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04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4강

❧ 고대 수사법의 형식과 용어
오늘날의 서문에 해당하는 서사(prologos)가 있다.
신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나 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청한다.
사용하는 술어들이 오늘날의 의미와 다르다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 여신이 가르쳐주는 것(“배워야 하는 것들”)
모든 것
설득력있는 진리
흔들리지 않는 심장
가사자들의 의견
…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 있는 것들로서 받아들여질만하게 있어야 했던 까닭
진리와 비진리를 식별하는 법


❧ 진리(단편 2, 3, 4, 5, 7)와 식별 표지들
‘있다’라는 길 / 있지 않은 길
진리에 관한 보충설명
있음을 식별하는 표지들(단편 8) → 일자


❧ 착각이 일어나는 까닭(단편 6)과 누스를 사용하는 방법(단편 7)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고 있기 때문
감각기관을 차단하고 습관이 경험을 신뢰하지 않게 해야 한다.


❧ 고대의 해석
판단이 가능하려면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에 해당하는 것을 있음이라 하였다.
운동(변화)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변화하는 것에 진리가 있지 않음을 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두 세계 이론
누스, 진리, 초월적 일자의 세계 / 감각기관, 비진리, 눈 앞의 현상 세계
“논변(logoi)으로 판가름하라.”
칸트Kant, 예지계를 알 수 없고, 현상계만을 알 수 있다. 예지계를 안다는 것은 “초월적 이념에 대한 가상”이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04

오늘은 ⟪철학 고전 강의⟫, 제4강을 설명하겠다. 사실 제4강은 분량이 좀 길고 벌써 어려운 얘기가 나온다라는 느낌이 있을 수 있어서 두번에 나누어서 하려고 했는데 일단 한번에 한다. 그리고 이 녹음 파일을 가지고 ⟪철학 고전 강의⟫ 공부를 하겠다는 분들은 먼저 그냥 쭉 듣고 들은 다음에 책을 읽으면 되겠다.

제4강은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전통석 해석'이라고 하는 괄호 안에 제목이 있고, 제목은 일자와 두 세계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서 제4장은 일자와 관하여 설명을 하고 두 세계 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일자와 두 세계 이론을 설명하기 앞서서 파르메니데스의 단편과 같은 글들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겠다. ⟪철학 고전 강의⟫를 읽으면서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분도 있을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인데 이 사람의 단편을 읽는데 바로바로 이해가 되겠는가. 마음을 편히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대략 2500년 전쯤에 헬라스 아테나이에서 사람들이 뭐라도 떠든 얘기를 기록해둔 것을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읽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지금은 종이에 글로 써진 것을 눈으로 읽지만 그 당시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이것을 글로 써서 남들에게 널리 퍼뜨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들 앞에서 읽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노래 같은 것이다. 드라마처럼 얼른 듣고 바로 바로 이해는 안되더라도 들을 수 있는 구어, 즉 형식적으로는 입말이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 여기에 사용되는 술어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단어를 통해서 이해하는 의미와는 다르게 되어있다는 점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고대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형식이고 용어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정한 규칙이 있고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고대의 헬라스 수사법을 읽힐 필요가 있다.

들어가는 말이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보면 들려주소서 무사의 여신이여 이렇게 시작되는 부분에서 대개 10개 행 정도가 들어가는 말이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도 첫째 단편을 보면 [20] 그러자 그 문을 통해 곧장 처녀들이 마차와 암말들을 마찻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여신이 나를 반갑게 맞아들였는데, [내] 오른손을 [자신의] 손으로 맞잡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말을 걸었다. 대충 여기까지가 시작하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오늘날로 보면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읽을 때 항상 앞 부분을 읽어나갈 때 잘 챙겨서 형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단편들은 원래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지만 후대의 문헌학자들이 최대한 이런 모양일 것이다 라고 추정해서 짜맞춰 놓은 것이다. 그나마 그런 문헌학자들이 해놓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읽기가 쉽다.

