,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의 삼국동맹이 그것과 대항하는 구도가 생겼다. 다음 해에는 2개 동맹의 접점에서 캄보디아전쟁, 중월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전쟁과 함께 눈부신 경제성장이 진행되었다. 한국, 일본, 타이완,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취해 경제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이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이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 권위의 실추를 가져왔다. 소련에 대항하는 미국은 1983년부터 ‘신냉전’을 개시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전쟁에 개입하여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원조했다. 1986년과 1987년 필리핀과 한국에서는 민주혁명이 성공한다. 이 들 모두 사회주의 이념과 관계없이 진행된 새로운 시민혁명이었다. 체제의 한계에 이른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어 한국, 미국, 중국과의 화해가 진행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이 철수했다. 세계사적으로 냉전이 끝나고, 1991년 소련은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종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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