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07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9강

❦ 플라톤: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
인간의 영혼과 형상이라는 목적| 파이돈 / 공동체, 커다란 인간학| 국가
‘있는 것’을 따지는 존재론은 본래 가치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인간 개체에 대한 탐구와 인간이 모여서 이루는 공동체에 대한 탐구는 구별되는 영역, “좁은 의미의 인간학이 ⟪파이돈⟫이라면, 이것과 ⟪국가⟫에서 다루는 정치학을 묶으면 넓은 의미의 인간학”

❦ 제9강: 잘 산다는 것
‘자연학으로부터 인간학으로의 전환’은 겪음을 통한 앎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잘 사는 것에 관한 탐구는 객관적 세계에 관한 지식이 아니므로 우연적인 것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07

⟪철학 고전 강의⟫ 제9강은 제목이 "잘산다는 것"이다. 제9강부터 시작해서 10,11,12강까지가 《파이돈》을 다루고, 그 다음 13,14,15강이 《국가》를 다루고 있다. 분량으로 보면 《국가》가 훨씬 두꺼운 책이고 《파이돈》은 그것에 비하면 굉장히 얇은 책이다. 그런데 지금 챕터의 분량은 《파이돈》이 4개이고, 《국가》가 3개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다해서 6개이다. 이 형식의 문제를 먼저 설명을 하겠다.

《파이돈》을 다루는 제9강 "잘산다는 것"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 일반에 관한 얘기가 절반쯤 들어가 있다. 다시말해서 오로지 《파이돈》을 다루는 얘기가 절반쯤이다. 따라서 《파이돈》을 다루는 부분은 챕터 3개 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해보면 누가 더 위대한가를 따져묻는가는 어이없는 물음이고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다. 이 책을 쓸 때 강의를 해서 강의한 것을 추리고 모아서 책을 썼는데 본래는 플라톤은 강의를 좀 많이 했다. 파이돈, 국가뿐 아니라 정치가도 조금 읽고, 소피스테스, 필레보스도 조금 읽고 했다. 따라서 양적으로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이 3배 정도 된다. 그런데 책으로 묶어 낼 때 플라톤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책의 균형을 보면 형식적으로 플라톤이 지나치게 많다고 하는게 하나 있었다. 책으로 묶는다고 하는 것은 규모와 체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규모와 체계를 생각하다보면 내가 강의한 내용을 모두 다 책에 담을 수는 없다. 소피스테스, 필레보스, 정치가 등의 대화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의 원리들에 대해서 가르치고 싶은 또는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런데 책의 완결성을 생각해보면 양이 많아지는 것은 둘째치고 산만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번째로는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다르게 또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다르게, 또 데카르트나, 칸트나, 헤겔과는 다르게 플라톤은 존재론, 형이상학의 내용을 좀 벗어나 있다.

책의 목차를 보면 II 플라톤: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 III 아리스토텔레스: 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 IV 데카르트: 주체인 인간의 세계 구축, V 칸트: 인간의 한계 자각과 ‘장래의 형이상학’, VI 헤겔: 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 이렇게 되어 있다. 사실 존재론이라는 학문 영역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무엇이 좋으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학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가치 value 를 따져묻는 것이다. value라고 하는 것은 대상세계가 어떠하던 간에 인간의 일정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관심을 갖고 또 그런 관심에 따라서 대상 세계와 존재에 대해서 차등을 두는 것, 위계의 차별을 두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 의지나 감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주관의 가치의식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실, 그리고 존재와는 다른 것이다. 인간의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을 탐구한다고 하면 플라톤은 잘 거론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를 들어 존재론이라는 학문 자체를 현대에 와서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고 평가를 받을 정도의 굉장한 학자가 니콜라이 하르트만인데 존재론을 다루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루고 플라톤은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대해서 탐구를 하는 철학고전강의라는 책을 쓴다고 하면 존재론의 본래의 영역에서는 플라톤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기 때문에, 강의를 하면서는 플라톤을 많이 얘기했다 해도 존재론이라는 학문의 본성상 플라톤을 그렇게 많이 다루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최소한 만을 다룬다고 할 때 《파이돈》과 《국가》를 거론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파이돈》과 《국가》를 묶는 공통의 관념, 흔히 하는 말로 키워드가 무엇인가. '좋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목차를 보면 파트1이 "I 희랍 철학의 시작: 세계에 전체에 대한 통찰"로 되어 있고 파트2가 "II 플라톤: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로 되어있다. 파트3,4,5,6를 읽어보면 유독 플라톤에서 사용하고 있는 ‘좋음’ 위에 인간과 공동체를 세우려는 노고, 노고라는 단어가 다른 것들은 학문적이고 무미건조한 가치평가가 배제된 단어들인데 플라톤에서는 아니다. 노고는 애쓴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결'이고 데카르트는 '구축', 칸트는 '형이상학'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굉장히 애를 썼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안될 만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제9강의 마지막을 보면 "좁은 의미의 인간학이 ⟪파이돈⟫이라면, 이것과 ⟪국가⟫에서 다루는 정치학을 묶으면 넓은 의미의 인간학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이라는 존재가 모여서 하는 공동체 이 둘을 묶어서 좋음이라고 하는 목적을, 인간 개인과 인간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묶어서 좋음이라는 목적을 향해가도록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이라면 그 목적을 향해서 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9강에 여기저기 쓴 말들이 학문적인 것을 흉내내서 써놓은 말들이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쓰라린 경험에서 나오는 말들이 몇 개 있다. 예를 들어서 "불변의 좋음에 관한 철학적 통찰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잠정적으로 내놓은 역사적 지혜는 양립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 자체로 무미건조한 학문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은 살면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런 좋음을 철학적으로 통찰하는 것은 그것대로 있는 것이고, 우리가 살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서 내놓은 역사적 지혜는 인생을 겪으면서 알게되는 쓰라린 후회와 원망과 희망 이런 것들이 섞인 한탄에 가까운 것이다. 이 두개는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제9강 118 좁은 의미의 인간학이 ⟪파이돈⟫이라면, 이것과 ⟪국가⟫에서 다루는 정치학을 묶으면 넓은 의미의 인간학이 될 것입니다.

