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숨은 신을 찾아서 — 21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35장

❧ 파스칼의 물음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팡세⟫, §233)
물음: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기독교도에게만 심각한 문제인가?


❧ 우리의 생각
우리 인간과 안드로메다는 근원적으로 같은 존재이다.
진상眞相에서 본 우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파스칼은 두렵다고 하는걸까?
그는 존재의 진상을 알고 있었을 것이나, 거기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우주와 우주의 모든 존재를 다른 차원에서 생각한 것이다. 파스칼은 그렇게 해서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다.

 

2021.06.29 숨은 신을 찾아서 —21

⟪숨은 신을 찾아서⟫, 34장, 35장, 36장이 파스칼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스칼의 《팡세》, 읽어보면 두서없다. 간교한 제안을 드리자면 34장, 35장, 36장만 읽어도 되지 않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물로 예전에 《문학고전강의》를 할 때에는 촘촘하게 강의를 했다.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두려우면 관둬버리지 왜 이러는 것인가. 인내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팡세》 읽어보니 이 고통스러운 짓을 왜 하고 있는가. 그것이 파스칼에게 기쁨을 주니까 그렇다. 《팡세》의 핵심 명제가 무엇인가.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막막한 것, 두려움의 원인은 무한한 우주, 그것의 고요함이다. 《팡세》의 정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필립 셀리에판인데 아우구스티니안이 아니다라고 하고, 독실한 신앙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본인은 그렇게 읽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기독교도의 두려움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읽지는 않았다.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기독교도에게만 심각한가. 꼭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살아온 그런 사람에게만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우주라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은 인간에게 실존적인 두려움이다. 실존적인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인간이 만들어낸 상황에서 오는 것은 두려움인데, 사실 우주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이다. 

ⅩⅩⅩⅣ 파스칼은 말한다: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233). 두려움 ━ 이것이 그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심정이다. 두려움의 원인은 무한한 우주, 그것의 고요함이다.

파스칼이 우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할 때, 두려움이라고는 말했지만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상황이 아닌 것 그런데 태어나보니 세상에 우리는 던져져 있는 존재(피투성)이다.  그래서 인간 뿐만 아니라 우주 속의 모든 존재는 대폭발에서 튀어나온 것들이 뭉치고 흩어진 것들이고, 명왕성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고 안드로메다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안드로메다는 근원적으로 같은 존재이다. 

사물을 진상, 본래적인 입각적에서 보면 우주와 인간이 똑같다는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를 기독교도가 아닌 실존적인, 즉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우주를 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저 우주와 내가 똑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는 자각이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이 두려움이다. 

142페이지에서 처음에 물음은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했는데 여기다가 문제를 제기했다. "그를 두렵게 하는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기독교도에게만 심각한 문제인가?" 본인의 물음이다. 필립 셀리에는 아우구스티니안이다 라고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음이고 우주를 생각해보자고 얘기한 것. 우주를 생각해보면 안드로메다나 인간이나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기독교가 보는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 어쩔 것인가. 내가 만든 우주도 아니고 내가 이 속에 있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던져져 있을 뿐인데. 이것이 진상이다. "우주를, 우주 속의 안드로메다를, 우주 속의 인간을 존재의 진상에서 보면, 그것은 두려움도 기쁨도 슬픔도 쓸쓸함도 덧없음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왜 파스칼은 두렵다고 하는가. 기독교가 아닌 사람이 그냥 사물을 존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는데 파스칼은 두렵다고 한 것. "불교도라면 존재의 진상을 놓고, 있는 것에도 매달리지 않고 없는 것에도 매달리지 않아야겠다고 할 것이다. 마음을 놔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 이전으로 마음을 되돌려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영원으로 가려 할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나 파스칼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생성을 겪지 않는 신에게서 벗어나 있고 신에게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파스칼이 기독교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우연함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그게 바로 파스칼을 기독교로 만든 힘이다. 

ⅩⅩⅩⅣ 그를 두렵게 하는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은 기독교도에게만 심각한 문제인가?

ⅩⅩⅩⅣ 우주를 생각한다.

ⅩⅩⅩⅣ 우주를, 우주 속의 안드로메다를, 우주 속의 인간을 존재의 진상에서 보면, 그것은 두려움도 기쁨도 슬픔도 쓸쓸함도 덧없음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ⅩⅩⅩⅣ 불교도라면 존재의 진상을 놓고, 있는 것에도 매달리지 않고 없는 것에도 매달리지 않아야겠다고 할 것이다. 마음을 놔버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 이전으로 마음을 되돌려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영원으로 가려 할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ⅩⅩⅩⅣ 그 우연함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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