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17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23, 24, 25, 26장

❧ 자기 정체성의 근거들
- 오뒷세우스: “자신과 페넬로페의 삶의 겪음을 재구성하고 그것으로써 자기를 구축하는 것”
- 데카르트: “세상을 버리고 자기로 들어가 신을 찾으려 한 이”
- 파스칼: “두려움을 호소하고 자기 전체를 신에 바친 이”
- 계몽철학자들: “두렵지 않다고 자신하며 세계 지배를 향하여 간 이들”
-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에 부딪혀 부서져 버릴지언정 물러서지 않고, 신의 강인한 사자使者인 리바이어던 ... 고래를 잡아 죽이려던 자”

 

2021.06.15 숨은 신을 찾아서 —17

⟪숨은 신을 찾아서⟫, 23장을 보면 오뒷세우스 이야기가 나온다. 오뒷세우스 이야기를 갑자기 여기에 집어넣었다고 할 수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 이 두사람과 오뒷세우스를 비교해보자면 오뒷세우스가 얼마나 현대적인가를 알 수 있다. 물론 헬라스 신화를 보면 신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헬라스 세계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자기를 자신의 삶의 근거로 구축하였다. 영리한 근대인들과 꾀가 많은 오뒷세우스는 닮아 있지만, 영리한 근대인들의 마음 한 켠에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면, 오뒷세우스에게는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바로 그것이 오뒷세우스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인 특징이다. 현대인들은 물론 두려움도 불안도 있겠다. 오뒷세우스의 삶의 방식, 신념 체계와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차이가 조금 조금 미세하기는 한데 그들과 오뒷세우스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굉장히 크다. 그래서 23장은 오뒷세우스가 그들과 비교하는 대상으로 또는 기준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두면 되겠다. 오뒷세우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자신과 페넬로페의 삶의 겪음을 재구성하고 그것으로써 자기를 구축하는 것. 겪음이라고 하는 것이 파토스인데 파토스를 통해서 자신의 삶의 근거를 마련한다. 그리고 삶의 근거는 일체 외부의 것에게 두지 않는다. 오뒷세우스와 에이해브와 어떻게 다른다. 오뒷세우스는 거대한 세계 문제, 거대 서사는 신이 움직여간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에이해브는 신에게 도전한다. 

ⅩⅩⅢ 오뒷세우스는 아주 오래 전에 자기를 자신의 삶의 근거로 구축하였다. 영리한 근대인들과 꾀가 많은 오뒷세우스는 닮아 있지만, 영리한 근대인들의 마음 한 켠에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면, 오뒷세우스에게는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ⅩⅩⅢ 자신과 페넬로페의 삶의 겪음을 재구성하고 그것으로써 자기를 구축하는 것 ━ 이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보아 이런 종류의 삶의 방식들이 있다. 오뒷세우스적인 삶, 데카르트적인 삶, 파스칼적인 삶, 키에르케고어적인 삶, 그리고 에이해브적인 삶. 어떤 삶의 방식이 좋은 지는 각자가 판단해 보기로 하겠다.

그 다음 24장. 데카르트는 허약하다. 데카르트의 허약함을 목격하려면 《성찰》의 <제1성찰>부터 <제3성찰>까지 읽으면 되겠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허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 접어두고 여담을 보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말할 때 "나는 생각한다", 내 안으로 먼저 들어간다. 신이 먼저 있다. 그런데 신 안에 들어간다 해도 이를테면 비겁한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고 했으면 그것을 근거로 삼아서 나중에 신을 호출할 필요는 없다. 기껏 자기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거기에서 신을 의식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논변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은 것은 육신을 버리고 정신을 가지고 뭘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은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111페이지에서 112페이지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긴밀하게 맞물려 있어서 인간의 자아감, '나는 나다'라고 하는 것은 정신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대한 감각도 자아감을 구성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 주고받은 모든 작용의 총합이다. 유일한 총합이다. 그 총합들 각각은 다르다." 이게 사실은 오늘날 현대 여러 과학에서도 제시되어온 인간의 자아, 자기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다르다. 그가 가진 겪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대한 일에 있어서는 오뒷세우스에게서도 신이 결정한다고 하지만, 사실 오뒷세우스가 삶의 겪음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구축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현대적인 것이다. 헬라스 세계에서 신을 뺀다면.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생각한다'의 '나'는 오뒷세우스적인 겪음에 비해서도 정초가 굉장히 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저런 것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생각하고 구축하는 것이 데카르트적인 방법이 있고 뭐가 있고 이런 식.

ⅩⅩⅣ 데카르트의 허약함을 목격하려면 《성찰》의 <제1성찰>부터 <제3성찰>까지 읽으면 되겠으나, 그러한 읽기는 잠시 미뤄두고 여담을 더 해보기로 한다.