제9강 112 불변의 좋음에 관한 철학적 통찰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잠정적으로 내놓은 역사적 지혜는 양립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과 고난에 관련되지 않는다.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좋으나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은 이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첫시간에 물리학과 비슷한 학문이라고 한 바 있다.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물리학은 객관적 세계에서의 확실한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연학이다. 그것에서 벗어나서 소크라테스가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 나아갔다고 하면 파토스, 즉 겪음을 통한 앎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잘사는 것에 대한 탐구를 할 수밖에 없고 우연적인 것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잘산다고 하는 것은 우연한 것의 영역에 들어있으므로 존재에 관한 필연적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쉽게 다룰 수가 없다. 그러면 플라톤이 좋음이라고 하는 것 위에다가 개인의 삶도 세우고 공동체도 세우고 하려면 가치를 따져묻는 우연적인 것에서도 최소한 변하지 않는 것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를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있는가. 정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이것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는데, 플라톤이 내놓은 것이 영혼불멸이다. 영혼불명은 객관적인 팩트가 아니라 플라톤의 철썩 같은 믿음이다. 다시말해서 파이돈이나 국가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는 것이 영혼불멸이라고 하는 신앙, 믿음이다. 오늘날 같으면 그런 얘기를 안 했을 것이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에서 그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지식 자산이 있을 것이다. 지식 자산이라는 말을 보충 설명해보면 지금 철학고전강의를 공부하는 사람은 왜 공부하는가.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서. 위로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로하려면 위로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책도 읽고 음악도 듣기도 할 것이다. 그런 것을 모두 묶어서 지식 자산이다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위로할 수 있는 지식 자산이 무엇인가. 그 양을 늘리기 위해서 또는 좀 더 그럴싸한 믿음직한 지식 자산을 만드기 위해서 우리는 공부하는 것이다. 지식 자산을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위안을 위해서, 그래서 보에티우스가 쓴 <철학의 위안>을 보면 이 사람이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이겨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성의 여신을 불러서 대화를 하는데 이것 역시 자기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좋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우리가 살고 있는데 공동체도 좋음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면 무엇을 가지고 설득할 것인가를 생각했을 때 영혼불멸이라는 것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시대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플라톤의 《파이돈》이나 《국가》를 읽을 때, 이 사람이 좋음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밑바닥에 깔고가는 지식 자원이 바로 영혼불멸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 좋음을 주장할 수 있겠구나라고 플라톤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 그러는가. 좋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그러하다. 

영혼불멸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놓은 대화편이 《파이돈》이다. 그리고 《파이돈》에서는 본격적으로 형상에 관한 논의가 나온다. 따라서 이것을 읽는 분들은 형상이 뭐냐고 말할 때 그 형상이라고 하는 아이디어가 영혼불멸과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영혼도 영원하다고 그러면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9강의 뒷부분으로 가면 《파이돈》의 구조를 살펴보자고 얘기했다. 《파이돈》의 구조라는 것은 형식적인 측면들이니까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구조는 책을 읽어보면 될 것이다. 《파이돈》에서 중요한 과제는 실천적인 차원에서 잘 살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밝히는 논변들이 제시되고 된다. 이것은 본래 존재론에서 다루는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 차원, 실천적인 차원, 또는 삶의 궁극적인 국면 이런 것들은 다 파토스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다가 목적을 주려고 하는 것이 혼의 불멸이고, 표면적인 주제가 혼의 불멸인데 혼의 불멸을 논증하기 위해서 형상이 요구되는 것이니까 실천적인 차원에서 잘사는 것,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혼의 불멸, 그리고 혼의 불멸을 이론적으로 세우기 위한 형상론, 이 세 개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존재론에서 본래 세심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꼭 유념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훌륭하였으며"(aristou), "가장 지혜로웠으며"(phronimotatou), "가장 올바랐다(정의로웠다)"(dikaiotatou)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잘 살아간 사람이고, 가장 잘 산 사람의 본本입니다. 《파이돈》의 표면적인 주제는 '혼의 불멸'이고, 혼의 불멸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형상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돈》에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밝히는 논변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상론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파이돈》 읽기의 첫번째 과제입니다." 이 문단이 플라톤 철학 전체의 핵심이 들어있다. 존재론은 잘사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플라톤이 하려는 시도 자체가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제9강 116 소크라테스는 "가장 훌륭하였으며"(aristou), "가장 지혜로웠으며"(phronimotatou), "가장 올바랐다(정의로웠다)"(dikaiotatou)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잘 살아간 사람이고, 가장 잘 산 사람의 본本입니다. 《파이돈》의 표면적인 주제는 '혼의 불멸'이고, 혼의 불멸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형상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돈》에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밝히는 논변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상론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파이돈》 읽기의 첫번째 과제입니다.

두번째는 그런 형상론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려면 사람들에게 참으로 그럴싸하게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이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논박술과 산파술로 되어있다. 그러면 말하자면 논의의 줄거리가 잡힌다. 플라톤의 목적을 알아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 사람울 설득해야 하는데, 그 설득을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 변증법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제9강을 공부하는 핵심적인 요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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