제4강 60 [20] 그러자 그 문을 통해 곧장 처녀들이 마차와 암말들을 마찻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여신이 나를 반갑게 맞아들였는데, [내] 오른손을 [자신의] 손으로 맞잡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말을 걸었다.

그래서 프롤로그, 서사에 해당하는 부분을 먼저 설명하겠다. 충동이 미치는 데까지 나를 태워 나르는 암말들이 [나를] 호위해 가고 있었다. 첫번째 단어가 충동이다. thymos라는 단어인데, thymos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나를 태워 나르는 암말들이 [나를] 호위해 가고" 따라서 이 단편의 주인공이 '나'이다.  서사가 끝나는 부분을 보면 여신이 나에게 뭐라고 했다고 나온다. 그러면 내가 여신을 만나러 가서 그 여신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이나 똑같이 여신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보면 시인은 여기에 있다. 시인이 여기에 있어서 들려주세요라고 하늘에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빙의가 되어서 신내림을 받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은 들으러 가서 듣고 와서 이야기를 한다. 차이가 조금 있다. 어떤 것이 더 먼저의 형식인가는 문헌학자들이 따져서 묻겠지만 예를 들어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모세가 뭐라고 듣고, 아브라함도 듣는다. 야훼 하느님이 아브라함아 어디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지금부터 잘들어라.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듣는 것이다. 그러면 파르메니데스의 단편은 여신을 만나러 가니까 그 사람들 보다 나중인가, 아니면 파르메니데스가 단편을 쓸 때에는 더 쎈 사람이었나 이런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제4강 59 충동이 미치는 데까지 나를 태워 나르는 암말들이 [나를] 호위해 가고 있었다.

제4강 61 다시 말해서 이 단편은 파르메니데스가 여신들을 만나러 가서 그 여신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 다음에 충동이라는 말은 대체로 우리 마음 속에서 끌어오는 본능 같은 열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끔 플라톤에서는 용기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그래서 튀모스라는 단어를 courage로 옮기기도 하지만 열개가 나오면 그런 뜻으로 쓰이기는 것은 한개에서 두개이다. 따라서 튀모스라는 단어가 헬라스 철학 책이나 문헌들이 나오면 마음 속의 충동, 인간 내면에 있는 욕구인데 뭔가 하려는 힘을 가리킨다.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일은 습관이 하는 일이겠다.

제4강 61 인간의 내면의 있는 욕구인데, 방향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나 뭔가를 하려는 힘을 가리킬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그 다음에 뉙스와 에마르가 있다. 뉙스는 어두움, 밤이고, 에마르는 낮이다. 즉 '밤과 낮의 길들의 문'은 비진리와 진리의 문이다. 이런 비유 표현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에테르에 있는 그 문은 커다란 문짝들로 꽉 차 있는데", 에테르라는 말은 빛나는 공기를 말한다. 그리고 "여신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들였는데, 내 오른손을 자신의 손으로 맞잡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epos)를" 여기서 epos로 되어 있다. logoi도 이야기로 번역했고 epos도 이야기로 번역했는데, epos는 달콤한 이야기, 감언시설에서 감언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대를 이 길로 보내준 것은 나쁜 모이라" 모이라라는 말은 정말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외워야 한다. 모이라는 운명이다. 파르메니데스 당시에는 모이라와 튀케라는 말의 구별이 없었고, 아직 튀케가 사람들의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 때이다. 모이라, 즉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훨씬 중요한 시기이다."테미스(옳음)과 다케(정의)이니 말이다." 여기서 디케라는 말은 올바름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정의로운 사람, 뭔가 가치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런 말을 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참과 거짓 이런 뜻이다. 즉 파르메니데스를 읽을 때는 가치가 있는, 올바른 이런 뜻이 아닌 참과 거짓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아직 플라톤이 나오기 전에 존재론에서는 참과 거짓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존재론이라는 말이 뭔가 감이 잘 안잡히는 경우 자연과학의 물리학을 떠올리면 된다.