ⅩⅩⅣ 내가 나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 주고받은 모든 작용의 총합이다. 유일한 총합이다. 그 총합들 각각은 다르다.

여기 짦은 페이지에서 오뒷세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이런 사람들이 계속 등장한다. 그런 것들에 비교해 보기 위해서 112페이지에 현대인에게 있어서 현대 과학에 있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기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이 나라고 하는 존재를 무엇으로써 규정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여러 종류가 등장한다. 오뒷세우스적으로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데카르트적으로 규정할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적으로 규정할 것인가, 자기 정체성의 근거를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을 때에는 이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113페이지에 이런 말을 썼다. 데카르트의 《성찰》은 이런 여담을 한 번 해본 다음에 읽어야 한다. 데카르트가 자기 정체성을 어디 위에 세우고 있는가. <제1성찰>, <제2성찰>은 인간 정신 위에 세우는 것 같다. 그런데 <제3성찰>에 가면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이라는 제목 아래 신의 현존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만도 못하게 굉장히 허약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제목으로만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람이 그 무지를 이겨보려고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를 어쩐다, 신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러려면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겠지━이렇다." 이게 데카르트의 머리 속에서 굴러간 생각이라는 것이다.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방법이 핵심이 된다. 그 증명은 의심스러운 외부 사물에서 증거를 찾아 낼 수 없다.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나의 정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제3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바로 이 길을 택한다. 그는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나를 비추는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내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그 순간 '신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런 점에서는 안타깝게도 철학자라기 보다는, 신학자도 아니다. 신학자는 신에 대해서 정교한 사변을 펼치는 사람이다. 데카르트는 철없는 사람이 아닌가. "이것은 증명을 가장한 신앙고백이다. 아니면 교묘한 말장난이거나." 

ⅩⅩⅣ 데카르트의 《성찰》은 이런 여담을 한 번 해본 다음에 읽어야 한다는 것. 

ⅩⅩⅣ 제목으로만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람이 그 무지를 이겨보려고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를 어쩐다, 신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러려면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겠지━이렇다.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방법이 핵심이 된다. 그 증명은 의심스러운 외부 사물에서 증거를 찾아 낼 수 없다.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나의 정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제3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바로 이 길을 택한다. 그는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나를 비추는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내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그 순간 '신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이다. 이것은 증명을 가장한 신앙고백이다. 아니면 교묘한 말장난이거나.

그러면 데카르트는 도대체 왜 이렇게 허약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게 바로 25장에 나와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 사상사적으로 생각을 해보는 것인데 데카르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인 배경이 되는 사건들은 30년 전쟁이다. 따라서 데카르트 철학은, 데카르트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불안이다. 좀 더 밀고가면 근대 실존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해도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은 수준까지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불안과 그에 의해 촉발된 의심 끝에 육신을 곧바로 버리고 자신의 내면 안으로 들어갔다. 

ⅩⅩⅤ 불안과 그에 의해 촉발된 의심 끝에 자신의 육신을 곧바로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 파스칼, 영리한 근대인들인 계몽철학자들, 그리고 후대의 키에르케고어를 사로잡은 것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 불안을 극복했는가는 각기 달랐다. "세상을 버리고 자기로 들어가 신을 찾으려 한 이"는 데카르트이고, "두려움을 호소하고 자기 전체를 신에 바친 이"는 파스칼이고, 계몽철학자들은 "두렵지 않다고 자신하며 세계 지배를 향하여 간 이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고편처럼 얘기한 것이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에 부딪혀 부서져 버릴지언정 물러서지 않고, 신의 강인한 사자인 리바이어던 ... 고래를 잡아 죽이려던 자" 에이해브이다.

오늘 읽은 23, 24, 25, 26장은 데카르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무엇으로 마련할 것인가. 오로지 고독한 자기라는 것은 없다. 외부에서 자기가 대면하고 있는 그 무엇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핵심기제인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가가 인간을 만들어 내는 자기정체성의 근거가 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ⅩⅩⅥ 데카르트, 파스칼, 영리한 근대인들인 계몽철학자들, 그리고 후대의 키에르케고어를 사로잡은 것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향해 간 곳은 각각 달랐다. 세상을 버리고 자기로 들어가 신을 찾으려 한 이가 있었다. 두려움을 호소하고 자기 전체를 신에 바친 이도 있었다. 두렵지 않다고 자신하며 세계 지배를 향하여 간 이들도 있었다.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에 부딪혀 부서져 버릴지언정 물러서지 않고, 신의 강인한 사자인 리바이어던 고래를 잡아 죽이려던 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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