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06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7강, 제8강

❦ 제7강: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 로고스
“이 로고스logos는 언제나 그러한 것으로 있지만, 사람들은 듣기 전에도, 일단 듣고 나서도 언제나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어떠한 것과 마주치든 간에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배우고서도 알지 못하지만, 자신들이 (안다고) 여긴다.”
“그들은 가장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 즉 전체를 다스리는 로고스와 갈라선다. 그리고 날마다 마주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낯선 것으로 보인다.”
“개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서 짖는다.”

❦ 제8강: 변화하는 여러 현상들과 궁극적인 ‘하나’
“함께 잡혀진 것들 — 전체이며 또한 전체가 아닌 것, 한곳에 모이며 또한 따로 떨어지는 것, 함께 부르며 또한 제각기 부르는 것,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하나, 그리고 하나로부터의 모든 것.”
“보리 음료도, 젓지 (않으면), 분리된다.”
“같은 강에 발을 담근 사람들에게 다른 강물이, 그리고 또 다른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간다.”
“영원히 살아 있는 불”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06

오늘은 ⟪철학 고전 강의⟫, 제7강과 제8강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제7강과 제8강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서 다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파르메니데스보다 앞선 사람이다. 자세히 보면 파르데니데스가 했던 얘기들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파르메디데스와 달리, 하나인 것, 일자인 것, 헤라클레이토스에서는 hen이다, 그 하나인 것이 어떻게 여럿인 것, 모든 것과 관계를 맺는가를 더 자세히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변의 형이상학의 출발점은 파르메니데스라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이 세계에 있는 것과 있는 것들 사이의 대립을 설명하는 데에는 모자란다. 파르메니데스가 탁월한 통찰을 보이고 있기는 해도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더 윗길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제7강에 있는 얘기를 하겠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세 부분으로 이어진다. 첫째는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알고 있는 사람인가, 그 다음에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 있는 이 만물은 어떻게 불변하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첫째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당연히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겠다. 그러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가 두번째 얘기가 된다. 그런데 그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진리 아닌 것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파르메니데스에서는 진리 아닌 것은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해버렸다. 그러니 진리인 것과 진리 아닌 것의 관계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것들 사이의 관계를 얘기한다. "이 로고스logos는 언제나 그러한 것으로 있지만, 사람들은 듣기 전에도, 일단 듣고 나서도 언제나 이해하지 못한다." 이 로고스는 진리다.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이다. 대개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나오면 무지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쓴다. 즉 자기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개 "그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어떠한 것과 마주치든 간에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배우고서도 알지 못하지만, 자신들이 (안다고) 여긴다." 무지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조용히 있으면 무지가 들통나지 않는데, 자신이 안다고 여긴다. 아는 채 하는 사람, 극강의 무지자.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가장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 즉 전체를 다스리는 로고스와 갈라선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다. 사실은 로고스는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고, 날마다 마주치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날마다 마주치지 못한다. 왜냐 로고스와 갈라서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 이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그런데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로고스가 있다. 그 로고스를 모르는 사람은 현상의 사소한 변화에도 흥분을 하기 마련이다. "개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서 짖는다." 정말 기가막힌 문장이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향해 짓는 개,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이 재미있다. 

제7강 92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개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서 짖는다."(DK22B97)

공부할 때 중요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하나가 시대적인 맥락인데, 이런 것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상태로 얘기가 진행되고 있다. 철학은 원래 그렇다. 그래서 철학공부 하는 사람들은 역사책을 잘 읽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대중의 시인들을 믿고 군중을 선생으로 삼았다. 따라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앎을 가진 자가 귀족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헤시오도스와 같은 사람을 비판을 한다. 헤시오도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가르친 자"인데 헤라클레이토스는 헤시오도스가 "모든 날들의 본성이 하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귀족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지한 사람에 대한 비판, 무지하지 않은 사람, 알고 있는 사람, 깨어있는 사람들은 본성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제7강의 내용이다. 