"자, 그대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그가 배워야 하는 것은 우선 모든 것이다. 네 가지를 배워야 한다고 설명하는데 다르게 보면 모든 것 안에 나머지 세가지, 진리와 거짓과 오류를 식별하는 방법이 그 모든 것 안에 들어간다고 이해하면 된다. 특별히 엉뚱하게 해석하지 않는한 고대의 문헌들은 해석을 정합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득력 있는 진리의 흔들지리 않는 심장과, 가사자들의 의견을" 설득력 있는 진리는 아주 틀림없는 진리는 아니다. 2×3=6 이것은 설득력 있는 진리가 아닌 틀림없는 진리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설득력 있는 진리는 틀림없는 진리와 대체로 비슷한 말이라고 이해를 해보겠다. 그다음에 흔들지리 않는 심장는 태도이다. 그 다음에 가사자들의 의견. 가사자는 죽을 운명에 놓인 자들. 여기서는 진리를 갖고 있지 못하는 자들, 파르메니데스도 가사자인데 신을 만나러 갔기 때문에 가사자도 아니고 불사자도 아닌 중간에 있는 자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이렇게 하는 말은 우리 사람은 죽을 운명에 놓인 존재인데 그래도 불멸의 신에게 갔다왔다 라는 것을 구별지어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진리"를 진리라고 하기로 하고, "가사들의 의견"을 비진리 또는 거짓이라고 하기로 하고, 이 둘을 식별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즉 진리를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와 비진리를 식별하는 방법도 중요하다. 이를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어떻게, 내내 전부 있는 것들로서 받아들여질 만하게 있어야 했던가". 여기서 "…라고 여겨지는 것들" 이것은 거짓인데 거짓이라고 여겨지는 것. 유사 진리, 사이비 진리가 어떻게 해서 있는 것들(진리)로 속여지는가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오류가 일어난 이유와 그 식별법이다.

다시 정리하면 여신을 만났고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고 한다.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모든 것, 그 다음에 설득력 있는 진리, 흔들리지 않는 심장(태도),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 가사들의 의견, "…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는 것들로서 받아들여질 만하게 있던 것"(오류가 일어나는 이유와 그 식별법). 여기까지가 단편1에 관한 설명이다.

단편2는 진리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는 있다(estin)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 라는 길"이다. '있다 라는 길'은 "페이토(설득)의 길"이고 '있지 않다 라는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다. 진리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해서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제4강 64 여기서 여신은 두 가지 길을 말합니다. "하나는 있다(estin)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 라는 길"입니다. '있다 라는 길'은 "페이토(설득)의 길"이고 '있지 않다 라는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입니다. 

 

단편 3,4,5,7은 있음과 있지 않음에 대해서 보충설명을 한다. 단편2에서 있음과 없음에 대한 명제를 내놓고 3,4,5,7에서 보충설명이 있다. 그런 다음에 단편 8에 있음을 식별하는 "아주 많은 표지들"을 얘기한다. 그래서 단편 6을 빼고 단편1부터 8까지가 한 묶음이다.

