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19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28, 29, 30, 31, 32장

❧ 자아의 분열

“⟪성찰⟫이라는 텍스트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는 언제나 똑같은 ‘나’가 아니다. 그것이 어떤 ‘나’인지를 감별해내는 것이 읽기의 요체가 된다.”

“나는 이제 진리의 원천인 전능한 신이 아니라,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genium aliquem malignum)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 데카르트의 겸손함

“인간이 얼마나 유한하고 하찮고 허약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 경건함이다. 적어도 그는 이러한 경건함을 가지고서 신에 대해 사유했다고 믿고 싶다.”

 

2021.06.22 숨은 신을 찾아서 —19

⟪숨은 신을 찾아서⟫ 28장부터 31장까지는 데카르트의 《성찰》에 나온 내용들을 재정리한 것이다. 이것은 《철학고전강의》에서 데카르트 부분과 상당 부분 겹치는 것이 있다. 지금 28장부터 31장까지에서 주의해야 하는 지점은 데카르트가 《성찰》을 쓸 때 자신의 생각이 머릿 속에 떠오른 다음에 그것을 정리한 다음에 쓴 것이다. 달리해서 처음부터 이렇게 쓴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초고를 쓰고 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재정리한 것. 《성찰》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관념론의 입장에 섰을 때 중요한 점은 나의 의식이 이렇게 저렇게 분열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할 때 이 말 자체가 내가 있고, 생각의 대상이 나라는 것.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자아의 분열이라고 한다. 자아가 분열되지 않으면 안된다. 데카르트는 성찰이라고 하는 것이 바깥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을 심하게 해보는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감각이라는 것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니까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순진한 단계에서 자아분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1성찰>, <제2성찰>, <제3성찰>은 계속해서 끝없이 자아가 분열되는 것을 보여준다. 영혼과 육체를 일단 분리한다. 데카르트가 생각하기에 영혼 속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 좀 투명하게 이것을 일종의 과학실험처럼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해를 해볼 수 있다.

123페이지를 보면 "⟪성찰⟫이라는 텍스트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는 언제나 똑같은 ‘나’가 아니다. 그것이 어떤 ‘나’인지를 감별해내는 것이 읽기의 요체가 된다." 중요한 문장이다. ⟪성찰⟫에서 나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게 분열되지 않은 상태의 자기 정체성을 굳게 유지하고 있는 나가 아니라 그런 나에서 끊임없이 여러가지로 분열되어 있는 나, 즉 감각적인 것을 믿고 있는 나 또는 그런 감각적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나 이런 종류로 분열되어 있는 나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제1성찰>에서 보면 "나는 이제 진리의 원천인 전능한 신이 아니라,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genium aliquem malignum)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실제로 가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극단적인 자기 불신. 데카르트의 《성찰》에 나와있는 이런 말들은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겪어봤던 그런 것들을 전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ⅩⅩⅧ ⟪성찰⟫이라는 텍스트에 등장하는 수많은 ‘나’는 언제나 똑같은 ‘나’가 아니다. 그것이 어떤 ‘나’인지를 감별해내는 것이 읽기의 요체가 된다.

ⅩⅩⅧ "나는 이제 진리의 원천인 전능한 신이 아니라,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genium aliquem malignum)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하겠다."

29장은 <제2성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들이 나를 속인다. 그래서 믿을 놈이 없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게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만이 확실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선불교 같은 데서 말하는 일체유심조, 이런 것과는 다르다. 선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는데, 그 마음이라는 것도 사실은 원래 본체가 없는 것이니 다 헛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데카르트는 마음에서 만든 것만이 확실하게 믿을만한 것이다라는 얘기다. 데카르트는 정신이 일체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마음도 헛된 것이니 그것마저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그러면 데카르트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으니 확실하다고 말할 때 그 확실함의 보증자는 신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 허약하다. 이 허약함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신이다. 그래서 모든 자신의 생각을 신이라고 하는 것에 근거하고 그에 따라서 신존재증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보면 광신자 같다. 여기서 판단을 해볼 수 있다. 30장을 보면 "데카르트가 신의 관념을 두고 신의 현존을 증명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함, 경건함이다." 글쎄 조금 의문스럽다. 그래서 31장에서 "데카르트의 심정에 경건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유한함에 머무르는 것이 경건함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유한하고 하찮고 허약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 경건함이다. 적어도 그는 이러한 경건함을 가지고서 신에 대해 사유했다고 믿고 싶다." 이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오만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 더욱 큰 것을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데카르트 테제의 핵심적인 것이 나온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함을 이해하고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인간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인 무한한 신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내가 유한함을 깨달을수록 신의 무한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찰⟫에 나와있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읽어보면 굉장히 유한자가 가질 수 있는 겸손함, 그것을 신이라고 하는 무한자에 대비해서 끊임없이 생각해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수가 있다. 

ⅩⅩⅩ 데카르트가 신의 관념을 두고 신의 현존을 증명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함, 경건함이다.

ⅩⅩⅩⅠ 데카르트의 심정에 경건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유한함에 머무르는 것이 경건함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유한하고 하찮고 허약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 경건함이다. 적어도 그는 이러한 경건함을 가지고서 신에 대해 사유했다고 믿고 싶다. "내가 정신의 눈을 나 자신으로 향하면, 나는 불완전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것임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각이 뚜렷할수록 "동시에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이 더욱 큰 것을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ⅩⅩⅩⅠ 인간이 자신의 유한함을 이해하고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인간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인 무한한 신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내가 유한함을 깨달을수록 신의 무한함을 알게 된다.


32장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를 재정리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찬찬히 다 읽어보겠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든 데카르트에서든 인간이 알아차리든 그렇지 않든 신은  존재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신이 먼저 있은 다음,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있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데카르트에서는 신이 먼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 내가 신을 어떻게 아느냐, 즉 인식론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처럼, 알아야 존재한다. 모르면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에게 이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똑같은 얘기를 왜 아우구스티누스도 하고 데카르트도 하는가. 그런데 지금 읽은 것처럼 분명히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먼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들어간다. 그것은 신이라는 존재론, 세계 존재의 근거를 먼저 확정해놓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차리는가로 들어간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출발점이 나부터이다. 내가 어떻게 신을 아는가, 일단 나에 대해서 검토를 한 다음에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인식론부터 한다. 똑같은 얘기인데 다르게 이야기한다. 

ⅩⅩⅩⅡ 아우구스티누스에서든 데카르트에서든 인간이 알아차리든 그렇지 않든 신은  존재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서는 신이 먼저 있은 다음,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있음을 분명하게 하였다. 데카르트에서는 신이 먼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 내가 신을 어떻게 아느냐, 즉 인식론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처럼, 알아야 존재한다. 모르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식을 가지고 인간을 대하는가. 그것에 따라서 인간에 대한 탐구 방식이나 종류도 달라진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신을 대하는가, 내가 신을 알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먼저 따져서 생각해보고 신을 대하는 것과 내가 알던 모르던  신이 있어라는 태도를 가지고 신을 대하는 것과는 아주 천지 차이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런 말이 데카르트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데카르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출발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근대인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들이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데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그런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느냐, 그것이 신념체계를 바꾸는 일이고 신념체계를 바꾼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에서는 정말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철학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뻔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사람이 어떤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깊이 추론해 나아갈 때 어느 지점에서 출발점을 가져야 하는가를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그런 역할도 한다는 점을 이해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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