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03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강

❧ 변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세 가지 방식
불변의 초월적 실재
현상의 배후에 있는 법칙
학문적 논의의 출발점으로서의 규약


❧ 파르메니데스의 의의
“서구철학의 전개는 한때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주석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아주 유사하게, 그리고 조금의 과장도 없이 플라톤 자신의 저작들은 엘레아 사람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각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갤롭David Gallop, ⟪엘레아 사람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of Elea).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03

오늘은 제3강 파르메니데스에 나타나는 존재의 근본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3강은 짧지만 존재론에 관한 논의에서 기본이 되는 부분이다. 앞서 헤시오도스는 헬라스 우주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는데 본격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논의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3강~87강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한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한 사람은 변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두가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러니까 존재는 변함없이 있는 것과 변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변함없이 있는 것이 있어야 그것을 가지고 변하는 것에 관한 논의를 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일반적으로 표준이라고 한다. 프로토콜, 정해진 규약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 변화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나중에 헤라클레이토스에 가서 따져 보기로 하고, 그러면 변함없이 있는 것은 얼마나 변함없는가, 또 그것은 어떻게 있어야 변하지 않는가를 생각해보자. 변하는 것에 대한 논의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인간의 신체는 있는데 가령 인간이 죽으면 물질의 덩어리는 그대로 있겠지만 숨을 쉬지 않으니까 옛날 사람들은 살아있게 하고 살아있지 않게 하는 뭐가 있지 않나 이것을 프쉬케, 영혼이라고 불렀다. 이것도 육체의 덩어리와 소멸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정신이 보여주는 활동을 보면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육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나중 생각이다. 육체는 매장을 하면 썩어서 변화하고 화장을 하면 재가 되는데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썩어서 뭐가 되면 다른 것이 되니까 그 물질은 유지가 된다. 물질은 변하기는 변하는데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더 자연스럽고 오래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변하는 것에 대해서 육체가 불변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래 죽으면 썩지. 전혀 지금의 나와는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말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순수한 부정성이다. 그러니까 존재론이라는 학문 자체가 굉장히 섬찟한 학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있는가. 변함없이 있는 것은 얼마나 변함없는가. 그리고 어떻게 있어야 변함없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 그래서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을 읽어보면 있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것을 후대의 학자들은 정리하기를 세 가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3강에서 소개하는 것이다. 3강에 이어서 4,5,6강은 각각의 것들, 즉 변함없이 있는 것에 관한 세 가지 논의이다. 이게 중요하다. 이 세가지를 염두에 두었다가 '쟤는 변함없이 있는 것인데 그 중에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에 관한 해석 중에서 3번에 해당하는구나, 2번에 해당하는구나, 1번에 해당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된다.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을 공부하면 어디에 써먹는가, 그냥 그렇게 일상에서 부딪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쓸 수 있다. 첫째로는 정말로 변하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을 벗어난 것, 그래서 초대상이다. 대상은 독일어로 Gegenstand 인데 Gegen은 '앞에'라는 말이고, stand는 서 있는 것. 우리 앞에 서 있지 않다. 그러니까 초대상적인 것이다. 우리의 이성이 알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초대상적이고 초지성적인 것. 예를 들면 기독에서 말하는 신. 영원불멸하다. 초지성, 초대상 세계 또는 형상계라고 한다. 그것에 대비되는 우리 눈앞에 늘 변화하는 것을 가리킬 때는 현상계라고 한다. 형상계와 현상계라고 하는 두 세계가 있다. 이것이 1번. 두세계 이론이다.

3강 57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그가 말하는 일자는 불변의 초월적 실재이며, 그 일자가 속해 있는 형상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단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형상계와 현상계를 상정하는 '두 세계 이론'입니다.

변함없이 있는 것들 중에 두번째는 무엇인가. 우리 눈 앞에 변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배후에는 어떤 법칙이 있다고 할 때 그 법칙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방법이 있다. 과학이다. 파르메니데스는 그러니까 형이상학이 아닌 물리학의 아버지이다. 그러면 서양과학사상사를 쓸 때는 파르메니데스가 내놓은 현상세계와 법칙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태도가 하나 있다.