그 다음 제8강에 있는 내용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형이상학 책에서 또는 존재론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웬만한 변화에 관한 얘기들이 기본적으로 원형이 여기에 다 들어있다. "함께 잡혀진 것들 — 전체이며 또한 전체가 아닌 것, 한곳에 모이며 또한 따로 떨어지는 것, 함께 부르며 또한 제각기 부르는 것,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하나, 그리고 하나로부터의 모든 것" 8강에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들어있다. "함께 잡혀진 것들"은 서로 대립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인 것을 말한다. 생각을 두개의 차원으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고 해보겠다. 그러면 봄과 여름은 다르다. 그리고 가을과 여름도 다르고 가을과 겨울도 다르다. 또 겨울과 여름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빌려서 말하면 여름과 겨울은 서로 불화하는 것이다. 화합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또 봄과 겨울도 마찬가지이고, 봄,여름,가을,겨울은 서로 불화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봄,여름,가을,겨울은 하나이다. 사계절이라고 하는 것 안에서는 하나이다. 즉 우리가 사계절이라고 말하는데, 사계절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냥 우리 눈 앞에는 어떤 때가 되면 꽃이 피기 시작하고, 또 어떤 때가 되면 눈이 오고 사방이 얼어버리는 현상들만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현상들에 대해서 봄이라고 하기도 하고, 가을, 겨울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말한다. '명칭'이 중요한 표현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변화하는 여러 현상들과 궁극적인 하나를 말했을 때 변화하는 여러 현상들은 말그대로 우리의 감가계에서 파악하는 감각지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계절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부른다. 그러면 명칭은 감각지로서 즉 앞에서 파르메니데스에서 할 때처럼 perception으로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 현상들을 통칭해서 다묶어서 우리는 '계절이다'라고 이름을 붙인다. 지성에 의해서 이름을 붙인 것, 이성적인 것이다. 앞서 두 개의 차원으로 논의한다고 말했다. 두번째 차원이 뭐냐하면,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물론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도 명칭을 붙인다. 봄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봄에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이 있을 뿐이지만 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봄,여름,가을,겨울을 또 묶어서 계절이라고 한다. 봄에 일어나는 현상, 여름에 일어나는 현상, 가을에 일어나는 현상, 겨울에 일어나는 현상은 감각지이다. 그런데 그것을 한번 더 생각해서 두 번 생각해서 이름을 봄,여름,가을,겨울이라고 붙였다. 두번째, 그 다음, 그래서 meta라는 말을 쓴다. 즉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명칭은 메타적인 앎이다. 그리고 그런 메타적인 앎을 한 번 묶으면 계절이라고 하는 두번째 메타적인 앎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이 여러 차원으로 전개된다. 우리가 계절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안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대립되는 것들도 다 통일이 된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이 계절로 묶이는 가를 생각해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한다.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들의 왕", "전쟁은 공통된 것이고 투쟁이 정의이며, 모든 것들은 투쟁과 필연에 따라서 생각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봄,여름,가을,겨울에서 한번 더 들어가보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것인가. 예를 들어서 거의 죽을 정도로 아프다. 그러면 살아 있다고 하는 것과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극단적인 대립이다. 생과 사, 중간은 없다. 이런 것을 모순 개념이라고 한다. 물론 의학에서는 죽음의 상태를 정의하는 여러 요소가 있다. 존재론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처럼 살아있는 것만 있고 죽은 것은 없는 것이다. 병마와 싸워 이긴다는 표현이 있다. 병에 걸렸을 때 병을 이기고 살아나려면 병과 싸워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표현하면 무와 싸우는 것이다. 그게 바로 헤라클레이토스가 여기서 말하는 전재이다. 그리고 무와 싸우면서 이겨내면 삶이 지켜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죽음과 싸워 이기려면 나의 생명력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야 한다. 즉 누군가가 아프다가 건강을 회복했다면 그가 건강을 계속 생성해냈기 때문에 회복한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너무 당연한 것인데 존재론에서는 너무 당연한 것을 다룬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계속해서 생명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잘산다 못산다를 떠나서 그냥 살아있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존재와 무가, 즉 삶과 죽음이 이러한 전쟁 상태에 있는 것을 알고, 끝없이 존재와 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가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다음 보리 음료와 강물의 비유를 보겠다. "보리 음료도, 젓지 (않으면), 분리된다." 보리음료라는 것은 보리, 치즈가루, 포도주를 섞어 만든 전통적인 음료이다. 가만히 두면 보리와 치즈가루, 포도주가 나뉜다. 저어야만 보리음료가 되는 것이고 젓지 않으면 분리된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젓는 것을 바로 대립자의 투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보리음료라는 동일성을 유지하려면 끝없이 그 구성요소들을 서로 뒤섞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유기체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들이 뭔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엮어있지 않으면 이 부분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에 따라서 하나의 개체로서 더이상 존립하지 않고 무에게 굴복하게 된다. 그 다음 강물의 비유를 보자. "같은 강에 발을 담근 사람들에게 다른 강물이, 그리고 또 다른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간다. 그리고 혼들은 젖은 것들로부터 증발되어 나온다."  예전에 헤라클레이토스를 읽을 때는 이 부분을 유심히 보지 않았는데, 이 문장을 유심히 보았다. 이 문장은 에우세비우스의 <복음의 준비>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써서 남겨놓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은 여기 저기에 후대 사람들이 이게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야 라고 인용한 것들을 뽑아서 묶어 놓은 것이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의 역사를 쓴 사람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 사람이다. 그러면 적어도 2백년 정도 후의 사람이다. 그런데 왜 에우세비우스가 이것을 인용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게다가 그 앞을 보면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그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뤼라의 경우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이다" 이말은 로마의 주교였던 히폴뤼토스가 『모든 이교적 학설들에 대한 논박』에 나오는 말이다. 히폴뤼토스가 기독교의 교리를 옹호할 때 일차적으로 그 사람 앞에 놓여있는 지적인 투쟁의 상대자들은 누구엿는가. 헬라스 철학자들이었을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을텐데 그 중에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을 것이다. 에우세비우스의 <복음의 준비>을 읽지 않아서 그 문장이 인용된 앞뒤 맥락을 잘 모르겠어서 이번에 읽어볼 참이다.