그러면 '있다'라는 것에 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말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에 대해서 "저 사람들은 감각되는 것들의 실체(ousia) 너머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고 상정하지 않지만" 우리가 판단하고 사유를 하려면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바로 그런 것에 해당하는 말들을 불변하는 것이라고 해두었다. 판단이 가능하려면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넘어선 뭔가의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에 해당하는 것을 있음이라고 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단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있음'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저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더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부정론자들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하면 첫째는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들 너머에 뭔가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가리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에 해당하는 것을 '있음'이라고 했다고 이해를 했다. 두번째로는 파르메니스와 멜리소스 이 사람들은 자연부정론자(aphysikoi)라고 불렀다고 얘기했다. 이 부분은 파르메니스와 그 사람들에 대한 해석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후대의 학자들은 파르메니데스로부터 무엇을 봤는가. 이 사람들은 우리 감각기관 너머에 실제로 뭔가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가 하나 있고, 단편31에서는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을 부정한 사람들이다고 얘기한 것이다. 첫번째 것은 수긍을 할 수 있다. 이는 파르메니스에 관한 세번째 해석, 학의 시원에 관한 해석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자연부정론자(aphysikoi)는 무엇인가. 운동이라고 하는 명백한 자연현상을 과연 파르메니데스는 부정했는가.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보아도 운동을 부정하는 것이 맞는가. 파르메니데스의 편을 들어서 상황에 맞춰서 좋게 해석해보자면 운동을 부정했다기 보다는 변화하고 있는 것 안에는 참다운 진리가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단편 8에서 말하는 식별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는 부분 보겠다."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 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semata)이 있다." 이 길에 있는 표지가 무엇인가.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으로 있는 것들이 바로 있다의 표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무시간적인 것, 시간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것. 다르게 말하면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것, 그리고 완결된 것,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불변의 것, 딱 하나로서 가득 차 있는 것.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그냥 우리 머리속에 있다. 그렇지만 파르메니데스는 있음인 것의 특징을 무시간적인 것, 생성 소멸하지 않는 것, 완결된 것, 불변일 것, 한마디로 말해서 일자로 '있다'로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일자가 아닌데 일자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다시는 일자가 아닌 것에 현혹되지도 말아야 한다. 다시말해서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네번째 얘기하는 것은 착각이 일어나는 까닭,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심장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이것이겠다. 설명하는 방법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방법, 하나는 긍정적인 방법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를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제4강 73 단편6에 따르면 가사자인 인간이 거짓 거짓으로 식별해내지 못하고 참으로 착각하는 것은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긍정문으로 쓰면 "누스를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편 6에는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단편7에서는 누스를 제대로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개를 묶어서 정리를 해보면 일단은 감각 기관으로부터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 "눈과 잡소리 가득한 귀와 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 못하게 하라."  다시말해서 감각기관을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말이 있다. "논변으로 판가름하라." 참된 누스(정신)에 의한 사유로서 분변을 하라고 말한다.

일단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일자에 관한 해석이다. 이것을 놓고 두 세계 이론으로 해석할 것이냐, 법칙 현상으로 해석할 것이냐, 학의 시원으로 해석할 것이냐의 차이가 생긴다. 두 세계 이론으로 설명해보겠다. 파르메니데스는 누스로만 파악되는 것이 있고 감각기관으로 파악되는 것이 있다고 나누었다. 그러면 둘로 나누었기 때문에 이원론이고, 누스로만 파악되는 것은 불편의 것이겠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사실은 여신을 만나야만 알 수 있다. 누스를 통해야만 알 수 있다. 우리 눈 앞에 늘 변화하는 세계에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알 수 있기는 있는데 알려면 누스를 개발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진리를 갖고자 하는 자, 충동을 가진 자는 누스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눈 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무시해야 한다. 이것을 플라톤은 에피스테메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는 예지계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점은 칸트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이나 파르메니데스는 누스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칸트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에 대한 앎에 만족해야 한다. 즉 가자사의 의견에 만족해야 한다. 또는 우리는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맬 수밖에 없다.

제4강 74 파르메니데스의 질자는 플라톤의 형상론의 이론적인 선행 모형인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서는 누스로만 파악될 수 있는 초월적인 일자의 세계와 감각기관에 알려지는 거짓 세계, 두 개의 세계가 분명히 대립된니다. 이것은 이원론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감각 기관을 넘어가는 것은 알 수 없다고 하며, 이것은 초월적 이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의 감각 기관을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한다면 초월적 이념에 대한 가상이라고 말한다. 거짓으로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초월적인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칸트가 하는 이야기이다.

제4강 76 예지계에 대해서는 인간이 앎을 가질 수 없으니,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데이터에 기반한 앎, 즉 현상계에 대한 앎으로 만족하자는 것이 칸트의 주장입니다. 칸트는 예지계에 대해 인간이 무엇을 말할 때 그것은 "초월적 이념에 대한 가상"일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인간이 상상하는 것을 이념이라 해두고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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