3강 57 그의 형상 이론도 과학 이론의 성격을 띤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형상은 인간이 닿지 못하는 세계 있는 초월적인 실재로 해석되지 않고 다만 하나의 법칙으로서 있는 것이고,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현상은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칼 포퍼가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에서 제시한 것입니다.

식물이 계절에 따라 꽃도 피게하고 겨울이 되면 시들고 하게 하는 어떤 식물들을 움직이는 식물들에 관철되어 있는 법칙이 있다고 하는 것. 식물은 변화한다. 그런 것들은 변화하는 것에 비해서 식물들이 늘 움직여 가는 법칙은 변함이 없다.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10페이지를 보면 "춘추는 사람의 일을 적습니다. 꽃보다 유한한 사람의 일을 적습니다. 사람은 태어난다, 사람은 죽는다, 이걸로 끝입니다. 사람에 관하여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는 그처럼 당연해 보이는 것을 기록하였고, 철학은 인간의 일에서 근원적인 것, 변함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적었다. 바뀌는 것이 있어 보이는데 변함없이 있는 것이 있다. 있어 보이는 것이 있고 늘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의 역사책인 《춘추》를 이야기 하면서 썼다.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10 춘추는 사람의 일을 적습니다. 꽃보다 유한한 사람의 일을 적습니다. 사람은 태어난다, 사람은 죽는다, 이걸로 끝입니다. 사람에 관하여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는 그처럼 당연해 보이는 것을 기록하였고, 철학은 인간의 일에서 근원적인 것, 변함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찾아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10 바뀌는 게 있어 보이는데 그 안에 변함없는 것이 있습니다. 있어 '보이는 것'이 있고, 늘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이 있습니다. 둘 다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리키고, 다른 하나가 하나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해서 불변(에 가까운 것)을 이룹니다.

춘추라고 하는 말은 봄과 가을인데, 우리가 봄이 왔다, 가을이 왔다고 말하는데 계속 계절은 변화하지만 계절을 가리키는 이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봄, 가을이라고 말을 할 때, 즉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일종의 약속, 규약이다. 그것을 시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변함없이 있는 것은 저 우리의 앎을 넘어서는 대상도 아니고, 또 초대상도 아닌 학문적인 논의만큼 엄밀하지는 않아도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가운데서 서로 의미 있는 대화를, 서로 통화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 출발적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약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게 바로 학의 시원 해석이다.

3강 57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사학이 어떤 실재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학문의 출발점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적인 논의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즉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이 학의 시원을 마련해준다는 것이지요.

두 세계 이론이든, 현상 세계와 법칙이든, 학의 시원 해석이든 간에 이 세가지를 변함없이 있는 것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즉 변함없이 있는 것이 존재하는 세가지 방식이다. 이런 것이 왜 필요한가. 세번째는 필요하다. 변함없이 있는 것, 불변의 것에 대해서 일단 약속을 해야 말이 통하고 대화를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대화를 할 때 최소한 정의를 갖추고 가야 하는데 합의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 세계 이론은 약간 종교적인 신념체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가치에 대해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그래서 신념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신념체계와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을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이다. 신념체계가 있어야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가 규정된다. 궁극적인 가치, 올바름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세속의 시류에 따라서 살아가기 쉽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다. 사람마다 신념체계가 다르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해도 하나의 신념체계가 있다. 즉 선, 악이라고 하는 것은 불변의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살아가는 그때그때 정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도 신념체계이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올바름에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근거해서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 존재에 관한 해석에서 1번 두 세계이론을 자신의 신념체계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 대다수는 두 세계 이론을 바탕에 깔고 인생을 산다. 초지성적 초대상적인 것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삶의 방식을 꾸려나간다는 점에서 절대 다수의 인간은 두 세계 이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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