여기 표현을 보면 '강'이라는 말이 있고 '강물'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강'이라는 것도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벌서 여기서 이름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체를 집약하고 있는 명칭이다. 그리고 그 차원으로 올라서야만 참으로 아는 자이고 진리를 가진자라고 말한 것이다. 메타적 사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강물이 계속 흘러야만, 즉 이 강물, 다음 강물이 계속 흐르는 것이 계속 생성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강이 유지되는 것이다. 강이라는 존재는 강물들이라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생성함으로써 강일 수 있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지 않으면 더 이상 강이라고 부를 수 없고 호수라고 부른다. 따라서 강이라는 하나와 거기에서 흐르는 여러 강물들, 그것을 묶어서 전체라고 한다, 강물들의 총합인 전체, one and all, hen kai pan이 성립한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하나는 명칭을 가리키는 것이고, 전체는 그 명칭 아래 포섭되는 대립적 존재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가령 대립적 존재자들이 더 이상 없다고 하면 hen kai pan이 깨지는 것이다. 따라서 강과 강물들이라는 것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면 강도 영원하지 않고 강물도 당연히 영원하지 않다. 그게 바로 영원히 살아있는 불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가지가 있다. 끝없이 생성되는 대립자들, 그리고 그 생성들을 포섭하는 하나가 있고, 그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제3의 원리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는 극단적인 유전론자라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것에 따르면 변화를 통해서 하나가 유지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다시말해서 변화라고 하는 것을 무시한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크라튈로스》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계속해서 변하는 것만 얘기했다면서 극단적인 만물유전론자라고 말한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극히 일부분만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플라톤은 불변의 이데아가 있고 그 이데아를 모방해서 지금 눈 앞에 보이는 현상들이 있다고 말해서 불변의 이데아라고 하는 hen 과 우리 눈 앞에 놓인 pan, 이 여러가지 변화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단순히 미메시스만 가지고 설명한 부분도 있다. 미메시스만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부족하지 않나라는 불만이 있다. 이 책 제목이 "존재하는 무한자 사유하는 유한자"라고 했다. 무한자라고 하는 것을 hen이라고 한다면 무한자도 수없이 유한자를 포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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